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멋진 날(그림책)
늦은 낮잠 때문인지 밤 12시가 가까이 오는데도 제이는 여전히 잠들 기색이 없다. 한참을 뒹구르르 구르더니, 사르르 잠의 울타리를 막 넘어서려는 나를 부른다.
"엄마, 나한테 좋은 일이 생겼는데 말해줄까?"
"음.. 어어... 무슨 좋은 일이 생겼는데?"
"선생님이 내일 우리 마트에 데려가서 뭐 사주신대!"
"와.. 정말?"
"응.. 너무 좋은 일이지? 어느 마트에 데려가시려나. 이마트 가시려나? 나 너무 좋은 거 있지!"
"음.. 우리 제이 진짜 좋겠다... 제이는 선생님이랑 마트 가면 뭐 사고 싶어?"
"나는.... 흠.... 마트 가서 보고 결정할래. 엄마! 내가 선생님이랑 마트 가면 시나모롤 빵 사서 엄마 줄게! 엄마 그거 좋아하잖아 그치? 빨리 내일 되면 좋겠다."
엄마 아빠와도 자주 가는 마트를 다른 사람과 함께 가는 게 색달라서 좋은 걸까. 아님 누가 되었든 무언가를 사러 간다는 것 자체가 좋았던 걸까. 어쨌든 그날 밤 제이는 선생님과 마트를 간다는 사실에 설레어 꽤나 늦은 시간에 잠들었던 것 같다. 아이의 머릿속에는 어떤 사탕을 골라야 할지, 장난감이 같이 껴있는 젤리를 골라도 되는지, 띠부씰이 들어있는 빵이 더 나을지 여러 경우의 수를 두고 우선순위를 고르느라 행복한 두통을 느꼈으리라.
다음 날 결국 안타깝게도 선생님과 마트를 가지 못했다며 비보를 전해왔지만, 언젠가 가게 되면 엄마를 위해 꼭 시나모롤빵을 사 오겠다는 다짐은 굳건하다. 한 사람당 몇 개까지 고를 수 있는지 조차 모르면서도 엄마의 몫을 챙기려는 마음이 귀엽고 기특했다.
마트 가서 일정 금액 안에서 원하는 것을 고를 수 있는 일이 나에게는 '고작'이었지만, 아이에게는 내일이라는 미래의 온전한 '기대'이자 '전부'였다. 나에게 최근 좋았던 일, 기대되는 일이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되짚어보지만 선뜻 떠오르지도 않거니와 주변에 자랑할만한 일인지 자평해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아이의 삶이 멀찍해진 지금에 와서 보면 기대하는 일이 많지 않은 게 본디 삶의 맨 얼굴과 같은 거겠거니 생각하지만, 내일이 기대되는 삶을 사는 제이의 모습을 보면 부럽기도 하다. 기대되는 것 투성이니 그리 웃음 짓고, 눈물 흘릴 수 있을 테니.
아이의 시선으로 나의 가장 작은 하루를 되감아본다. 설사 나는 놓쳤더라도, 나의 작은 어린아이에게는 좋았을 일이 무엇이었을지 꼼꼼하게 목록을 적어 내려가본다.
태풍이 예고되기 전날 저녁 퇴근길 지하철 역에서 마주한 청보랏빛으로 짙어가는 노을 진 하늘
점심 먹고 회사 옥상에서 읽던 책 사이로 살랑거리던 햇살
모두 잠든 한밤 중에 거실에 사뿐 내려앉은 달빛
지난 수요일보다 조금 더 수축되는 나의 복횡근과 단단해지고 있는 중둔근
모르는 이들에게 받는 라이킷과 애정하는 사람들에게 듣는 리뷰
2년 가까이 무럭무럭 잘 자라주고 있는 안시리움, 테이블 야자, 개운죽 그리고 스킨답서스
"엄마 덕분에 내일이란 말도 배우니까 정말 좋았어 나는 엄마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
그리고 언제나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작은 일상의 조각에서 나에게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끊임없이 말해주는 제이.
내일과 모레로 이어지는 앞 날의 개수만 헤아리며 눈을 더 멀리 던져두니, 하루에 흩뿌려진 즐거움과 기대를 종종 지나치곤 한다. 어떤 마음으로 가름하느냐에 따라 모든 기대의 무게가 다를지라도, 지금 낚아 올릴 수 있는 그물의 무게는 내 손에 쥐어져 있으니 나는 다시 세밀하게 나의 하루를 관찰하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