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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Sep 01. 2023

치사랑

우리의 마음이 함께 모여

치사랑: 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을 사랑함. 또는 그런 사랑.


단단한 무를 능숙하게 채 썰고, 설탕, 식초, 고춧가루를 넣어 섬섬옥수 같은 손으로 조물조물 무친다. 고춧가루가 덕지덕지 붙어있어도 기다랗고 주름 없는 엄마의 손은 곱기만 하다. 아빠 닮아 뭉툭한 내 손과 달리, 접시를 꺼내어 채나물을 소복하게 담아 식탁 위에 올려두는 일련의 엄마 손짓은 그랑 주떼(grand jeté)를 하듯 유연하되 힘찬 포물선을 그리며 움직인다. 길쭉하고 가느다란 엄마의 손가락을 조물조물 만지면, 나의 손가락도 엄마의 그것처럼 될 것만 같았다. 복실 한 코와 두툼한 다리는 물려주었으면서, 왜 손가락은 안 물려줬냐며 말도 안 되는, 무를 수도 없는 투정을 꽤 오랫동안 했다. 몹시 오랫동안. 


엄마는 나의 진지한 불평에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라며 손을 내저으면서도, 본인의 고운 손을 칭송받은 기분이 들었는지 입꼬리에 옅은 미소가 띠곤 했다. 무슨 대답을 들을지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이쁘냐며 늘 되묻는다. 


"엄마가 그렇게 예뻐? 도대체 어디가 그렇게 예뻐?"

"손부터 발끝까지 다 예뻐!"


핸드크림을 바르지 않아도 늘 촉촉한 그 손으로 엄마는 요리도 맛깔스럽게 만들고, 세련되게 화장을 했고, 고데기로 머리 손질도 신기할 정도로 잘했다. 엄마는 아빠에게 불평 한번 시원하게 못하는 답답함만 빼면 모든 일을 잘했다. 손은 야무졌고, 눈은 언제나 반짝였고, 입은 허툰 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고, 무언가 막히는 일이 생길 때면 미처 생각지도 못한 기발한 해결책들을 척척 내어놓았다. 이모, 삼촌, 할머니 할 것 없이 모두가 엄마만을 찾았다. 나이가 들어도 순응하는 법 없이 언제나 배우려고 했고, 그렇게 행동했다. 놀 때는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화끈하게 놀았고, 그다음 날에는 꿀물 한잔 시원하게 들이켜고는 그 어느 때 보다 위풍당당하게 출근하곤 했다. 나는 그런 엄마가 언제나 예뻤고,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언젠가 크면 나도 엄마처럼 뭐든 잘 해내는 사람이 될 거라 확신했다. 나는 엄마 딸이니까. 


엄마를 지표 삼아, 등대 삼아 비록 지금은 부족하더라도 나는 엄마 딸이니까 머지않아 잘하겠지. 잘할 수밖에 없겠지. 그래, 나는 엄마 딸이니까. 아직 닿지 않지만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면 자연스럽게 그리 될 거라며.


이제 곧 칠순을 앞두고 있는 엄마의 손은, 살림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던 곧게 뻗은 섬섬옥수의 손은 이제 뼈가 튀어나와 구부러지고 휘어져있다. 딸의 시샘거리였던, 언제나 예쁘기만 할 줄 알았던 손이 감히 세월을 품었으니 엄마는 그 모습이 영 탐탁지가 않다.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할 것이 휘몰아쳤던 긴긴 시간의 더께가 그녀에게는 서글픔으로 다가서겠지만, 내게는 사랑이고 기적이다. 그 겹겹의 더께 사이에서 나는 생동할 수 있었고 유랑할 수 있었다. 


기다란 엄마의 손가락처럼 제이의 그것도 나와 달리 얇고 기다랗다. 기다란 손가락과 나는 무슨 인연이기에, 손끝에 곧게 펼쳐진 다섯 가락 위에 이리도 사랑이 차오를까. 엄마를 향한 나의 사랑이 길고 긴 미끄럼틀을 타고 다시 나를 향한다. 높은 곳을 오르는 낮은 사랑이 나에게 희망이 되듯, 그녀에게도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되길. 세월의 벼랑에 고꾸라져 떨어질 것 같은 오늘 밤, 다정한 위로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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