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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르코니 Oct 05. 2022

꽤 괜찮은 사람들 2

우리 입 무겁다.

 태우와 대현은 알아주는 브랜드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아파트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초, 중, 고등학교가 신설되었다. 학군이 좋다고 소문이나 기록적인 부동산 하락장에서도 그 아파트만 굳건하게 시세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일전에 자신의 집도 망했다고 고백했던 대현은 아직 그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던지라 충격이 더 크게 와닿았다.


 딱한 마음이 앞섰지만, 섣불리 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괜한 말을 해 봤자 오히려 태우의 마음만 복잡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입을 닫고 쿰쿰한 냄새가 나는 버스에 올랐다.

 새로운 세계에 발을 내딛는 경험이었다.

 버스로 통학을 하다니.

 내가 방과 후 버스를 타고 친구 집에 놀러 갔다는 사실을 부모님께서 아시면 뭐라고 하실까?

 실제로 몇 정거장 지나온 것도 아닌데, 상당히 낯선 곳으로 나온 것 같은 이질감을 느꼈다.

 버스를 내리고 한참 걸어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거기서도 몇 차례 꺾어 지나서 낡은 다가구 주택 대문을 넘었다.

 태우는 저쪽 현관문 외면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더니, 2층 계단 아래 창고 문을 열었더랬다.

 그것도 어울리지 않게 굵은 특수키를 찔러 넣었다.

 문을 열자, 습한 냄새가 훅 끼쳤다.

 현관문 뒤로는 부엌이었다.

 부엌 너머로 단칸방이 있었는데, 그 비좁은 방에 세련된 장롱이 떡하니 방 면적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팩스라는 장비였다.

우리의 모든 관심은 팩스로 집중되었다.

 "팩스는 복사도 돼."

 "우와 신기하다."

 신기한 나머지 우리는 태우의 허락하에 가지고 있던 종이란 종이는 모두 복사했다.

 팩스로 복사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투입구에 집어넣을 수 있게 제단이 된 종이 어야만 했다.

 책을 복사하고 싶다면 해당 페이지를 뜯어내야 했다. 그런 제약 조건에도 우리는 충분히 신기했다.

 우리는 종이를 집어넣으며 한없이 즐거웠고, 태우는 그런 우리를 보고 기뻐했다.


 "나 여기 사는 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당연하지, 친구끼리 비밀인데. 맹세한다."

 "그래, 우리 입 무겁잖아."

 "고마워, 다음에는 너네들 집에 놀러 가도 되니?"

 "응."

 "그래, 와."

 대현도 흔쾌히 수락했다.

 "나 어쩌면 전학 갈 수도 있어. 나는 가기 싫은데 아빠가 자꾸만 이 근처로 전학 보내려고 해서. 난 그냥 버스 타고 다니면 되는데."

 여름 방학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나는 다음 학기에는 태우를 못 볼 것 같다고 직감했다.

 "그래도 우리 자주 만나면 되잖아. 전화도 하고 말이야. 편지도 쓰고."

 "그래, 어차피 나중에 대학 가면 다 흩어지잖아."

 "응, 우리 누나도 그렇더라, 전학 간 친구랑 더 자주 만나더라."

 "우리 이제 집에 가자."

 "그래, 늦었다고 혼나겠다. 얼른 가자."


 얼마 후 태우는 정말 전학을 갔다.

 태우는 담임의 주도로 마지막 인사를 했고, 우리는 박수를 쳤다.

 그리고 우리 셋은 뒤뜰에서 만났다.

 태우의 선물을 풀기 전까지 이게 무엇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림의 낯 뜨거움은 잠시 접어 두더라도.

 여러 가지로 놀라웠다.

 어떻게 입수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만화책은 상당히 비싼 물건임이 틀림없다.

 그런 게 학생 손아귀에 있다는 사실로 태우의 주머니 사정이 얼마나 윤택했을지 가늠할 수 있다.

 만화책의 입수 경로와 구체적인 구입대금, 그리고 감춰둘 공간, 모든 게 놀라웠다(프라이버시가 보장된 공간이 있다는 게 가장 부러웠다).

 무엇보다 자기 물건은 다 귀한 법인데, 작별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하이라이트가 담긴 대목만 골라서 한 장 한 장 뜯어냈다는 것도 믿기 어려웠다.

 정작 선물을 받은 나는 이런 걸 숨겨둘 공간도 없었고, 강심장도 아니었기 때문에 난처했다. 그렇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맙다, '이렇게 좋을 걸 주냐'라고 의례적인 말을 했다.

 대현은 야단법석을 떨며 고마워했다. 그걸 자신의 침대 밑에 보관했다가, 얼마 못 가 청소를 하시던 할머니께 들통이나 그렇지 않아도 어지러운 집안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어쨌든 나는 그날 복사지가 들어있는 가방이 신경 쓰여 뒤통수가 따가웠다. 당연히 수업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방과 후, 나는 평소와 다른 길로 한참을 돌아서 집으로 갔다.

 가는 내내 종이를 버릴 장소를 물색했고, 하천에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영수증 찢듯 내용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꼼꼼하게 찢어발겼다.


 태우가 전학 가기 전, 바람대로 우리 집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The characters and incidents in this series, althouh inspired by actual events, have been fictionalized for dramtic purposes, and are not intended to depict actual individuals or ev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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