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시계탑 앞에서 경식을 기다리는 계남은 초조한 마음만 가득하다. 투피스 양장에 양털 코트를 받쳐 입은 자신의 모습이 너무 날려 보이는 건 아닌지 걱정도 앞섰다.
경식에게 최후의 통첩을 날리고 일방적으로 소식을 끊었다. 자신이 너무 성급했던 건 아닌지 후회가 막심했다.
다시 사과의 편지를 쓸까 고민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어금니 꽉 깨물고 참았다.
시간은 어김없이 흘렀다.
계남은 곧 있으면 그를 만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리고 하루빨리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었다.
자신이 경식의 아내가 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고 생각했다. 뭐가 되었든 멀리서 돈 봉투만 보내주는 짓은 이제 관두고 싶었다.
한편 해결해야 할 문제는 또 있었다.
무속인이라는 자신의 미천한 직업과 과거에 소박맞은 사실을 어떻게 풀어 가야 할지를 생각하면 앞이 캄캄했다.
그러는 사이 어떤 사내가 계남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키가 훤칠했다. 양옆으로 떡 벌어진 어깨는 계남의 심장을 쿵쿵 뛰게 했다. 그는 한눈에 보기에도 경식이었다.
"계남씨, 맞으시죠?"
"경식씨?"
"네, 윤경식입니다."
모자를 훌렁 벗으며 환하게 웃었다. 경식은 생기가 넘쳤다.
사진 속의 모습 그대로 계남의 눈앞에 서 있었다. 단지 머리카락만 짧게 깎여 있었다.
"일단 어디 들어가시죠?"
"네, 제가 잘 아는 데가 있어요. 요 앞 다이애나 커피숍이 괜찮아요."
"네, 계남 씨가 가자고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대환영입니다."
둘은 어제 만난 친구처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편지 교환을 멈춘 불편한 사안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여느 젊은 커플과 다름없는 광경이었다.
한참 수다를 떨던 계남은 허기를 느꼈다. 경식에게 요기라도 하자고 권했다. 경식은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계남은 하나부터 열까지 이렇게 잘 맞는 천생연분이 또 있을까 생각했다.
계남은 경식에게 좋은 걸 사주고 싶었다. 그러나 계남은 외식이 익숙지 않았던 관계로 마땅한 메뉴를 떠올리지 못했다.
어쨌든 둘은 커피숍을 나왔고 마침 근처에서 풍겨오는 돼지갈비 굽는 연기에 식욕을 자극받았다.
"저녁은 돼지갈비가 좋을 것 같네요."
계남이 말했다. 그리고 당돌하게 점포로 앞장서 들어갔다.
둘은 돼지갈비에 소주까지 곁들여 먹었다.
계남은 술기운이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신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주로 계남이 떠들고 경식은 듣는 형국이었다.
경식은 어쩌다 대답할 기회가 주어지면 적당히 대답을 해주었고, 자신도 궁금한 점이 있을 때 스스럼없이 계남에게 질문했다.
누가 말을 많이 하고 적게 하고는 문제 될 것 없었다. 그 자체로 서로에게 알맞은 지분이었다.
해는 기울고 달이 떠올랐을 무렵, 계남은 경식의 귀갓길을 걱정했다.
사실 시계탑에서 만났을 때부터 궁금했었다. 그러나 벌써 헤어질 상황을 궁리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계남으로서는 일생 최고의 시간이었다.
"경식씨, 그나저나 몇 시 차 타고 가세요?"
"저 오늘 안 가요."
"네?"
"사실 내일 군대 가요."
그러고 입안으로 소주를 털어 넣었다.
"네? 뭐라고요? 그런데 지금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요?"
"별다른 수가 있나요? 계남씨도 마침 만나자고 하시고 저도 언젠가는 말씀드려야 하긴 했는데, 잘 됐다 싶었죠."
계남은 그의 태평함에 말문이 막혔다.
둘은 갈빗집을 나와 어두워진 길을 걸었다.
"댁까지 모셔다드릴게요."
"경식씨는 어디로 가실 거예요?"
"오면서 봐 둔 여관이 있어요. 오늘은 거기서 묵고 내일 새벽에 첫 기차를 타려고요."
This is a work of fiction. Names, characters, places and incidents either are products of the author’s imagination or are used fictitiously. Any resemblance to actual events or locales or persons, living or dead, is entirely coincident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