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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 35

by 마르코니

"엄마, 이제 비밀번호를 쳐야 해. 비밀번호 알고 있지?"

"그럼, 인석아. 2848이다."

은주는 번호를 하나하나 누르며 말했다.

"2848?"

"무슨 의미지?"

"어라? 우리 생일은 아닌데?"

"아빠 생일도 아니야."

"이팔사팔. 이판사판이라는 뜻이야."

"에이, 뭐야 김샜잖아."

민지가 말하는 사이 ATM 화면에 잔고 '0원'을 알리는 문구가 떠올랐다.

"어라 뭐야? 빵원인데?"

민지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최 부장…, 이 개애새끼가…."

"전화 한 통만 쓰자."

민지가 아이폰을 건넸다. 은주는 신물이라도 본다는 듯 생소한 눈초리로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었다.

민지는 전화기 모양의 아이콘을 살짝 누르고 다시 건넸다.


믿었던 최 부장이 전 재산을 들고 잠적했다.

은주가 감옥에 있는 긴 세월 동안 여러 가지 일을 맡아서 해준 그가.

옥바리지 닷컴은 감방 동료들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수감 생활 동안 바깥세상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종종 있었다. 기본적인 것은 영치금만 있으면 교도소 내부에서 처리가 가능했다.

다만 읽고 싶은 책을 구할 수가 없을 때는 외부인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리고 은주의 경우에는 자신이 번 돈을 교도소에서 사용하기 위해서 영치금으로 충전이 되어야 했다.

영국이 폐인이 되자 은주에게 영치금을 채워줄 사람은 없었다. 막막했다. 그러나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것은 없었다. 돈이 넉넉하면 세상은 갈수록 살기 좋아졌다.

은주는 '옥바라지 닷컴'이라는 사업체를 알게 되고 생활이 여러모로 윤택해졌다. 닷컴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뭔가 세련됐다고 생각했다.

이름만 들어도 옥바라지를 전문적으로 해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도 뭔가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면 이름을 짓는데 신중을 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된 옥바라지 닷컴은 두둑한 수수료만 지불하면 모든 일을 완벽하게 이행했다. 은주는 사용하지 못하는 돈을 잔뜩 쌓아 놓고 있었기 때문에 옥바라지 닷컴은 소비의 물꼬가 트이게 된 시발점이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 자신의 두 딸에게 송금책으로 폐지 줍는 노파를 기용한 것도 옥바라지 닷컴의 최 부장이었다.

사회적 약자인 노파를 이용한 것도 수년간의 경험을 통해 얻은 결과였다.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은주는 두려웠다.

사회를 흔들었던 희대의 악마 김은주가 감옥에서 불법적인 돈벌이를 했고, 그 돈을 아이들에게 불법 승계를 했다는 게 세상에 밝혀질 경우, 은주는 무기징역으로 연장되고 아이들의 앞길도 막힐지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 부장은 그 방면에서 일인자였다.

그는 일명 '법꾸라지'로 통했다. 반평생 사기를 치며 터득한 편법 노하우는 참으로 교묘했다.

은주는 그와 인연을 맺고 감방의 질 떨어지는 팬티와도 작별을 선언할 수 있었다. 은주의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한 부분까지 최 부장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에 최 부장 입장에서 은주의 석방은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그의 나이도 이제 50대 중반으로 접어들었다.

17년간 은주를 전담 마크하며 매출을 큰 폭으로 신장시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벌써 10년 전부터 경쟁 업체가 속속들이 생겨나면서 매출은 절반으로 곤두박질쳤다.

최 부장은 불안했다.


옥바라지닷컴은 법인으로 등록된 정식 회사였다. 그러나 직원의 대다수가 감방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속칭 '빵잽이'출신들이었고 최 부장도 사기전과 10회로 우수직원에 속하는 축이었다.

은주의 석방이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앞날도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최 부장은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은주의 대포통장에 있는 전 재산 17억을 출금해 비트코인으로 환전했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과 필리핀으로 도피했다.

은주가 돈이 없어진 것을 알았을 때 최 부장은 세부에서 콘도를 계약하고 있었다.


은주는 교도소에서 온갖 종류의 범법자들을 접했었다.

따라서 최 부장을 추적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은주는 그 누구도 돈 떼먹고 달아난 인간을 잡았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었다. 돈을 떼먹고 잡힌 인간도 본 적 없었다.

감방에 있던 그 많던 사기꾼들은 다들 공범의 내부고발이나 2차 3차 범죄로 투옥된 자들이었다.


은주는 잔고 '0원'을 표시하는 화면을 확인하고 형언할 수 없는 굴욕감을 느꼈다.

화면을 종료시키고 거칠게 카드를 뽑았다.

은주는 근처 쓰레기통에 카드를 던져 버리고는 돌아섰다.

"왜? 엄마, 얼마가 있어야 하는데?"

민서가 검지를 입에 갖다 대며 민지를 만류시켰다.



This is a work of fiction. Names, characters, places and incidents either are products of the author’s imagination or are used fictitiously. Any resemblance to actual events or locales or persons, living or dead, is entirely coinciden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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