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적: 338.82km, 오늘: 12.44km, 걸음 수: 17,235
표지사진 | 서울 종로구 청운동 ‘북악산을 보다’
오늘이 마지막이지?
아내는 오늘 서울길이 마지막이냐고 되내어 물었다. 1년 내내 걷는다고 주말마다 나가는 신랑이 무척 서운했나 보다.
“ 응. 올해는 오늘이 마지막이네~ “
나는 끝내, ‘올해는’이라는 말을 붙이고 말았다. 마치 이제는 걷기를 그만두겠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당분간은 조금 덜 걷고 나머지는 가족들에게 더 신경을 쓰겠다는 다짐은 있었다.
아내는 ‘올해는’이라는 말을 듣지 못한 것 같다.
“ 그럼, 마지막으로 가려는 동네는 어딘데? ”
아내는 평소 한 번도 묻지 않았던 목적지를 물었다. 마치 마지막으로 예의상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나 보다.
“ 청운동 ”
“ 청운동? 청운동이 어디야? ”
아내는 ‘청운동’을 모르는지 갸우뚱했다. 하긴, 나도 처음 듣는 동네였으니까. 태어나서 한 번쯤은 걸어봤을 수도 있겠으나, 이름 기억은 없는 동네이다.
“ 거, 뭐야. 청와대? 그 뒤쪽에 있던데? 기와집도 있고, 또 서촌마을 하고도 가까워서. 좋을 듯 해. ”
아내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자기 일을 한다. 나도 주섬주섬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이전에, 기와집이 있고, 고즈넉한 동네를 검색했더니, 종로구의 ‘청운동(淸雲洞)’이 나왔다. 이름은 맑았다. 올해 마지막 동네로 좋았다. 하지만 오늘은 오후 늦게 비가 오려는지 아침부터 잿빛이다. ‘ 청운동을 가는데 말이야. 맑은 구름은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
혼잣말을 한다. 그래도 잿빛 구름은 꿈쩍하지 않았다. 햇살이 살짝 나오기는 했다. 더운 날씨는 아니었다.
인사동부터 걸어가기로 했다. 인사동을 지나 경복궁 앞으로 해서 청와대 방향으로 올라가면, 그 끝 동네가 청운동이다. 가는 데에 거리가 3km 남짓, 30분이 채 걸리지는 않을 것 같다. 딱 좋은 워밍업이다.
인사동으로 들어섰다. 그 길이 반갑다. 아침이라 한적하다. 가운데 찻길을 두고 양쪽의 사람 길은 네모 블록으로 정갈하다. 발자국을 조금만 움직이면, 길은 구석구석 골목으로 이어진다. 그 끝은 가깝고, 다시 그 끝의 모퉁이는 다른 골목으로 향한다. 거기서 불어오는 찻집의 향기와 음식은 풍요를 담고, 바람으로 내 살곁에 닿는다. 지난 ‘코로나’ 시절, 인사동은 관광객들이 1도 없었는데, 지금은 아주 복작거린다. 다행하고, 그것이 참 좋다. 서울에서 가장 고전적이고 한국적인 곳은 이만한데도 없는데, 그것을 많이 보여 줄 수 있으니 흐뭇하다. 볼 것 많고, 먹을 곳 많고, 그리고 각종 관광지와 직결되어 있는 인사동은, 알록달록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
경복궁은 하얗다. 하얗디 하얀 경복궁의 그 끝을 알 수 없는 벽으로 해서 햇살이 부딪히면, 벽돌은 하얀 별이 되어 부수수수수 빛깔이 흩어지며 찬란하다. 내가 본 경복궁의 담벼락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복을 닮았다. 정갈하면서 어쩜 이리도 품격이 있을까.
경복궁 정문 앞으로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복을 빌려 입고 단체 사진을 찍는다. 다소 더운 날이고, 땀을 삘삘 흘리면서도 표정은 웃는다. 그 웃음이 경복궁 모래바닥으로 떨어지며 길은 또 행복해진다. 나는 그 모랫길을 밟으며 담벼락을 따라 청운동으로 올랐다.
청운동에 들어서기 전, 저 앞에 경비가 삼엄한 것이, 청와대인가 보다. 청와대 쪽으로는 감히 사진을 찍기가 거북했다. 그나마 왼편으로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鳳凰)이 하늘로 우뚝해서 기념사진을 찍기에 좋았다.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그 한들거리는 사이로 북악산이 병풍을 치고 있다. 사람은 없고 오롯이 나 혼자서 봉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 여러 번 돌면 1+1으로 대통령의 기운을 얻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 광장 뒤로 ‘무궁화동산’이 나온다. 당연하게도, 무궁화가 잔뜩 피어있었다. 운동을 해도 좋고, 산책을 해도 좋을 길이 무궁화를 옆에 끼고 이방인을 반긴다. 편안한 기운보다는 엄숙한 기분이 든다. 봉황, 무궁화, 청와대… 청운동은 입구에서부터 고위직이다.
일요일, 북악산으로 오르는 ‘창의문로’를 따라 낮은 주택들이 늦잠이다. 조용한 가운데에 이른 잠을 깬 매미가 찌르르르 밥을 짓는다. 한 발 한 발 오르는 길이 어렵지 않았다. 북악에서 불어오는 공기는 보약 같다. 한 움큼 쥐어 폐 속으로 넣는다. 숨을 들짝거리는데, 저 앞에 내려오는 노인도 숨을 들썩인다.
청운동은 작은 동네이다. 아래로는 옥인동과 효자동, 위로는 북악산 길을 따라 부암동으로 빠진다. 예전 부암동을 걸었을 때, 인왕산 길을 향해 오른쪽으로 가면서도 왼쪽 길이 궁금했었는데, 그 길이 청운동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나 보다. 길은 한 끗 차이로 동네가 구별되면서도, 막상 걸어서 가 보면 느낌은 색다르다. 청운동은 조금 더 경복궁이나 청와대에 가까웁고, 북악산 바로 아래에 있다 보니 품격과 고요를 두루 갖추었다.
생각보다 기와집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중년의 다가구 주택과 빌라들이 즐비했다. 청운동 제일 위에 자리한 ‘청운벽산빌리지’를 한 바퀴 도니, 더 이상 둘러볼 곳이 없었다. ‘ 설마… 이게 다 인가? ’ 스스로 아쉬울까 봐 계단 하나를 더 밟고, 부동산 가게에도 멈추어 살 마음도 없는 주택 가격을 보았다. 더 많은 것을 눈에 담으려 천천히 걸었다.
다시 내려가려다, 작은 삼거리에서 멈추었다. 오른편으로 다시 오르는 골목이 나온다. ‘ 그냥 가 볼까? ‘
마음이 끌리는 데로 걸었다. 오르는 길이 점점 협소해져 갔다. 산으로 올라가는 건지, 아무 이정표도 보이지 않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다. 길은 낡은 채로, 오랜만에 방문한 이방인을 흘겨본다. ‘ 길이 있을까? 막다른 길 같은데, 그냥 내려갈까? ’ 그 짧은 찰나에도 생각이 깊어졌다. ‘ 에라, 모르겠다. 그냥 걷는 거지 뭐 ’ 막다른 길이라면 다시 돌아서 나오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들은 기우였다. 와… 감탄이다. 그 길 끝에 기와로 풍성한 도서관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거의, 늘 그랬던 것 같다. 사전에 알고 간 길보다 모르고 간 길이 더 큰 감동을 주었다. 힘들게 올라 간 길 끝이 막혀 돌아오는 일조차, 기억에 큰 별 하나 찍고 돌아오는 기록이 된다. 그것은, 알았다면 가지 않았을 무경험이 줄 수 없는 선물이 된다.
생각지 못한 ‘청운문학도서관‘에서 책 하나를 훑고 내려왔다. 마침 물 한 모금이 급했었는데, 도서관 내 정수기 물을 약수보다 더 보약같이 마셨다. 꽤나 운치 있는 도서관의 구조로 아이가 있는 가족들이 나들이 오기에도 좋아 보였다. 주차가 어렵기 때문에 나처럼 걸어 올라와야겠지만, 그만큼의 보답으로 폭포수와 대나무숲을 만날 수도 있었다.
올라오는 길만큼 내려가는 길은 더욱 수월했다. 옥인동에 이르자 청운동에서는 크게 보이지 않았던 옛 가옥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삼청동에 북촌한옥마을이 있다면, 옥인동에는 서촌한옥마을이 있다. 가옥 처마 끝에 달려있는 ‘스테이’ 간판이 아담하게 흔들린다.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내가 외국인이 아닌데도 관광객이 되어 한국을 느끼게 된다.
통인시장에 이르자 이제 모든 길들이 익숙해졌다. 이전부터 좋아하던 동네여서 아내와도 몇 번을 왔었던 곳이다. 빵집 순례로 꽤나 유명한 ‘효자베이커리’가 눈에 보였다. 내 마음이 가족에게 가 있었나 보다. 빵을 좋아하는 아내와 딸을 위해 빵집으로 들어갔다. 반갑게 맞아주니 그들의 웃음이 좋았다. 빵을 들고 가는 내 발걸음이 좋았다. 빵을 먹을 가족을 생각하니 더욱 좋았다.
- 제29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