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냐는 질문

한강 작가와 물리학의 도움으로

by 김가오리

나는야 가성비 좋은 사람.

일상의 작은 일들이 불쏘시개가 되어 어려움들을 직면할 기회가 생기곤 한다. 그것은 어쩌면 전생에도 해결하지 못해 현생에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2019년의 교사로서 바닥 치던 시절이 그랬고, 2025년 아이의 답안 실수로 인한 내신 등급 하락에 얽매이던 올해 하반기가 그랬다. 전자로부터는 경쟁이 내면화되어 동료들과 유의미한 협력 관계를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알아차렸고, 후자로부터는 내가 통제 욕구가 어마무시하게 강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관련해서 고백 하나를 해보자면, 6월에 서류 하나를 안 내서 아이가 장학금을 받지 못한 일이 있었다. 자녀가 둘만 되어도 다자녀 점수가 추가되는데 서류를 어설피 읽고 주민등록등본을 제출하지 않았던 것이다. 엄마가 되어서는 어이없는 실수로 돈과 아이의 명예가 될 수 있는 일을 잘 챙기지 못했다는 생각에, 남들은 다 챙기는 걸 못 챙기는 무능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무너졌었다.(지금도 다둥이, 다자녀.. 단어에서 심장이 콩콩대는 거 보면 실수에서 백프로 회복된 건 아니다.) 이후 아이가 답을 밀려 써서 내신이 내려가고 힘든 시기(아이보다 내가)까지 보내고 나니, 혹시 나의 부주의와 불행이 아이에게 전염된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에 쫄보가 되어버렸다. 나 때문에 아이의 운이 안 좋아 그런 일이 생긴 걸까 봐 자책했다.


습관으로 굳어진 사고와 행동 체계는 문제가 생겼을 때 이유를 찾게 했고 책임을 묻더라. 머릿속에서 '내가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의 돌아보기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것이 얼마나 오만한 태도였는지 책 <<죄와 벌>>을 읽으면서 느꼈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가 노파 살해에 대한 자기 계획과 실행 이후 주변 사람들의 반응까지 제어하려는 장면들에서 인간이라면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책임지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울치료가 되었다. 웃기지만 ㅠㅠ 나는 신을 흉내 내고 있었다. 중세에는 나와 적이 싸웠다면 현대에는 자아가 비대해져 내가 나와 싸우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인생의 모든 희로애락이 내 언행의 결과라는 잘못된 믿음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쯤 되자 내 삶에서 각기 다른 이유의 이름이었던 일들이 '통제'라는 퍼즐 조각 하나로 전체의 모습을 드러내더라.


일례로 예전의 나는 교사의 전문성을 키우기 좋은 연수나 강의를 멀리했었다. 나를 흔들까 봐 그랬던 것 같다. 흔들려서 안정되지 않은 상태가 오래 지속될까 봐 두려웠다. 뒤집어 생각하면, 현재 상황을 베스트로 여기고 있었던 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지금 잠깐의 평온과 안정이 내가 내 인생에서 기대하는 베스트였나 보다. 그 상태를 깨지 않으려고 벽을 치고 귀를 막았고, 동시에 내 세계에서 나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러다 보니 비슷한 시기에 지인들이 다음처럼 말을 건네 왔다. "네가 그렇게 힘든 줄 몰랐어.", "너는 상황이 다 정리되면 이야기하는 편이지.", "서울대 나왔다는 것을 너를 안 지 10년 만에 알게 됐다는 게 기분이 이상해. 아무도 속인 사람은 없지만.." 나는 얼마나 현상유지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나. 기본적인 성향이 내부, 외부에 민감하게 열려있고 소통에 에너지를 많이 쓰니 내 이야기를 들은 상대의 피드백이 나를 흔드는 게 두렵고 싫어서 그랬다. 내 상황을 온전히 통제하려는 욕구가 취약성을 드러내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40대가 어디 그러한가. 지켜야 할 것이 많은 40대에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나. 삶의 본질은 나의 얄팍한 안정을 오래 유지할 수 있도록 놔두지 않았다. 부모, 자녀, 직장, 친구, 돈 등등에서 변수와 외부 자극이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 삶에 대한 통제 욕구로는 해결이 안 되니, 그제야 내가 집착했던 안정에 대한 강박이 오히려 다른 가능성을 사방으로 막고 있는 건 아닌지의 질문이 자연스럽게 올라왔다. 울타리가 견고한 것이 더 위험한 환경이겠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이미 일어나 버린 문제를 붙들고 놔주지 않는 것보다 문제가 흐름을 타고 흘러가게 두고 흘려보내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고 예전에는 하지 않았던 여러 시도들을 (큰맘 먹고) 해보고 있다.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 불안한 채로 놓이기. '내가 틀렸다'의 마음으로 대화하기. 할까 말까 할 때는 그냥 해보기(브런치 작가 신청도 그렇게 이루어짐). '내'가 '당장' '해결'하겠다고 조급해하지 않기. 나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지 않기. 갈등하기. 불화하기. 나에게 온 낯선 것들을 환대하기.


아이는 그 시간들을 통과하며 더 다정해진 것 같다. 아침에 알아서 일어나고 기숙사 다녀오면 미루지 않고 짐을 정리하고 시험을 잘 못 봐도 우울감에 빠져 있지 않고 즐거울 일을 찾고 설거지도 바로 하고(중요!!).. 무엇보다 우리 부부에게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먼저 해준다. 아마 반추와 망상 증후군 상태의 예전 나라면 아마 '답안 실수가 없었어도 아이는 다정했을 것이고 오히려 성적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지지 않아 더더 좋은 내신을 받았겠지'까지 갔을 것이다. 괴로움의 나락에 빠진 현재가 과거 사건의 의미도 변화시켰겠지. 실수에 주저앉았을 것이고. 하지만 이제는 정정해 본다. 그냥 다정한 것이다. 그 시간을 통과한 것과는 상관없을 수 있는 일이다. 아이는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변화하는데 모든 변화에 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이번 일로 통제 욕구를 직면했을 때, 나는 한강 작가의 일기장마다 적혀 있었다던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오래 머무르곤 했다. 그리고 가끔 답해보았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 것 같다고. 삶은 해석의 영역이기도 해서 그렇다. 괴로운 과거의 일들도 현재의 내가 어떻게 통과하는가에 따라 나의 고유한 서사로 남을 수 있는 거라서. 그래서 지금은 '답안 밀려썼다고 인생까지 밀리는 것은 아니야.'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사람들이 겪는 크고 작은 실수와 실패에 대해 가볍게 평가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아이가 답을 밀려 쓴 실수에 아파봐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너무 아리고 아플 때 학교에서, 교무실에서, 교실에서 나는 말이 줄어 들었다. 예전에는 쉽게 내뱉던 말들이 머릿속에서만 맴돌고 혀에서만 맴돌더라. 그동안 내가 뱉었던 경솔한 말의 당사자들에게 맘속으로 자꾸만 용서를 구했다. 예전에는 내가 학생들에게 말한 것처럼만 살자.. 했는데, 이제는 하나 더 추가한다. 딱 내가 겪은 것만 말하기로. 인생에 절대 겸손하기로. 특히 청소년들에게.


물리학자들도 '지금의 나'가 '이전의 나'를 미세하게 바꾸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시간이 직선적으로 앞으로만 흐르는 게 아니라 스스로 접히면서 과거와 현재가 얽힌 구조일 수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봤다. 그래서 현재 선택과 행동이 이미 과거의 상태를 재구성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해석이 한강 작가와 물리학자들의 방식이나 지향과는 거리가 먼 일차원적인 것일 수도 있겠으나 나의 현재로 과거의 일들이 의미가 달라지는 점에서는 조금의 교집합이 있지 않을까..


이제 나는 뭔가를 바로 잡고 싶은 마음에 자꾸 과거로 달려가던 나에게 말한다. 그냥 통과하자고. 먹물들이 글로 알 수 없는 세상이 밖에 넓게 펼쳐져 있다고. 그 세상에는 모순적인 상황들이 충돌하면서 같이 존재하기에 예전의 강박과 이분법적인 평가들은 내려놓자고. 어렴풋이 기쁨 중에 불안이 올 수도 있고, 힘든 중에 웃을 수도 있구나 느끼면서 현재를 그냥 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