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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르코니 Dec 20. 2022

마케터 47

 민지와 은주는 딱히 잃을 게 없었다. 친구도 사회생활도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민지에 비해 민서는 너무 많은 것이 연결되어 있었다.

 생활고로 시작했지만, '살풀이 닷컴'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자신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박사 과정을 수학할 생각이었다. 딱히 공부가 좋은 건 아니었지만, 프로그램 모델링을 연구하는 것은 흥미로웠다.

 "그래도 도망은 아니라고 봐. 아직 부딪혀보지도 않고 도망가는 건 더 이상해진다고."

 "언니, 이제 우린 끝이야. 끝. 아까 봤잖아 형사들 들이닥친 거. 곧 정식으로 영장이랑 수속 같은 거 밟고 나면 잡으러 올 수도 있어. 정신 차려. 엄마는 죄 없이도 20년을 감옥에서 썩었어! 언니가 대표자 명의로 되어 있잖아. 언니가 독박 쓰게 될걸? 우린 언니가 시키는 대로 했다고 발 빼면 감당할 수 있겠어? 돈도 다 몰수당할 게 뻔해. 그럼 재기 불능이야. 정신 차려 언니. 필리핀으로 도망가자!"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달려왔는데. 다 버리고 갈 수는 없어! 나 대학원 준비하고 있는데 너네들이 꼬셔서 끌어들였잖아!"

 민서는 분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셋은 각자 집으로 흩어졌다.

 원룸에서 자매가 동거할 당시에는 돈이 없는 관계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은주까지 발을 걸치게 되었었다. 좁은 공간에 세 명이 지내는 것은 싸움 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이후 목돈이 생기는 대로 각자 보금자리부터 마련했다.

 섭섭할 것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에 대부분을 공유하는 동업자로 살아가며 혼자만의 시간도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격무에 시달리며 집은 잠만 자는 공간으로 퇴색했지만 그래도 자기 집만 한 공간은 없었다.

 세 사람은 퇴근 이후 연락을 일절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사무실에 마지막까지 남는 건 주로 민서였다. 민서는 업무 특성상 동생과 은주에게 도움을 구할 일은 전무했다.

 그러는 사이 은주와 민지는 미묘하게 더 가까워졌다. 서로의 색깔도 비슷했다.

 은주의 주장에 따르면 민서는 '불' 같은 사주를 타고났다고 말했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처럼 집념과 열정이 강하다. 바람이 불어도 잘 꺼지지 않고 화력이 더 강해진단다.

 반면 은주와 민지는 '물' 같은 성질이라고 했다. 뭐든 유연성 있게 잘 섞인다. 또한, 물과 물이 만나면 세력이 커진다.

 서로를 더 보완해주며 편안함을 느낀단다. 그래서 은주와 민지는 미세하게 닮은 구석이 많았고 서로 공감도 잘 되었다. 뭐든 이성과 논리적으로 판단하려고 드는 민서를 흉보는 일도 잦았다.

 그리하여 은주와 민지, 그리고 민서는 앞으로의 거취를 달리 생각하는 것도 그렇게 이상할 일은 아니라고 볼 수 있었다.

 각자 집에서 찜찜한 밤을 보내고 별다른 대화가 없는 시간 속에 며칠이 더 지났다.

 사무실로 출근한 민서는 자신의 책상에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언니.


 우린 생각이 많이 다른 것 같아서 협의점을 찾기 힘들 것 같더라.

 그래서 말인데 각자 방식대로 한 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랑 엄마는 먼저 필리핀으로 가 있을게.

 생각해 보니까 서울대가 어떤 곳인데 무작정 포기하고 같이 가자는 것도 우습더라.

 언니는 남아서 끝까지 싸워보고. 일이 잘 안되면 그때 와도 되지 않을까? 우리가 먼저 정착해서 자리 잡아 놓을게.

 언니 방은 비워두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말구.

  언니 몫의 돈은 남겨두고 가.(법인 계좌에 있어)

  잘 지내 언니. 항상 응원하고 있을게.

  자리 잡는 대로 연락할 게.(이메일로 하겠음. 전화는 위험할 수 있음)

  엄마도 미안하게 생각한다더라.

  지금은 그런 생각 다 접어두고 각자 도생할 방법만 찾자.

  엄마는 내가 잘 보살필게.

  언니 빠잇!


 PS. 화 좀 죽이고 살아!



This is a work of fiction. Names, characters, places and incidents either are products of the author’s imagination or are used fictitiously. Any resemblance to actual events or locales or persons, living or dead, is entirely coinciden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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