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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명찰 25

by 마르코니

"악사를 찾아주세요."

"네? 악사요."

"네, 악기를 연주할 사람요. 그냥 아무거나 박자만 맞게 두드릴 줄만 알면 돼요."

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날 은주는 운동장으로 이동하는 대열 속에서 악사를 수배했다는 간수의 속삭임을 들었다.


"이번 주 야간 근무가 언제입니까?"

"내일입니다."

"내일 밤 새벽 2시에 시작하시죠. 필요한 물품은 여기 적어놨어요. 장소도 섭외해 주세요."

은주의 쪽지를 슬그머니 받아 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굿판을 벌일 장소는 방송실로 정해졌다. 방음시설이 되어있는 덕에 늦은 시각, 문제의 소지가 있는 소음 걱정도 말끔히 해결되었다. 방송실은 여러모로 적합한 장소였다.


악사로 차출된 사람은 흰머리의 노파였다. 그녀는 소싯적에 독일 유학 경력이 있는 음악가였다.

산골 소녀 최순명은 마을 성당에 있던 풍금에 매료되어 있었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풍금 소리를 듣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연주자의 손놀림을 기억해 두고 언젠가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몰래 풍금을 켰다.

성당 식구들은 옆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순명의 게릴라 콘서트를 듣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선율에 도취했다. 그리고 반주자의 실력이 말도 못 하게 좋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독일인 신부는 반주자가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앉아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음악에 애정이 깊었던 독일인 신부는 순명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천재적인 음악적 소질을 가졌던 순명은 신부의 아낌없는 성원에 힘입어 뮌헨 국립음악대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순명은 각종 콩쿠르를 휩쓸었다. 세계적으로 극찬을 받으며 천재로 손꼽혔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갔지만, 조국에 대한 갈증이 늘 따라다녔다.

순명은 독일의 교수직도 마다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한국에서 자신이 갈고닦아온 음악을 전파하고 발전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한국의 음악 시장은 대중음악이 주름잡고 있었다. 그리고 클래식 음악 시장은 폐쇄적이었다. 음악적 자질보다 출신학교, 누구의 자제냐, 어느 집안 출신이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되었다. 이른바 '파벌'이 장악하고 있었다.

순명은 세계적인 뮤지션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애송이 취급을 받았다.

굴러온 돌 취급하며 그 누구도 순명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간혹 출신 학교를 물어보는 경우는 있었다. 다만, 독일 어쩌고 하는 순간 빨갱이 취급을 하며 명예를 훼손 당했다.

한국에서 외국 유학이라면 적어도 미국으로 가야 마땅했고, 줄리어드 음대나 버클리 음대는 나와야 명함을 내밀 수 있었다.


어쨌든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순명도 밥벌이를 해야 했다. 그녀는 국내 유명 음악대학의 신임 교수 채용에 지원했다. 그리고 최종심에서 탈락했다.

경력이나 학력은 말할 것도 없이 차고 넘쳤다. 실기 능력 또한 누가 봐도 순명의 승리였다. 모든 포트폴리오가 그녀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교수 채용은 미국의 이름 모를 삼류 예술대학 출신의 안젤라 최가 임용되었다.

안젤라 최는 유명 로펌 대표이사의 막내딸이었다. 그녀의 가문은 대대손손 법조인 집안이었다. 출신성분으로 따지자면 최고로 치는 명문 세가지만, 피아노 연주 실력에는 자질이 없었다.

순명은 조국에 대한 환멸감을 떨칠 수 없었다. 더는 참지 못하고 이성을 잃고 말았다.

수업 중인 강의실에 슬그머니 들어가 안젤라 최 교수의 쇄골에 만년필을 냅다 꽂아 박았다. 제네바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 기념으로 받은 만년필이었다.

"이게 바로 구라파의 힘이다! 요년아! 깔깔깔…."

순명은 학생들에게 제압당해 추가적인 행위는 행사할 수 없었다.

안젤라 최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다만 정신적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강단에 선지 하루 만에 휴직계를 제출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아주 오랜 기간 요양을 했다.

순명은 현장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사법부는 그녀에게 20년 형을 선고했다.

범행 장소가 국립대였던 만큼 공무집행방해죄가 성립되었고, 만년필을 꽂은 것은 살인미수 혐의가 적용되었다.


굿판 준비가 마무리되자 은주가 당부했다.

"교도관님, 부탁드릴 게 있어요. 제발 아무것도 빌지 마세요. 그냥 큰어머니께 사죄만 하세요. 오늘은 빌기만 하는 자리입니다."

"빌기만 하면 될까요? 많이 노여워하시는 것 같은데…."

"용서를 비는 힘은 쇠도 녹이고 하늘도 누그러진다고 하더군요. 비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기도법입니다. 할머니께서 노여워하시는데 아이는 풀어달라느니, 낫게 해달라 느니, 소원을 빌면 더 심술 나지 않겠어요? 살아생전 효도 한 번 못 받고 가셨잖아요. 제대로 못 모셔서 죄송하다고 뉘우치는 자세만 보이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 시작하시죠."

악사를 보며 말했다.

악사는 네모난 궤짝 같은 의자를 누이고, 옆면에 올라앉았다. 손바닥으로 좌석 부분을 가볍게 툭, 툭 두들겼다. 흡사 아프리카 전통 타악기 소리가 났다.


느긋한 박자로 시작해 점점 속도를 올렸다.

은주는 눈을 감고 감흥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눈을 부릅뜨고 슬그머니 일어났다.



This is a work of fiction. Names, characters, places and incidents either are products of the author’s imagination or are used fictitiously. Any resemblance to actual events or locales or persons, living or dead, is entirely coinciden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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