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을 걷고 생각하고 씁니다
표지사진 | 서울 용산구 용산동 2가 ‘퇴근길’
1년 동안,
서울 동네 몇 개를 다니신 거예요?
평소 걷기에 관심이 많은 후배 하나가 나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보더니 물었다.
“ 글쎄… 한… 100여 개 정도는 되지 않을까? 더 될 수도 있고. ”
후배가 나의 시답지 않은 말에 깜짝 놀라더니, 서울 동네를 그렇게 많이 걸었냐고 되물었다. 나는 잠깐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사실 지난 1년간 100여 개의 동네를 걸었다고 해도, 전체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서울에는 법정동 기준 467개, 행정동 기준 426개의 동네가 있다. 법정동은 우리가 주소에서 흔히 보는 구분이고, 행정동은 행정 편의상 쪼개거나 합쳐 운영하는 단위다. 그러니 내가 발로 밟아 본 100여 개의 동네는 그 거대한 숫자 앞에서 아직 한참 모자란 셈이다.
그래도 지난 2년 동안 걸어 다닌 서울 동네를 전부 합치면 족히 300곳은 넘었을 것 같다. 걷다 보면 내가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치는 동네들도 많다. 이를테면 마포구 대흥동에서 강남구 개포동까지, 무려 14개의 동네를 지나쳐야 한다. (대흥동 > 염리동 > 도화동 > 청암동 > 원효로 > 이촌동 > 서빙고동 > 반포동 > 잠원동 > 논현동 > 서초동 > 역삼동 > 양재동 > 개포동)
이런 식이라면 머지않아 서울의 모든 동네를 걸어서 섭렵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체국 직원분들조차 자전거로 할당된 동네만 다녔을 테고, 나처럼 무식하리만치 걸어서 다닌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꼭 달성해야 할 목표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런 날은 곧 찾아올 것만 같다.
선배는 어디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후배의 말에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곡동’과 ‘구기동’을 꺼냈다. 특히 강남구 자곡동은 내게 두 번째로 살고 싶은 동네가 되어버렸다. 구룡산과 대모산의 산자락 아래, 품에 안기듯 펼쳐진 주택들. 그리고 3층 테라스를 보유한 고즈넉한 효성해링턴코트 아파트는 자금 여유만 된다면 꼭 살아보고 싶은 집이 되었다(물론 시세를 보고는 그 욕심을 곧 접어야 했다). 그 겨울, 세곡천을 따라 걷다 마주한 자곡동의 차디찬 공기와 고요함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구기동’은 노년에 살기 좋은 동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기계곡을 오르는 길도 크게 어렵지 않았고, 북한산에서 흘러내리는 시원한 공기와 계곡물은 사시사철 청량함을 전해 주었다. 동네는 고요하면서도 문학가들이 사랑하는 세검정과 부암동과도 가까워, 죽는 날까지 마음이 내내 풍요로워질 것만 같았다.
서울이 주는 느낌은 어땠나요?
저도 평생을 살고 있지만, 제가 모르는 서울이 궁금해요.
서울 토박이인 후배도 문득 서울이 궁금해졌나 보다. 하긴, 살면서 언제 스스로 서울을 궁금해했을까? 스물네 개의 서울은 나에게 다양한 감상을 주었다. 서울의 표면은 늘 근사했지만, 내가 모르는 골목길 풍경은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회사에서는 늘 앞만 보고 높은 이상만 좇았다면, 나는 걷기를 통해 자주 아래를 쳐다 보고 또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서울’이라는 사실에 자주 놀라고는 했다. ‘ 아! 이렇게, 아직도 나는 서울을 잘 모르는구나. ’
구(區)에서 구(區)로 넘어가는 경계는 도로 하나 차이에 불과할 때가 많다. 거리로 치면 100미터도 되지 않지만, 그 감상은 전혀 다르다. 사람들의 생활 방식, 자치구 제도의 차이, 그리고 각자의 생각과 삶의 결이 뒤섞이며 도시는 서로가 다른 이야기를 간직하게 된다. 강남의 아파트 담벼락과 강북의 주택 담벼락이 주는 인상도 다르다. 강남의 담벼락은 자기 구역을 지키는 병정 같은 느낌이라면, 북한산 아래 녹슬고 낡은 담벼락은 산바람이 주는 이야기와 주인의 땀에 녹은 소금벽처럼 자잘한 부스러기를 만들어 나의 코를 간지럽히곤 했다.
다 뜯긴 길 위, 팔 벌려 한 폭의 넓이로도 모자라 오고 가며 부딪히는 골목 안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눈을 살짝 감기만 해도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내 몸을 붕 띄워 깊숙이 끌어당기곤 했다. 눈물이 살짝 맺히는 건 그리움 때문인지, 먼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시간, 그 공간을 걸으며 느낀 감상은 오직 그 순간에 직접 걸어본 자만이 받을 수 있는 선물 같은 것이었다. 서울은 늘 곁에 있지만, 언제나 그리움이다.
누적 338.83km, 453,127보
이제 겨우 스물네 개의 서울을 걸었을 뿐이다. 나는 언젠가 또 다른 서울을 정성스레 포장해, 누군가의 아련한 기억으로 선물하듯 건네고 있을 것 같다. 나는 오늘도 걸으러 간다. 내일은 서울이 아닐 수도 있다. 그곳이 ‘섬’ 일 수도 있고, 영화 속에서만 보았던 경남의 ‘밀양’이 될 수도 있겠다. 아니면 30년 전 친구를 만날 핑계로, 어쩌면 충남의 ‘부여’를 걸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걷기가 내게는 탐험이고 보물 찾기이다. 그리고 나는 그 짜릿한 행복을, 나의 독자와 함께 기억의 선물로 나누고 싶다.
- 제30화 끝
2024년 9월부터 지난 1년간, 총 백여 개의 서울을 누빈 것 같습니다. 그중 스물네 개의 서울을 기록하는 일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이번에도 끊임없이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잔소리보다 응원이 더 많아진 사랑하는 아내와 딸에게도 고맙습니다.
그 사이, 저의 첫 번째 에세이 『나는 걷고 생각하고 씁니다』가 2025년 9월 정식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응원 속에 첫 주 베스트셀러에 올랐습니다. 무엇보다 하루 만에 제 책을 다 읽어주신 부모님과 장모님께 가장 큰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내년에는 서울을 벗어나 조금 더 먼 곳으로 걷기 여행을 다녀올 예정입니다. 아무도 잘 모르지만, 누구에게나 고향 같은 그곳에서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
나는 오늘도 걷고, 생각하고, 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