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쉐 영국연수기_7]
*2019년 8월에 다녀온 이야기를 정리한 글입니다.
아침부터 마음이 바빴다. 드디어 파머스마켓에 가서 아침식사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런던에 있었던 8월은 썸머타임 시차로 서울보다 8시간이 늦었다. 시차적응이 안되서 깊은 새벽에 화들짝 눈이 떠졌고, 일행 중 일부는 여행 내내 그러해서 낮에 햇살 한줄기만 쬐어도 시름시름 졸았다. 이날도 대부분이 새벽부터 깼다. 우리가 머문 숙소는 벽이 얇고 거실도 없어서, 잠이 완벽히 깬 후에도 고시원처럼 각자 2층 침대의 위 아래에 꼼짝없이 누워 조용히 눈만 말똥거렸다. 그러다 용감한 누군가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야 일어나서 3명이 쓰는, 그나마 가장 크고 단층 침대가 놓인 방으로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이 방은 머무는 내내 누군가 기절하고 쓰러져 자건 말건 일하고 회의하고 수다 떨고 노래하고 시낭송하고 마사지 하고 몸부림치고 와인도 마시는 곳이 되었는데, 이 글을 쓰는 이제서야 조금 그리워진다. 정말 이런 마음이 들 줄 몰랐는데. 내가 머물던 더블 침대 오른쪽아, 잘 있니?
아무튼, 우리는 서울에서는 거의 못 누렸던 아침의 여유를 만끽하며 런던 대학교 안에 위치한 블룸스버리 파머스마켓 Bloomsbury Farmers’ Market에 도착했다. 이곳은 매주 목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여는 평일 런치마켓 성격의 시장이다. 날씨가 좋아 천천히 걸었는데도 도착하니 9시가 안되어서, 아직 준비중인 팀이 많았다.
도착하자 마자 우리의 눈길을 사로 잡은 것은 갖가지 채소와 고기가 끓고 있는 커다란 솥들! 한국에서는 실외 조리에 대해 엄격하여 농부시장 안에서의 조리 또한 굉장히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농부들이 가지고 나오는 신선한 제철 채소들로 요리하는 먹거리를 시장 안에서 전하기에는 한계가 매우 크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가스통으로 큰 버너 거치대를 설치해서 요리를 하고 있다니! 한국에 돌아가면 이 사실을 널리 전하고자 사진부터 찍고보니, 쌀·고기·새우·야채 따위를 함께 넣어 끓이는 스페인 요리, 파엘라 paella 솥들이었다. 여러개의 솥이 있어서, 고기부터 해산물, 비건까지 다양하게 선택해서 즐길 수 있었다.
블룸스버리 파머스마켓이 제 모습을 갖출때까지 어슬렁 거리며 각 팀이 부스를 준비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갖가지 베이커리 류가 가득한 부스에는 과일이 듬뿍 올라간 파이들 위로 벌들이 날아다니고, 아빠와 딸로 보이는 어린 소녀가 다양한 토마토와 채소들을 진열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마땅한 종이 트레이를 못찾고 있던 차라, 다양한 종이 트레이에 갖가지 베리류와 과일, 버섯들을 담아 늘어놓은 매대도 유심히 보았다. 살균을 하지 않은 Raw Milk와 Raw Cream, Raw Butter등을 파는 Hook&Son Organic 목장의 매대도 한참 구경하며 매대를 지키는 쾌할한 청년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농부는 아니고 농장 소속 직원이었다. 이 인상깊은 목장의 이야기는 이후 다른 시장에서 농부와 만나 나눈 이야기로 전하겠다.
후에 매니저 말로는 휴가철이라 농부들이 별로 없어서 그날이 정말 작은 시장이라고 했는데, 런치마켓 답게 일본,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각 지역의 음식을 소개하는 핫푸드 부스도 많았고 비건버거 등의 채식 메뉴를 가지고 온 출점팀도 여럿 있었다. 딱히 식음료를 먹는 공간은 없고 사람들이 벤치나 계단에 앉아서 자연스럽게 음식을 먹고 있어서 우리도 각자 먹고싶은 것들을 양껏 사다가 벤치에 앉아 아침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정리하면서 보니 벤치 옆 덤불에서는 아주아주 귀여운 쥐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너희들도 배부르겠구나!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도 줄곧 야광주황색 조끼를 입고 부스를 돌아다니며 이거저것 챙기는 쾌활한 여성을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시장이 안정적으로 시작되고 한산해진 틈에 그녀를 둘러쌌다. 역시나 그녀는 이 마켓의 매니저 라우라 Laura였다.
라우라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4년 전에 영국에 와서 도시텃밭 활동을 하며 토종씨앗 보존 활동도 함께하고 있다고 한다. 그에게 들은 바로는 LFM의 파머스마켓들은 기본적으로 모든 집기는 참여팀들이 직접 준비하고, 전기가 필요하면 비용을 받고 연결해준다. 블룸스버리마켓은 LFM과 런던 대학이 계약을 맺어 공간을 제공받고 있는데, 전기도 대학에서 공급해준다. 두 명의 매니저가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고 당일 안전 점검, 공공장소 정리 및 정돈, 각 출점팀의 위생과 안전 상태 점검, 전기 점검, 출점비 수거 등의 업무를 진행한다고. 매니저들은 판매하는 사람들과 서로 도우며 가깝게 일을 하고, 마켓이 끝나면 매출에 따라 참가 농부들로부터 출점비를 받는다. 생산자들이 출점 규칙에 따라 로컬 재료를 쓰고 있는지 등은 LFM에서 영수증을 검사하거나 감사를 나오는데, 생산자가 만약 다른 나라에서 온 우유를 사용한다거나 하면 매니저들이 체크해서 LFM에 보고하기도 한다. 라우라는 “그런 업무가 정해져있는 건 아니지만, 시장은 매니저들이 실제로 얼마나 신경쓰는지에 따라 달려있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
1차 농산물 뿐만 아니라 음식에 쓰이는 재료까지 일일이 검사하는 농부시장. 그러려면 시장마다 매니저들의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전체적으로 이런 좋은 먹거리의 가치에 동의하고 독려하고 감사하는 체계가 필요할 것이다. 이런 시스템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래서~ 끝난줄 알았던 공부시간이 이어집니다. 꺅! 너무 알차다!!!
런던 시내 22개 파머스마켓을 운영하는 LFM의 모든 마켓을 포함하여 영국 전역의 106개 농부시장들이 FRA: The Farm Retail Association(농업소매협회, 前 FARMA: The National Farmers’ Retail and Markets Association)의 ‘리얼 파머스마켓’ 인증 원칙을 준수하고 있다. 이 인증제도는 파머스마켓이 성장함에 따라 다양한 푸드마켓과 대형 사업체 역시 파머스마켓이 발산하는 가치에 동조하고 이를 차용하고자 하는 상황(위협) 속에서, 직접 생산한 것을 지역에서 판매하는 소규모 로컬 농부와 생산자를 지원, 보호하고자 만든 제도이다. 2002년에 만들어진 이후 농가 소매 및 파머스마켓의 발전을 적극 지지해왔다. 동일한 상황이 한국에서도 일어나는 지금 우리는 이 인증에 특히 주목하게 되었다.
이 원칙의 중요한 특징은 생산자가 직접 참여한다는 것, 그리고 가공과 조리 등에서 생산농가의 참여를 우선적으로 보장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농부시장의 판매물품은 런던 지역으로부터 100마일 이내, 1차 농산물에 한해 제한적으로 150마일 이내 생산품으로 제한한다. 이 인증 정책은 가공⋅조리 생산자의 재료 수급 방식도 농부와 거래한 영수증을 직접 제출하는 방식으로 엄격하게 관리한다. 뿐만 아니라 커피나 초콜릿 같은 품목의 경우 보조생산자가 없는 로컬 생산자가 출점하도록 한정함으로써 지역 소규모 생산자들의 참여를 보장하고 있다. 이렇게 엄정한 시장운영의 원칙은 소규모 영리사업체인 LFM이 런던에서 20여 년간 파머스마켓을 확장해 오는 발판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따르면 '로컬푸드 운동은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이동거리를 단축시켜 식품의 신선도를 극대화시키자는 취지로 출발했다. 즉, 먹을거리에 대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이동거리를 최대한 줄임으로써 농민과 소비자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의 북미의 100마일 다이어트 운동, 일본의 지산지소(地産地消) 운동 등이 대표적인 예다.' 몇해 전 출간된 <100마일 다이어트>라는 책이 있다. 캐나다 벤쿠버에서 100마일 내에서 생산되는 음식만 먹으며 1년을 살아가는 로컬푸드 프로젝트를 진행한 이야기이다. 이 책의 소개문에는 이들이 이러한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동기로 '이러한 변화에 책임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 인간에게 있다. 중요한 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다.'라는 문장이 인용되어 있다. 수많은 에너지를 쓰고 환경을 파괴하면 먼 곳에서 먹거리가 이동해오는 것에 대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저자들의 이러한 시도도 2005년에 일어난 일이니, 로컬푸드는 역사도 오래 되었고 한국에서도 이제 생활 속에 스며들어있다. 많은 지역에 로컬푸드매장이 있고, 대형마트에도 '로컬푸드'코너가 있다. 이제 '로컬'이라는 말은 여러 맥락에서 익숙해진 개념이다.
그래도 새삼스러움을 불구하고 한번 더 들여다보자면, 100마일은 환산하면 160.9344km로, 남한의 중심부에서 거리를 따지자면 남한은 반경 100마일 안에 거의 다 포함된다. 그러므로 한국의 지리적 특수성은 서구에서 온 이 100마일 안의 '로컬'이라는 개념을 그대로 받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로컬'에 대한 개념은 분분했으나 지금은 반경 50km로 계산하기도 하고, 지역 생산이나 국내산으로 일컫기도 한다.
마르쉐에서는 이 '로컬'의 개념을 우선 국내산으로 잡고, 단지 거리가 아닌 관계적 거리로 좁혀가고 싶었다. 도시 소비자와 농촌 생산자의 거리는 멀다. 만나고 싶어도 실제로 차를 타고 몇시간을 가야 하고, 생산물을 받아보려 해도 다시 차에 실려 몇시간, 그리고 중간에 누군가의 손들을 거쳐 온다. 그 과정에서 많은 비용이 발생하기도 하고 서로 전하고픈 이야기가 생략되기도 한다. 농부시장에서 우리가 직접 만나 얼굴을 마주할 때의 거리는 1미터 안팎이다. 그 거리, 그 사이를 대화가 채운다. 서로의 자리에서 중간에 어떤 것도 거치지 않고 만날 수 있는 이 거리가 주는 즐거움과 친밀함 그리고 안심되는 마음이, 우리가 시장에서 만들고픈 관계의 거리일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마음으로 마르쉐 시장을 만들었고, 서울에서 열리는 시장이니 최대한 도시농부-서울과 경기권의 농부들에게 더욱 열려있는 시장으로 만들어왔다. 이렇게 서울의 농부시장으로서 물리적인 로컬의 개념을 조금씩 좁혀가보고자 하는 면도 있었고, 먼 지역에서 오는 생산자들에게는 매출 대비 이동비용과 피로도 등등에서 운영진으로서 부담이 드는 것도 사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손님들의 장보기 편이성 그리고 보다 양질의 먹거리를 소개하고 싶다는 기획자의 욕심과 조금 더 응원이 필요한 의미 있는 로컬 먹거리를 소개해야 한다는 가치 지향 사이에서 늘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 마르쉐 8년차, 기획자들의 직관이나 신념에 의지하는 방식으로는 사회적인 신뢰를 획득하고 공공성을 인정받기가 더는 어렵다. 그래서 소비자, 사회와의 신뢰관계를 공식화하고 농부시장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시스템으로서 ‘리얼 파머스마켓’과 같은 시장 인증 제도를 주목하게 되었다.
또 하나, FRA의 파머스마켓 인증제도는 농가의 판매대리인을 인정한다. 농가직원도 시장 판매자로 포함시킴으로써 런던과 주변 지역 10여 곳 이상의 농부시장에 참여하는 대규모 농업생산자들도 참여가 가능하게 했다. 한국에서 민간이 운영하는 마르쉐 같은 시장이나 서울시가 직영하는 서울시 농부의 시장 등은 다 농부의 직접 판매를 원칙으로 한다. 이 원칙은 소규모 자급농에게는 기회가 되지만 농가 규모가 조금 더 크고 전문적인 생산자들이 농부시장에 참여하는 데는 상당히 높은 진입장벽이 되고 있다. 마르쉐의 경우 생산자 직접 판매가 ‘대화하는 시장’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는 데 중요한 부분이라 여겨 판매자 고용 문제는 더욱 민감한 주제이기도 하다. 판매대리인 제도가 농가의 농업 전문성을 강화하는 방법이 될 수 있는지, 청년들이 농가에 고용되어 전문적 역량을 갖춘 판매인으로 성장하는 것이 농가의 생산력 신장과 농업 세대 교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지 등 다각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리얼 파머스마켓’ 인증제도의 원칙을 영국 전역의 106개 시장이, 런던 안에서도 20여 개 시장이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깊다. 시장은 각자가 서있는 풀뿌리 배경이 서로 다르고 그런 의미에서 독자적이다. 한국의 모든 시장도 그렇다. 마르쉐도 그 고유성을 바탕으로 성장해왔으나, 그 독자성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사회적인 신뢰를 공유재로 확보해 가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한국에서도 공동의 가치를 공동의 재산으로 만들어가는 방안으로 농부시장 인증 또는 공동정책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위해 시장운영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마르쉐가 지난 2018년 시작한 농부시장포럼이 이런 논의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지 ‘진짜 농부시장’ 인증 제도를 보며 여러 생각이 오갔다.
글: 마르쉐친구들 쏭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 대화하는 농부시장 마르쉐를 운영합니다.
먹거리를 중심에 두고 삶을 연결하는 일들을 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