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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all talk Apr 09. 2020

3. 미기후(微氣候)의 천국

그리고 황제내경(黃帝內經) 소문(素問) 사기조신대론(四氣調神大論)

가브리엘과 엘리자베트의 첫만남이 이루어진 파리식물원(Jardin des Plantes)이나 대장정의 마무리격인 원명원(圓明園)같은 곳을 직접 다녀와서 많은 사진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아직 <오래오래>에 나온 식물원 중 그 어느 곳도 직접 다녀와 본 적이 없다. 언젠가는 다녀와보고 싶다. (다녀온다면 어느 계절이 좋을까.) 그 때까지는, 나 혼자서나 재미있어 하고 있는 것 같은 미기후(微氣候, microclimate)나 올리비에 드 세르(Olivier De Serres) 같은 것들에 대해 적어 볼 수 밖에.


바위 쪽 이탄지 19.1도, 남쪽 자갈밭 18도.
이곳은 미기후(微氣候)의 천국이다.
아, 식물학은 정말 미기후의 과학이야.


가브리엘이 파리식물원에서 하루 종일 온갖 측정에 몰입하는 회상 장면 중, 경탄의 문장을 통해 식물학의 핵심요소 한 가지를 흘려준다. 미기후(微氣候). 미기후라는 단어를 되뇌어보는데, 어마어마한 다양성에 대한 이미지가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미기후(微氣候)는 주변에 비해 실질적(substantial)인 차이를 만들어 낼 정도의 작은 국지적 기후조건들을 의미한다. 미기후의 결정요소들은 기후결정요소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1955년에 쓰여진 Thomas Bedford Franklin의 <미기후환경연구>라는 책에서 '미기후'라는 개념을 처음 언급했는데, 미기후환경(microclimate environment)은 좀 더 넓은 영역에서는 번성하지 못하는 작물들의 작은 생장영역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참고로 에릭 오르세나가 태어난 해는 1947년, <오래오래>에서 가브리엘과 엘리자베트가 만나게 되는 해는 1965년, <오래오래>가 프랑스에서 출판된 해는 1998년이다.)


1℃ 혹은 1m 정도의 작은 차이가 생태에 정말 영향을 미칠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요소가 등장하는데, 바로 '시간'이다. 예를 들어 작은 물웅덩이 주변은 '특정한 시간에 걸쳐' 영향을 받을 경우 물웅덩이가 없는 곳보다 약간 더 낮은 온도와 더 높은 습도를 가지게 되고, 이것이 주변 식생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즉 시간의 누적이 없다면 특정 공간에 대한 미기후의 영향은 작아진다. 미기후의 영향을 증폭하는 것은 시간의 누적이다.


그래. 두 사람 모두 매순간을 활용해서 부식토를 만들어야 해.
혼외 사랑의 비결은 바로 거기에 있어.
시간의 부식토를 충분히 마련해야 하는 거야.


시간과 공간은 이 책을 관통하는 소재이다. (일단 제목이 <오래오래(longtemps)>이다.) 시공간에 대한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가브리엘과 엘리자베트의 경우 약 40년) 여러 특정한 공간에서(프랑스 자연사박물관, 파리식물원, 스페인의 세비야, 영국의 시싱허스트, 벨기에의 헨트, 중국의 원명원 등등) 쌓아올리는, 애정계(love affair)의 전설로 남을 만한 실질적인 노력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각각의 장소들에는 특정한 문학적 미기후가 형성되어 있고, 그 공간들에서 충분한 시간에 걸쳐 가브리엘과 엘리자베트는 애정이라는 식물을 공들여 가꾸어낸다.


책의 내용과는 별개로, 미기후에 대한 위키피디아의 설명을 읽다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몇 가지 더 나온다. (너무 재미있어서 <식물미기후학>이라는 통계와 계산식 가득한 책도 한번 구해 읽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경사면(slope or aspect)이 미기후에 대한 기여요소 중 하나라는 부분이 그 '재미있는' 이야기 중 하나인데, 사실 경사면의 이미지는 모든 한의사들에게 아주 익숙하다. 한의학 첫 수업에서 가장 먼저 사용하기 시작하는 개념이 '음양(陰陽)'이기 때문이다.


陰陽, 빛과 그림자, 볕과 그늘.


음양(陰陽)이라는 개념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단순한 자연과학적 사실 묘사이다. 볕이 드는 곳과 그늘진 곳.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무한할 정도로 다양한 개념이 음양이라는 개념에서 파생되며, 가장 기본적인 한의학적 사유의 틀, 사유의 시작점이 된다. 한의학에서는 이 음양에 대한 판단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이루어져 실제 진료의 바탕을 이룬다. 그 음양의 기초적이고 원초적인 이미지에 경사면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음양의 경사면'은 미기후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음양이 한의학, 동양철학의 기본적인 사유의 도구로 선택된 데에는 농경문화가 한 몫 하였을 것이다. 볕이 드는 땅과 그늘진 땅의 미기후 차이는 식생에 큰 영향을 주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였을 것이다. 황제내경(黃帝內經) 소문(素問)(한의학 현존 최고(最古)의 책) 중 사기조신대론(四氣調神大論)편을 다시 읽어보며 새삼 놀랍게 느낀 부분도 사람의 건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식물학적이고 기후학적인 비유를 굉장히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황제내경 소문 제2편 사기조신대론 제2장. https://mediclassics.kr/books/162/volume/82


사기조신대론을 무심하게 읽어보면, 의학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기상학적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만물이 억눌리고 시들어서 피어나지 못하고’ 하는 대목에서는 분명 사람보다도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한의학이 생명, 특히 사람의 건강을 바라보는 태도가 원예가가 식물의 건강을 바라보는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 두 학문 모두 그 중심에 자연에의 적응과 조화를 극도로 중시하는 미기후의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 매우 인상깊다. 미기후를 인지한다는 것은 자연과 생물의 상호관계를 꼼꼼하게 이해한다는 것이며, 사시(四時)의 끊임없는 순환이 오랫동안 누적되어 드러나는 각 공간의 특수성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한의사와 원예가는 모두 대기와 공간과 생명의 작은 징후들을 헤아려 보살피는 사람들이다.


끝에 더하여, 바람(wind)이 또 하나의 재미있는 기후요소이다. <오래오래>에서 바람은 짓궂고 장난기 있는 캐릭터를 종종 담당하는데, 자연계에서 바람은 물과 대기의 순환을 담당한다. 그리고 그 순환은 식물학, 생태학과 한의학 모두 중차대하게 여기는 개념이다.


어쩌다 보니 계속 한의학 이야기를 더하고 있다. 굳이 변명을 해보자면, 올해를 기하여 내 인생의 반(半)이 한의학으로 채워진다. (내년부터는 내 인생의 반 이상이 한의학으로 채워지는 셈이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내 뇌세포를 자극하여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재창조할 때, 내 뇌에서 나올 자료들은 한의학이 태반일 수 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오래오래>를 이야기하면서 사기조신대론까지 찾아볼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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