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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all talk Apr 16. 2020

4. <오래오래> 변론(辯論)

40여년에 걸친 아름다운 혼외정사의 증례(證例)

<오래오래>는 혼외정사를 다룬다.


그냥 다루는 정도가 아니라 40여년의 긴 시간 동안 성공적으로(?) 이뤄낸 혼외정사를 다룬다. '물고 뜯고 씹고 맛보는' 수준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일견, 난감한 일이다.


혼외정사를 (문학적인 면에서) 성공적으로 다룬 작품들은 다수가 있지만, 대부분 이야기가 도덕률을 따르거나 희화화를 통해 현실성을 누그러뜨리면서 혼외정사가 일탈 수준의 사건임을 암시하곤 한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책들 중에서, 내가 기억하는 한에서는 그랬었다. 하지만 <오래오래>에서는 모든 사항이 정반대의 방식으로 다뤄진다. 모든 세부사항들을 살려 현실성을 극대화시키고(리얼리즘을 실현했다는 뜻은 아니다) 남녀 주인공은 매우 진지하게, 매우 최선을 다해 전설적인 수준의 연인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희화화는 혼외정사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물들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활용된다.


나는 사실 이 책을 누군가에게 직접 추천해 본 적은 R에게 외에는 없다. 하지만 말만 안 했을 뿐, 사실은 이렇게 '브런치'에 글까지 써가면서 온 몸과 마음과 작은 지성까지 다하여 이 책이 재미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노골적이고 비논리와 비이성이 판을 치는 애정사를 주요 소재로 다루는 바람에, 이 책은 그저 '재미있다'는 짧은 말로 권하기가 쉽지 않다. 마음에 멈칫거림이 생기는 것이다.(<차를 마시며 배우다 4>에 내가 느끼는 것과 같은 맥락의 곤란함이 잘 드러나 있다.) 한 동안 많이 고민하던 부분이다. 고민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에릭 오르세나는 <오래오래>를 통해 불륜을 미화하고 있는가?


난감하다. 반가사유상. 국립중앙박물관

<오래오래> 열린책들 p.38-39

가브리엘은 식물을 대할 때와 같은 눈길로 그녀의 손을 한참 바라보았다. 손은 파리한 겨울 햇살 속에서 늑장을 부리고 있었다. 온기를 얻기 위해서거나 한동안의 어둠 끝에 찾아온 빛살에서 위안을 얻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가브리엘은 무심코 자기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다음 순간, 그는 자기가 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온몸 구석구석에 즉각적으로 새겨진 정보를 통해, 그리고 자기의 모든 추억과 자기가 꾸었던 모든 꿈에 비추어 분명히 알아차렸다. 이제부터 자기 삶은 그저 기다림과 그리움일 뿐이라는 것을, 기적과도 같은 그 접촉을 경계로 이전의 삶은 기다림의 대양이었고, 이후의 삶은 그리움으로 가득 찬 쓸쓸한 대양이 되리라는 것을.


가브리엘이 엘리자베트를 감각(感覺)하여 인지(認知)하는 순간이다. 읽을 때마다 가슴이 조금 묵직해지는 아름다운 문장들. (이세욱 번역가님, 감사합니다.) 감각하는 순간 온몸 구석구석에 정보가 새겨졌으며 그 정보들을 모든 추억과 모든 꿈에 비추어 인지한다고 서술한 부분은 생물학, 특히 뇌과학에서 감각 및 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과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여서, 에릭 오르세나는 이런 문장을 대체 어떻게 생각해내어 쓰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 놀라움, 감탄이 매번 새롭게 일어난다. (이렇게 지적이고 섬세한 남자라니 크흑.)


내 마음이 가장 움직이는 부분은 가브리엘의 예지(prediction 혹은 prognosis)이다. 엘리자베트를 인지한 이후로 자신의 삶이 그저 기다림과 그리움으로 가득 찬 쓸쓸한 대양(大洋)이 되리라는, 문장의 끝에 깊은 한숨이 덧붙어 있는 것 같은 문장. 일생의 단 하나가 될 사랑을 처음 만나는 순간에 뻔하고 흔한 흥분은 단 한 점 없이 서늘하고 묵직한, 쓸쓸함만 대양처럼 가득한 독백. 가브리엘의 이 마음 무거운 예지는 엘리자베트와의 관계가 흔하고 단순한 혼외정사와는 좀 다른 차원이 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나는 이 부분이 <오래오래>의 사랑이야기가 다른 혼외정사의 이야기들, 혹은 다른 사랑이야기들과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책 속에서 가장 구체적인 표현으로 천명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논점을 흐리는 답변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분명히 짚어야만 할 것은, <오래오래>는 전적으로 전설적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지, 혼외의 사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그들의 사랑이 어떤 면에서 전설적인 것인지는 좀 더 구체적으로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가브리엘과 엘리자베트의 관계는 순간적인 쾌락욕구에 기반하지 않는다. 그들은 긴 시간이 그들 관계에 필수적인 요소임을 잘 알고 있으며, 정확히 자신들의 의도대로 긴 호흡의 사랑을 세세한 수준(details)에서 가꾸어 이어간다. 그 호흡의 길이는 그들의 반평생 정도가 아니라, 그들 세대를 전후로 뛰어넘는(가브리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사, 그들의 역사, 그들의 아들의 아들의 삶까지 포함한다) 수준으로 길다. 그렇게 긴 호흡의 사랑이야기에는 수많은 사건들, 조력자와 훼방꾼, 이별과 재회, 사랑과 싸움과 화해가 소요되는 법이며, 가브리엘의 장탄식은 이러한 앞날의 난관들에 대한 예지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규모의 사랑이야기에서 혼외의 관계라는 흠결은 오히려 이야기에 빛(?)을 더해주는 요소가 된다.


<오래오래>는 불륜을 미화하는가? No. <오래오래>는 불륜을 미화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래오래>는 전설적인 사랑에 어마어마한 노력과 인생 전체가 소요됨을 보여주는 책이며, 시공간의 미학에 관한 책이다.


하지만 이건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40년 세월에 걸친 열정적인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파리에서 세비야, 켄트, 플랑드르를 거쳐 베이징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의 기록이다.


재정의해보자면, <오래오래>는 긴 시간의 공격과 복잡한 지리적 난관, 더하여 혼외의 관계라는 고생스럽고 불리한 조건을 극복해내는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이다. 범속함의 경지를 훌쩍 뛰어넘는다. 굳이 따진다면, 법적으로 결혼관계를 맺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데에는 엘리자베트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뿐이다. 또 굳이 궁상한 변명도 덧붙여보자면 (소설의 특성을 적극 활용하여 깔끔하게 편집했을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가브리엘과 엘리자베트 각각의 배우자들 또한 이 사랑이야기에서는 궁극적으로 일종의 조력자에 해당하며 상대방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존중한다는 점, 가브리엘과 엘리자베트 또한 결코 서로를 소유하고자 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두 사람의 사랑은 주변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으며, (좀 더 적극적으로 바라본다면) 오히려 모두가 두 사람을 통해 함께 즐거워하고 행복한 이야기를 함께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오래된 정원. 알함브라.


<오래오래>에서 중반부에 <결혼의 초상>이라는 책이 등장한다. 이 책에는 더 특이한 혼외의 관계들이 적혀 있는데, 재미있는 점은 혼외의 관계들에도 불구하고 비타 색빌웨스트와 해롤드 니콜슨의 결혼관계가 매우 독보적이고 독특한 성격으로 오래오래, 끝까지 유지된다는 점이다. 비타와 해롤드의 관계는 성격은 좀 다르지만 <오래오래>와 상통하는 맥락이 있다. 가브리엘과 엘리자베트의 혼외정사에 비하여 논해볼 만한 흥미로운 법적결혼관계의 사례로 생각해볼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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