누적: 300.85km, 오늘: 12.73km, 걸음 수: 15,756
표지사진 | 서울 양천구 목동 906 ‘파리공원’
이번 겨울방학에, 아이를 어디로
보내야 할까?
딸아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학원 알아보는 것이 일이 되었다. 물론 대부분은 아내가 수고하고 있지만, 방학 동안에 다닐 학원은 나도 부지런히 알아보고는 했다. 지인분이 ‘윈터스쿨’을 이야기해서 그때서야 윈터스쿨이 겨울방학 내내, 하루 종일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치는 학원이란 것을 알았다.
“ 대치동이나 목동으로 알아봐야겠지? 용인 쪽에도 좋은 학원이 있다고 하던데. “
나도 열심히 알아보고 있는 티를 냈다. 아내가 이내 대치동이나 용인은 멀어서 어떻게 보내느냐고 한다.
“ 기숙사도 있데. 기숙하는 게 낫지 않을까? ”
나는 아이를 한두 달 기숙사에 보내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 생각했다. 지방에서 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이 기숙학원에 모이기도 한다니, 다른 애들 모습을 보고 우리 애가 모처럼 각성도 하기를 바랐다.
“ 그건 내가 싫어. 너무 오랫동안 안 보면 좀 그래. “
아내는 아이를 기숙사에 보내기는 싫은가 보다.
“ 그러면 뭐, 방법은 없네. 그나마 가까운 목동으로 알아보자. ”
결국, 아내와 나는 딸아이를 목동에 있는 윈터스쿨에 보내기로 했다. 내가 20여 년 만에 목동에 방문하게 된 이유였다.
딸아이는 결국 목동 윈터스쿨에서, 거의 6주간 스파르타식 교육을 잘 버티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굉장한 효과를 바랐는데, 5개월이 흐른 지금 효과가 정말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버티는 힘만이라도 잘 길러졌기를 바랐다. 하지만, 또 아주 가끔씩 나태함이 보일 때는 ‘아닌가?’ 싶기도 했다. ‘ 나 때는, 이런 것도 없었단 말이지. 그게 얼마짜리인데. 아이고, 내가 그 정도의 지원을 받았다면 말이지, 서울대를 깽깽이로도 가지 않았을까? ’라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와 잔소리를 섞어서, 속으로만 끙끙거렸다.
뭐, 꼭 그때의 일이 계기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는 오늘 ‘목동’을 걷기로 했다. 주로 강북과 강남, 강동을 걸었으니 섭섭지 않게 강서를 걸어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오래전부터 내게는 목동이 주는 이미지가 있었다. 서울에서 도시계획에 의해 설계된 대표적 동네. 대단지 아파트에 대한민국 최고의 학원가. 전국에서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과 그 가족들이 몰려오는 곳. 그리고 값비싼 아파트. 때로는 살기 좋은 곳이라고 추켜세우는 분들도 많지만, 역시 교육 환경 때문에 넘사벽 부촌이라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지 않나? 그런 편견들 말이다. 그런데 사실… 목동은 처음부터 살기 좋은 동네는 아니었다네?
조선시대, 목동은 나무가 많고 물이 자주 넘치는 침수지대였다. 말을 방목하는 목장(牧場)으로 쓰였기에 牧洞이라 불리며 유래되었고, 이후 木洞으로 표기가 바뀌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양천현이 양천군 남산면으로 개편되며 목동 지역이 행정 구역으로 정비되기 시작했다. 저지대인 탓에 잦은 범람으로 농경에는 부적합했으나, 70~80년대 안양천 정비 이후 신시가지 아파트 개발이 진행되며 급속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개천에서도 별로였던 녀석이 용이 되던 순간이었다.
오늘은 순수하게 목동을 감상하는 날이니까, 편견을 버리고 간다. 우선 마포역에서 오목교역까지, 지하철 5호선을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빠아앙~ 빼애액! 빼애액~~ 덜커덩 덜커덩… 은 아니고. 지하철을 탔지만 마치 ‘비둘기호’를 타고 가듯, 나는 여행의 문턱을 넘고 있다.
칠월의 중순, 오늘도 습하고 무더운 날씨의 연속이다. 그나마 호우특보가 내려진 터라 구름은 잔뜩이었다. 한낮 기온은 섭씨 32도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더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인구가 많은 목동이라 해도 이런 날에 감히 돌아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목동의 도로는 대체로 넓고 단정했다. ‘어디로 가지?’ 지도앱을 켜고 목동의 가장 핫플레이스를 검색해 보니, 우선 나오는 지명은 ‘목동운동장’과 ‘파리공원’이었다. 목동에 운동장 하나쯤은 당연히 있을법했고, 파리공원? 들어본 듯 아닌 듯 다소 생소했다. ‘목동에 파리공원이 있구나? 그럼 여기부터 가 봐야겠다.’ 오목교역에서 직선코스로 1.5km밖에 안되었기에, 천천히 보도블록을 밟고 가끔 나오는 골목을 훑으면서 걸었다. 가까운 길 건너에 천주교 목동성당이 보였다.
목동성당은 겉에서 보기에도 매우 큼지막했고, 안으로는 세련된 성당이었다. 바닥돌은 울퉁불퉁, 발가락이 즐거워한다. 특히 입구에 세워진 돌기둥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예배가 끝났는지, 교인들은 한쪽 카페에서 수다꽃을 피운다. 샅샅이 구경하기에는 무안해서, 일단 곁눈질로 살짝 눈도장만 찍고 나왔다. 성당에 놀러 온 가족은 평안해 보였고, 하루는 여유로운 강물로 흐르고 있다.
목동이 특이한 점은, 신시가지 대부분이 일방통행 길이라는 점이다. 예전에 자동차를 타고 목동길을 지나칠 때마다 길 찾기가 쉽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목동은 도시계획이 적용된 1세대 동네였는데, 80년대에는 보행자 도로와 찻길을 분리하고 일방통행길로 만들어서 교통의 흐름을 좋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길은 넓고 샛바람이 크게 돌아, 확실히 걷기에 여유로웠다.
목동 1동을 걷는다. 정돈된 길 옆, 자그마한 상가에도 학원들이 많다. 초등학교 앞이라 노란색 안전표시들이 세상길을 노랗게 물들였다. 걸으면서도 재잘대는 아이들 목소리가 뒤에서 달려오는 듯했다. 하지만 노는 애들은 크게 보이지 않았다. 오랜 세월 아이들을 가르치고, 더 넓은 세상으로 보내는 일은 자기 운명이라고. 목동은 오랜만에 방문한 이방인에게도 하나하나 가르쳐주고 있었다. ‘목동은 노는 곳이 아니란다.’
목동 1동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생각보다 나이를 더 많이 먹었다. 여기도 곧 재개발을 한다고는 하지만, 그 시간이 조금 더 늦게 왔으면 싶었다. 아파트 안을 돌아다니는데, 그 오래됨이 주는 풍경이 너무나 정겨웠다. 네모 상자 같은 목동 아파트는 반듯하게 키를 세우고, 자동차들은 지하가 아닌 자기 품에 안아 가지런히 놓았다. 그 사이사이 어르신 나무들은 아파트와 함께 자라고 늙어갔다. 녹색이 우거져 숲을 이루었는데, 그것은 또 하나의 목동을 지키는 숨결처럼 보였다.
목동역을 지나 신정동으로 잠시 빠졌다. 이곳은 아파트보다는 주택가들이 많았다. 얽히고설킨 전봇대 전선들은 세상 이야기를 전기로 품어 각 가정으로 나르고 있었다. 골목을 지나면서 그 이야기를 들으며 걷는 일이 좋았다. 서울의 많은 집들이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목동은 오래된 품격을 지니고 있다. 더 정갈하면서도 더 나른해 보였다. 사람들은 그 여유로움이 발등에 앉은 나비가 되어 살랑이는 느낌을 알까 싶다.
조금 더 아기자기한 목동 4동으로 넘어왔다. 곧은길 옆으로 나무들이 줄지어 가로수를 만든다. 눈을 뜨고도 상상이 된다. 가을이면 얼마나 많은 갈색 낙엽으로 융단을 깔까. 그 길 위로 부지런히 걸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연인들보다도 학생들이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더 어울리는 것은, 아직 내가 목동이 주는 편견을 다 버리지 못했기 때문인가 보다.
‘양천도서관’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갑자기 많아진 느낌이다. 이 휴일에도 도서관에 와서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나도 걷기만 아니었다면, 하루쯤은 도서관에서 미친 듯이 소설책을 읽어도 행복할 텐데 말이다. 그리고 저 앞으로 ‘파리공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은 마치 목동 주민들의 자랑거리가 아닐까 싶다. 자기 동네에 이렇게 좋은 공원과 도서관이 있으니 말이다. 갑자기 부러움이 가슴을 밀고 나왔다.
파리공원 입구에 들어섰다. 누가 뭐래도 여기가 진짜 ‘파리’라는 듯이, ‘에펠탑’ 모형이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치 카페거리처럼 꽃밭에 둘러싸인 의자들도 인상적이었다. 광장은 제법 넓었다. 아이와 아빠가 저 멀리서 공을 주고받을 정도다. 한가운데에는 작은 도서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종일 걷다 보니 수분이 부족했다. 조용히 책을 읽는 사람들 틈에 앉아 물 한잔을 마시고 에어컨 바람을 쐬었다.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꼬장꼬장한 땀 냄새가 올라왔다. 내가 견딜 수가 없었고, 겸연쩍었다. 다시 나와 걷는데, 저 앞으로 분수대에 아이들이 천지다. 물바람을 일으키며 깔깔대는 모습에 세상 풍요가 따로 없었다.
목동 5동을 지나 목동 6동, 그리고 ‘목동운동장’ 뒷길로 접어들었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인지 풀잎이 무릎까지 올라왔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열리지도 않은 경기장에, 들리지도 않는 함성들이 여름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 구름은 또 왜 이렇게 아름다운 거야? 창창한 푸른 바다 위를 흰 수염고래 떼가 헤엄쳐 태평양을 건너는 듯했다. 목동이 점점 더 좋아진다.
한 바퀴를 휘돌고 다시 목동 5동에서 4동을 지나 등촌동으로 향했다. 오늘 목동의 웬만한 시그니처 지역은 다 밟아본 듯하다. ‘목마근린공원’, 그 옆의 ‘이대목동병원’, 그리고 한참을 걸어 도착한 ‘목사랑시장’까지. 내 생애 목동을 이렇게 많이 걸을 날은 아마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다.
넓은 길도 많고, 교통도 편하다. 학원도 즐비하고 공부하기 좋은 도서관도 있다. 누구나 파리의 연인이 되는 공원부터 커다란 흰 수염 고래가 태평양을 건너는 운동장까지. 게다가 대형 병원도 지근거리에 있으니, 목동은 정말 없는 게 없는 곳이다. 아무리 목동에 대한 편견을 깨려고 해도, 이미 좋은 동네는 좋을 수밖에 없다. 그냥 고민 없이, 목동은 살기 좋은 동네라는 편견을 접지 않기로 했다. 집에 돌아와 딸아이를 보는데, 갑자기 또 측은해진다. ‘내년 겨울방학에도 목동으로 가자꾸나.’
- 제26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