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쉐 영국연수기_12]
* 2019년 8월에 다녀온 영국 연수 이야기를 정리한 글입니다.
런던 최대 규모 국제 푸드마켓인 버로우마켓 Borough Market의 운영진을 만나려고 사전에 여러번 연락했었는데, 그곳에서 제안한 여러가지 조건을 맞추느라 런던에 도착해서도 끝까지 약속을 조율해야 했다. 이렇게까지 만나고팠던 이유는 버로우마켓 위원회의 대표인 대런 Darren Henaghan이 런던시장(市場)위원회 London Market Board의 위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버로우마켓 뿐만 아니라 런던의 마켓 관련 정책에 대해서도 궁금했기에 어렵게 잡은 미팅이었고, 그만큼 알차야만 했다!
미팅을 위해 나름 격식 있는 옷들을 골라 입고 아침 일찍 마켓을 찾았다. 테이트 모던 갤러리 등 런던 주요 관광지의 4배에 가까운 방문객이 찾는 만큼 평소 수많은 인파로 발디딜 곳이 없다는 마켓은 오픈 시간이어선지 한적했고, 덕분에 미팅 전에 한산하게 시장 구조를 좀 볼 수 있었다.
드디어 대런과 만나 마켓 옆 버로우마켓 협회의 위원회 건물로 갔다. 고풍스러운 회의실에 준비된 교육자료와 함께 우선 강의 형식으로 대런에게서 마켓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듣고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버로우마켓이 자리한 곳은 런던브릿지 바로 아래이고, 템즈강을 건너면 런던의 중심인 ‘시티 오브 런던’이 펼쳐진다. 마켓은 1014년부터 이곳에서 천년 넘게 번성했는데, 그 이유는 강을 건널 때 세금을 매겼던 당시 이곳은 세금 부과가 안되어 자유롭게 무역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무역의 요지로 번성하다가 1754~1756년 사이에 영국의회가 마켓의 과잉 거래를 규제하고자 할 때, 협상 과정에서 토지 소유권을 마켓 운영 협회가 무상으로 받은 덕에 번화한 지역 중심에서 공간 제약 없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도매시장으로 번성하던 버로우마켓에도 위기가 있었는데, 1990년대 슈퍼마켓 체인의 발달이 그 원인이었다. 시장이 쇠락해가자 마켓 위원회는 3가지의 핵심 가치 -고품질 먹거리, 윤리적 농법 및 생산, 환경과 지속가능성- 를 세우고, 영국 최초 비살균 유제품, 스페인의 고품질 육류, 높은 품질의 과일, 야채, 해산물 사업체 등 마켓의 핵심이 될 주요사업체를 모집하여 1998년 푸드마켓으로 재개장했다.
기존의 전통적인 먹거리 비즈니스는 낮은 가격과 편리함을 우선하지만 버로우마켓은 저렴한 가격보다 이 마켓에서 사람들이 얻어가는 문화적 경험을 더욱 우선한다. 대런은 고품질 먹거리, 다른 곳에서는 본 적 없는 새롭고 다양한 먹거리, 구매자와 판매자 간 대화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버로우마켓만의 분위기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마켓의 차별점으로 꼽았다.
이를 위해 마켓에 출점하는 먹거리는 생산과정의 지속가능성 등을 엄격하게 점검하며, 마켓에서 판매하는 모든 음식은 미슐랭 1스타 이상 쉐프들로 구성된 독립 심사위원회에서 직접 생산지에 가서 맛보고 확인한 결과 높은 품질을 인정받은 음식들이라고 한다. 지역 생산자의 직접 참여로 이루어지는 파머스마켓과 달리, 버로우마켓은 국제적으로 높은 품질의 음식들을 선별하여 판매하는 글로벌 푸드마켓이라 볼 수 있다.
우리는 마켓이 위기를 겪던 때에 지속가능한 먹거리에 대한 기준을 핵심 가치로 가져온 이유가 궁금했는데, 대런은 당시 소비자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수요를 봤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이곳은 정부의 지원 없이 자선단체인 버로우마켓 운영 협회가 자체 위원회와 자선 투자신탁 기관을 구성하여 독립적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다양한 실험이 가능하며, 이익집단이나 회사가 아니기에 수익보다는 음식의 다양성과 품질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구조라고 한다.
대런은 모객 전략을 펼치는 데 있어 마켓의 미래 소비자인 젊은 세대가 갖는 기존 세대와의 차이점에 주목했다. 어릴 적부터 스마트폰을 접해온 젊은 세대는 궁금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바로 검색할 수 있고, 정보 접근 및 활용 능력이 높다. 집과 자동차 등에 가치를 두었던 기존 세대와 달리 열심히 일해도 집을 사거나 감당하는 게 불가능한 시대를 사는 젊은 세대들은 다른 것에 가치를 두기 시작했고, 그중 하나가 높은 질의 먹거리이다. 대런은 좋은 먹거리의 가치에 무게를 두고 먹거리를 자기 삶과 정체성과 긴밀하게 연결시키는 세대가 등장했다고 보고, 버로우마켓을 찾는 소비자들을 4가지 유형으로 나눠 설명했다.
첫번째는 다양한 먹거리를 맛보고 경험하는 것을 중시하는 먹거리 탐험가 Food Explorer, 두번째는 먹거리의 지속가능성과 윤리적 생산과정을 중요시하며 환경에 대한 경각심도 높은 먹거리-환경 투사 Food Eco-Warrior, 세번째는 마켓의 다양한 음식들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어떤 음식이 가장 좋은 음식인지 지식을 쌓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하며 영향을 주는 먹거리 전문가 Food Expert, 그리고 마지막은 분야를 막론하고 SNS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는 셀러브리티들인 먹거리 선지자 Food Guru 유형이다. 현재 먹방이 넘쳐나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인지라 특히 마지막 유형의 이름이 재미있었는데, 버로우마켓은 이와 같이 셀러브리티의 SNS 발신이 갖는 영향력을 잘 인지하고 마켓을 성장시키는 데 이를 적극 활용하려 한다고 한다.
이렇게 버로우마켓은 마켓을 찾는 소비자들의 성격이 어떠한지 분석하고, 그들이 마켓에 기대하는 모습을 일관되게 제공하며 신뢰할 수 있는 국제 푸드 마켓을 만들어가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소비자들의 기대에 맞추어 판매할 때 농산물 원물을 최대한 보전하고, 생분해 포장재 사용을 장려하며 마켓 내 잔여 음식은 기부하거나 퇴비 생산에 쓰는 시스템을 만드는 등 마켓의 지속가능성도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여러가지 질문을 했는데, 먼저 런던시장위원회의 보고서에서도 드러나듯이 굉장히 짧은 기간동안 마켓이 많이 늘어난 것에 대해 위원회 구성원으로서 대런의 생각을 물었다. 특히 스트릿푸드 마켓의 증가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대런은 우선 런던에 마켓이 계속 느는 것은 그들이 제대로 된 마켓이라는 전제 아래 굉장히 좋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다만 현재 런던에서는 파머스마켓처럼 생산자의 원물을 파는 마켓보다 스트릿푸드·핫푸드 마켓이 많아지고 있는데, 그중에는 먹거리의 품질보다 다른 콘텐츠에 더 중심을 두는 마켓들도 있어서 그런 마켓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다채로운 스트릿 푸드에 대한 런던 시민들의 선호가 계속 높아지고 있는데, 먹거리의 품질이 보장되지 않는 마켓은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뿐더러 그 수요에 답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런은 버로우마켓과 비슷한 지향을 가진 마켓이 생겨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라며, 버로우마켓 협회의 목적은 단순히 수익을 남기는 게 아니라 소비자가 먹거리를 대하는 태도와 가치를 바꾸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역에서 빠르게 돈을 벌어 외부에 투자하는 마켓이 아니라 영속적으로 지역에 존재하면서 그 지역공동체에 도움이 된다면, 이런 마켓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라 본다고.
마지막 질문으로 런던에서 시장위원회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고, 시장의 흐름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물었다. 위원회 활동을 2년 정도 이어온 대런의 말에 따르면, 위원회는 런던을 총체적으로 살펴보는 새로운 혁신 조직이라 볼 수 있다. 위원회는 런던 모든 시장의 흐름과 사람들의 구매 성향을 분석하고 그 변화 속에서 시장이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 같이 방향을 만든다.
그는 마켓이 지역을 어떻게 재생할 수 있는가도 중요하게 본다. 그래서 마켓이 어떻게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지역의 경제·문화적 질을 높이는지 살펴보고 방안을 찾는다고. 그는 런던이 전세계 사람들의 공동체가 자리한 다양성의 도시라며, 그 다양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어우러지는 곳이 시장이라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런던 안에 유대인, 아프리칸 등 새로운 커뮤니티가 형성되면 커뮤니티는 지역의 마켓 안에서 서로 거래하며 지역과 빠르게 연결될 수 있다. 대런은 이러한 역할에 공감하며 위원회 활동에 함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지역 안팎의 커뮤니티를 담아내고 연결하는 것은 시장의 중요한 사회적 기능이다. 다양성 안에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수많은 차이들을 서로 존중하며, 시장을 매개로 그 공동체를 넓히고 연결하는 일이 비단 영국에서만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 버로우마켓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글: 마르쉐친구들 쏭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 대화하는 농부시장 마르쉐를 운영합니다.
먹거리를 중심에 두고 삶을 연결하는 일들을 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