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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all talk Apr 23. 2020

5. 한 문장, 꼬투리 잡아보기

에릭 오르세나님, 해명을 부탁드려봐도 될까요.

<오래오래>를 읽을 때마다 '읭' 하는 짧은 대목, 단 하나의 문장이 있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대략 알 것 같으면서도 정확히는 이해되지 않는 대목. 특정 단어 탓에 부정적인 의미로 직감되어 거부감이 드는 대목. 반복하여 앞뒤를 살펴 읽으면서 내가 좁은 아량에 괜히 오해한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해보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대목. 사실 그다지 의미있거나 중요한 문장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지나치게 예민하게 구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자격지심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는 자격지심이라는 말을 들으면 더더욱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찔리나보다.)


일단, 앞뒤를 자르고 해당 문장만 인용하여 오해를 증폭해본다.


아내라는 존재는 청혼에 응하는 그 운명적인 순간부터
여자라는 종에서 벗어나 별도의 잡종이 된다.


사실 이 문장도 정확히는 "아내가 있긴 하지만,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아내라는 존재는 청혼에 응하는 그 운명적인 순간부터 여자라는 종에서 벗어나 별도의 잡종이 된다"이다. 이 문장은 한 문구, 한 문구가 다 거부감이 든다. 아내가 있긴 있다는 표현은 무엇이며, 거기에 또 '하지만'은 왜 붙으며, 누구나 알긴 뭘 다 안다는 것이며, 여자라는 종에서 벗어난다니 아내가 되는 순간부터는 여자가 아니라는 건지 뭔지, 게다가 별도의 잡종이란 괴상한 단어는 또 무엇인지. (난 특히 이 '잡종'이라는 단어에서 심한 거부감을 느낀다. 프랑스어 원본에서는 어떤 단어였는지 심하게 궁금하다.) 몇 년 전까지도 웹상에서 종종 보이던, 정말 재미없는 아재개그 문구가 연상된달까. 내가 오해하고 있는 걸까? 한국과는 다른 차원의 '아내' 혹은 '결혼' 개념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 문화에 대해 내가 뭘 몰라서 이해를 못하고 있는 걸까?


내가 기분이 나쁜 포인트는 '아내에 대한 폄하'로 요약할 수 있다.
 위 문장은 정말 '아내에 대한 폄하'라는 맥락이 섞여 있는가?


 이 문장을 최대한 무난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프랑스의 남녀관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알아봐야 할 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조금 남다른 남녀관계를 맛 보여준 (혹은 맛만 보여준) 영화가 두 가지 기억난다. 하나는 <5 to 7>, 또 하나는 <Paris Can Wait>라는 작품이다. 두 영화 모두 프랑스인과 미국인의 조합으로 연인관계를 이루며, 공교롭게도 모두 남주인공은 미혼에 여주인공은 자녀가 있는 유부녀 설정이다. (<오래오래>의 설정까지 감안을 하면 세 작품이 모두 남주 미혼 혹은 이혼, 여주 유부녀 설정인 것이다. 사례가 소수이지만 일반화 가능성에 대한 강한 느낌을 부정할 수 없다.)



<5 to 7>에서 프랑스인 아리엘(여주인공)은 첫 데이트 때 브라이언(남주인공)에게 자신이 남편과 아이가 있는 유부녀라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밝힌다. 미국인 브라이언은 도덕적이지 않다며 거리를 두어보려 하지만, 마음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를 않아 두 사람은 곧 혼외관계(love affair)를 시작한다. 이 프랑스식 혼외관계에는 규칙이 있다. '오후 5시부터 7시까지'의 관계여야 한다는 규칙이다. 이 '비공식적 활동시간'에 대한 규칙은 결혼(아내)과 사랑(여자)은 별개이며, 결혼관계에서든 혼외관계에서든 각자의 사생활을 존중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즉 아리엘의 문화에서 결혼관계는 친밀하지만 근본적으로 공식적이며, 혼외관계는 내밀하고 사적인 것으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계약이 아닌 '애정에 근본한 결혼'의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나보다는 분명 오래된지라) 아리엘의 행동양태는 여전히 좀 충격적이면서 오히려 신선하다.


미국인 브라이언은 이 규칙을 깨려고 시도한다. 아리엘은 잠시 흔들리지만, 규칙을 지키지 못한 브라이언과의 만남을 끝내고 결혼생활을 유지한다. 아내로서의 아리엘은 이 지점에서 분명한 태도를 보여준다. 아이들에 대한 신성불가침적인 사랑과 남편에 대한 존중. 아리엘은 아내가 되었으나 남편을 존중하고 또 존중받기에 '별도의 잡종'으로 분류되진 않는다. 다만 '아내'와 '여자'의 구분은 존재한다.



<Paris Can Wait>에서는 미국인 앤(여주인공)과 프랑스인 쟈크(남주인공)의 여행과 식도락을 통해 이야기가 진행된다. (<오래오래>에서도 식도락은 자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오른다.) 일에만 몰두하는 남편에게 지쳐 있는 앤은 장난기와 바람기가 다분한 외간 남자 쟈크와의 여행을 경계심 가득한 태도로 시작하지만, 여행 중의 여유롭고 즐거운 경험들에 행복을 느끼며 점점 '미국적인' 보수적 태도를 내려놓는다. 여행의 마지막에 강렬하게 쟈크에게 이끌리지만 미국인 앤은 결국 선을 넘지 않는다. 다음 날 쟈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앤에게 애정 가득한 선물과 메시지를 보내며 다시 만남을 청한다.


이 영화에서 '아내' 앤은 남편과의 결혼으로 (적어도 남편에게는) '여자가 아닌 별도의 잡종'이 된 존재이다. 체념한 채 살아가는 앤에게 프랑스인 쟈크는 <5 to 7>의 아리엘과 유사한 이야기를 한다. 프랑스에서는 사람의 마음은 본디 자유롭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랑과 결혼은 별개의 것이며, 애정사가 어떠하든 간에 (결혼을 통해 이루어진) 가족과 전통은 여전히 존중한다는 것이다. 미국인에게 정절은 (몸과 마음으로) '결혼한 단 한사람만' 바라보는 것이지만 프랑스인에게 정절은 (일단 마음으로는) '사랑하는 단 한사람만',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쟈크는 여러모로 <오래오래>의 가브리엘과 닮았다. 엘리자베트를 기다리면서도 다른 여자들과 관계를 맺는 가브리엘이 이제야 어떤 맥락이었는지 얼핏 이해가 간다.)


삶의 규칙들이 순수한 신의(信義)로 이루어진다면 좋겠지만 그건 환상일 뿐이다. 프랑스인은 사람의 마음을 얽매려 만든 규칙들이 위선임을 이해하고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 프랑스 사람들에게도 '악다구니'는 여전히 존재하며, 자유로운 마음을 인정하는 것 만큼 사랑을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 프랑스식 규칙마저도 절대적인 건 아닌 것이다.


이 대목에서 작가의 사생활이 궁금해진다. (작가의 삶과 작품이 상관이 없다는 건 분명 거짓이다.) 에릭 오르세나는 두 번의 이혼 경험이 있고 현재 세 번째 아내와 함께 하고 있다. 프랑스 위키피디아는 (프랑스스럽게도) 그 외의 자세한 사생활 이야기는 기록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작가가 그 이혼과 결혼의 여정 속에 어떤 경험을 하였는지, 악다구니는 없었는지, 지금의 아내는 작가에게 여전히 '여자'일지 아니면 또 다른 '잡종'이 되었을지, 그 경험들이 위의 문장과 이 책의 전반에 영향을 미쳤을지, 끊임없는 궁금증이 일어난다.  


확실한 건, 난 '잡종'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프랑스식 결혼관을 (마음이 아닌) 머리로는 인정한다 하더라도, '잡종'이라는 표현은 받아들여지지를 않는다. 이럴거면 처음부터 청혼하지 않았어야지. 그렇다면 여자가 아내라는 잡종이 될 일도 없었을 텐데. 불순한 의도가 담긴 청혼은 결국 아주 시끄러운 '악다구니'를 불러일으키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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