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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Aug 10. 2023

침묵, 언제부터였더라

아이에게 기다림을 배운다.

본디 나는 감정 파동의 진폭이 큰 사람이다. 좋으면 광분하듯 좋아하고, 싫으면 악다구니를 쓴다. 근데 언제부터였더라. 그 진폭이 잔잔해지기 시작한 게. 



사회적 조직에서 나와 새로운 도전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던 시점부터 약 4년을 4대 보험 테두리 밖에서 사부작거리고, 4년을 온전히 육아에만 전념했다. 분명하게 따지자면 도합 8년을 사회적 경력 단절의 기간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나름 직장에서 자리도 잘 잡고, 커리어를 차곡차곡 쌓아갔고, 거기에서 만족감을 많이 얻었던 것 같다. 그랬기에, 근로자 테두리 밖에서 일하는 기간이 임시 거점처럼 느껴져 전통적 경력의 연장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관점의 전환도 되지 않은 터라 더더욱 경력 단절의 기간이 길게만 느껴졌다. 커리어 우먼과는 거리가 먼 시간을 통과하고 난 후, 다시 얻게 된 사회적 자리에서 많은 안도감을 얻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겠구나. 끊어졌던 나의 선을 다시 이을 수 있겠구나. 기대감이 들었다. 


걱정 반 설렘 반으로 2년을 가열하게 쏟아부었다. 다시 궤도에 올라탈 수 있도록. 어느 정도 일에 자신감이 차오르자 나를 둘러싼 일상,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갈수록 제티가 유치원에 머무르는 시간은 길어져 가장 늦게 하원하는 아이가 되었고, 엄마 껌딱지였던 제티는 이제 아빠와 함께 엄마 퇴근 시간을 여유롭게 기다릴 수 있는 6살 언니가 되었다. 엄마가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 거라는 말에 자기 위안을 삼지만, 아프고 피곤해도 쉬지 못하고 유치원을 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오늘 하루도 우리 가족 모두 힘내보자며 애써 파이팅을 외쳐보지만, 얹힌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더더욱 아이에게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회사에서의 시간이 고되었어도, 인간관계에 지쳤어도, 한없이 서럽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도, 아이를 볼 때만큼은 나의 힘든 일은 최대한 담담하게, 아이의 말에는 최대한 밝고 긍정적으로 대하려고 한다. 아이에게는 나의 좋은 기분만 보내주고 싶기 때문에. 


하지만 이유 없이 나에게 짜증을 내고 떼를 쓰는 제티를 볼 때면 - 물론 그날 힘든 하루를 보낸 아이가 엄마의 무조건적인 위로를 받고자 함이었을 테지만- 나도 여전히 미약한 사람인지라 담담함을 유지하기가 힘들 때가 있다. 다만, 아이에게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마음으로 그러는지, 어떤 위로를 나에게 받고 싶은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에. 화를 냄으로써 아이를 공포로 몰아넣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마냥 받아줄 마음의 여유는 없다. 그저 제티가 진정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줄 뿐이다. 기다려주면 제티는 다가와 자기 속마음을 이야기한다. 


엄마가 내 말을 끝까지 안 들어줘서 서운했어. 다른 친구들은 다 엄마가 데리러 오는데, 나는 엄마가 안 와서 속상했어.


기다려주면, 아이는 먼저 다가와 이야기해 준다. 그렇게 침묵을 배워나간다. 침묵해야 할 순간. 기다려야 할 순간. 널뛰는 마음을 스스로 다독이며 기다려본다. 지금 이 격동만 잘 참아내면 다시 잔잔해질 거야. 아이에게서 배운 '기다림'이 이제 타인에게도 향한다.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이 싫어 늘 혼자 쏟아내던 말들이 점차 희미해지고, 침묵으로 어색한 공기를 채워나간다. 그러고 나면 상대가 입을 떼어 마음을 연다.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듯 자연스럽게 낯선 분위기를 풀어헤쳐간다. 


사회생활을 통해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되려 아이를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배운다. 내가 아이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되려 아이가 내 속에 숨어 살고 있는 작은 아이를 꺼내어 보듬어 준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아이에게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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