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 그룹 박지윤 대리님이요, 그분께 안내 메일을 통지받았어요. 접수증에 관한 얘기는 없었습니다. 그분께 연락 한 번 부탁드려도 될까요? 정말 중요한 일이라서 그래요."
내가 말을 끝낼 때쯤 더 많은 보안팀 직원들이 모여들었고 나는 출근 인파들에게 또 한 번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다.
"아까 면접 인원들은 이런 걸 한 장씩 제출하고 갔다니까 그러네."
관리자로 보이는 남자가 역정 내듯 말했다.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들고 있었고 표면에 '면접 접수증'이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부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안내는 받지 못했다고 항변하며 박지윤 대리에게 연락해 줄 것을 간청했다.
내가 쉽게 물러날 것 같아 보이지 않았는지 남자의 반응이 달라졌다. 한 번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달래서 내보내기로 작전을 변경한 모양이었다. 흠, 글로벌 기업에서 강제로 끌어내지는 않으리라. 그깟 전화 한 통 해주면 훨씬 간단한 일일 테니. 남자는 안내 데스크의 여직원에게 내용을 전달했다.
가느다란 손으로 수화기를 쥔 여직원은 묘한 표정으로 연신 네, 네를 연발하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끊었다. 그녀에게 뭔가를 전해 들은 젊은 직원은 다시 중년의 상사에게로 중년의 상사는 처음 나를 입장을 막았던 직원에게로 말을 전했다.
이곳의 업무는 항상 이런 식으로 처리되는 것일까? 어떻든 나를 통과시켜줌으로써 그들만의 독특한 통신 프로토콜과 돌발 상황도 매듭지어졌다.
게이트를 통과했더니 바로 앞에 최종 목적지인 내방객실이 있다.
그곳에는 수많은 선남선녀들이 모여있었다. 인솔자로 보이는 장신의 청년이 손목시계와 내 얼굴을 몇 차례나 번갈아 확인하더니, 대뜸 왜 이렇게 늦었냐며 핀잔을 줬다.
이어 그렇지 않아도 그냥 출발할 참이었다면서 '운 좋은 줄 알아라'라며 좀 건방지게 면박을 늘어놓는 통에 한 마디 웅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에이, 씨발꺼.
"뭐라고요?"
"…아, 아무 말 안 했습니다. 숨소리가 커서 죄송합니다."
동작이나 말하는 됨됨이를 봤을 때 저 사람은 박지윤 대리는 아닐 거다. 박 대리의 안내 메일에는 교양이 느껴졌다.
우리는 이 회사가 얼마나 부강한지 알려주는 거대한 엘리베이터 열 대에 나누어 탑승했다. 인솔자가 지시한 대로 22층으로 올라갔다. 아마 거기가 면접장일 것 같다.
전봇대 같은 사내 말이 이제 '진짜' 면접 대기장으로 이동한단다.
저기 보이는 넓은 대강의장이다. 지나치는 복도에 소강의장이 몇 곳 있었다. 거기가 면접 장소일 것 같았다.
일류 기업의 쾌적하고 거대한 인프라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직원들도 여유가 느껴진다. 뉴스에 잠깐씩 비치는 증권회사의 살벌한 풍경이 아니다. 하나같이 깨끗하고 온화한 인상. 정말이지 관상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한 것 같다.
그리고 아까 지나온 복도에는 테이크아웃 커피점도 있었다. 쫓겨날 뻔했던 1층에도 향긋한 커피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이 빌딩에는 과연 몇 개의 커피점이 존재할까? 여기저기에서 활기가 느껴진다.
수직으로 높이 뻗은 빌딩이 업무효율과 분업도를 높인다는 경제학 서적을 본 적 있다. 일류 기업이 앞다투어 본사 건물을 높이 높이 짓는 것도 나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세미 정장의 남자들과 원피스 차림의 여자들이 하나 같이 지명도 있는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있다. 이곳에서 나만 거렁뱅이꼴을 하고 있다.
면접 대기장소인 대강의장 문을 들어서자 탁구대 크기의 테이블에 손바닥만 한 이름표가 나열되어 있다. 인솔자는 자신의 이름표를 찾아 상의 왼쪽 부분에 부착하라고 말했다.
어라, 내 이름표가 없다.
정말 뭔가 착오가 있었던 건 아닐까? 입구에서 요구했던 접수증과 이름표가 누락된 점. 그럼에도 박지윤 대리가 순순히 올려보네 주지 않았던가.
전원 이름표를 착용하고 착석했다. 나 혼자 남아 이상한 차림새로 이름표를 찾고 있었다. 불참자인 것 같은 이름표 몇 개가 남았고 그 가운데 내 이름표는 없었다.
"저, 죄송합니다만, 제 이름표가 없습니다."
"성함이 뭐죠?"
젊은 인솔자가 교만한 표정으로 물었고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서류와 손목시계를 번갈아 확인하고는 말했다.
"시간이 임박해서 제가 자리를 비울 수 없겠네요. 급한 대로 직접 받아오셔야 하겠는데, 거기로 말할 것 같으면 '어디 어디로 지나서 어디 어디로 이빠이 꺾어 들어가면 어디 어디 사무실'이 나오는데 거기서 '누구누구 씨'에게 이름표를 받아오시면 되세요."
기꺼이 다녀오겠는데, '되세요'라니. 여기가 도떼기시장인가? 거상 그룹 아닌가. 이런 일류 기업에서까지 엉터리 존댓말을 들어야 하다니. 정말 괴롭다. 그리고 거기가 어디라고?
다시 한번 설명해주시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시간이 없으니 3분 안에 다녀와야 할 것이라고 덧붙이기만 했다. 이제 무엇이라 항변하는 것도 사치 같았다.
나는 갓 입대한 신참 이등병 같은 속도로 튕겨 나갔다.
'어디 어디로 지나서 어디 어디로 이빠이 꺾어 들어가는 곳'이 이쯤이겠거니 '어디 어디 장소'는 여기인가 저기인가 똑같이 생긴 사무실만 잔뜩 배열되어 있다.
이 건물은 수평으로도 면적이 놀라울 만큼 광범위했다. 다시 돌아가서 길을 물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건 너무 멍청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상대도 안 해주겠지. 흥.
This is a work of fiction. Names, characters, places and incidents either are products of the author’s imagination or are used fictitiously. Any resemblance to actual events or locales or persons, living or dead, is entirely coincident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