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히 읽어본 <로드 짐>과 7년을 읽은 <오래오래>의 비교대조 시도
그 동안 읽어왔던 책들에 <로드 짐>은 꽤 자주 등장했었다. 하지만 무슨 듣도 보도 못한 옛날 기행문인가 싶은 마음에 (나는 정말 지금껏 '로드 짐'이 'Road Jim'인 줄 알았다) 지루할까 두려워 어떤 책인지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피할 수 없다. <로드 짐> 제20장(XX)에 나오는 한 문구가 <오래오래>의 제사(題詞, epigraph)인 동시에 <오래오래>의 첫 문장이기 때문이다.
<로드 짐(Lord Jim)>은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 1857-1924)가 1899년에서 1900년 사이에 Blackwood's Magazine에 연재한 소설이다. 잡지 연재라는 형식은 <로드 짐>의 각 장에 연극적 스타일을 더한다. 일종의 전편(前篇)에 해당하는 'Patna 편'에서는 잠깐씩 등장하고 지나가는 인물들도 대사에 각자의 개성이 살아 있으며 주인공 짐(Jim)의 심각한 심리상태에서 잠깐이라도 벗어나 가볍게 웃고 지나갈 수 있는 여유를 준다. 특히 콘래드가 작가가 되기 전 선원으로서 꽤 길게 일했던 이력 덕에 해양과 항해를 묘사하는 문장들은 반짝반짝 빛난다. 다양한 항해 관련 용어들, 100년도 넘게 시간이 흘렀으나 전혀 진부하지 않은 대양(大洋)을 묘사하는 아름다운 문장들.
하지만 그 뿐, 나는 사실 약 3주에 걸쳐 힘겹게 <로드 짐>을 읽었다. 즐거운 문장들은 짧았고, 비극적인 짐의 상황은 길었다. 문학사에서 <로드 짐>이 차지하고 있다는 중요한 의의는 내 마음에 즐거움을 전혀 더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점에 중요한 건 나의 즐거움이 아니다. 나는 <로드 짐>에서 '에릭 오르세나가 찾은' 즐거움을 찾아내야 한다.
책 말미에 붙어 있는 '작가의 말(Author's note)'에서 콘래드는 당시의 부정적인 서평 몇 가지를 직접 소개하며 일부 해명을 시도한다. 내가 심하게 공감한 서평들 중 하나는 <로드 짐>이 본래 하나의 단편이었던 것 같은데 작가가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붙여 분량을 늘리면서 내용이 산으로 갔다는 식의 이야기였고, 둘은 소설이 전반적으로 'morbid', 즉 병적(病的)이고 건강하지 않은 내용이어서 흥미롭지 않았다는 여성독자의 평이었다.
전반적인 부정적인 평에 콘래드는 불쾌함을 감추지 않는다. 전자의 평에 대해서 콘래드는 이 소설이 본래 'Patna 편'으로만 쓰여졌으나 잡지 연재가 갑자기 결정되면서 'Patusan 편'을 더했음을 고백했다. (어쩐지!)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야기가 흥미로우니 상관없지 않느냐는 태도로 답을 덧붙인다. <로드 짐>이 전반적으로 병적이라는 여성독자의 평에 대해서 콘래드는 한 시간 여를 곱씹어보았다며, 성차별 및 인종차별적 발언이라 여겨질 정도의 반박을 한다. 콘래드에 따르면 '여성들의 정상적 혹은 일반적 감수성(women's normal sensibility)'에는 이 소설이 이국적(foreign)으로 느껴질 수 있을 것이며, 라틴계 유럽인(Latin European) 계통의 독자라면 'lost honour'에 대한 예리한 의식(acute consciousness)을 그리는 이 소설을 병적이라고 평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저런 서평을 읽으며 몰지각하고 교양 없는 독자(나도 여기 포함된다)들에게 화가 나 소리지르는 콘래드가 상상이 되어, 뭔가 기분이 꼬시다(고소하다). 나만 이렇게 지루하게 느낀 게 아니었어!
콘래드의 분노는 뒤로 하고, ‘lost honour에 대한 예리한 의식’이 콘래드가 <로드 짐>에서 그리고자 한 것이라는 내용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오래오래>와 <로드 짐>을 가장 많이 비교대조한 것도 이 부분에서였고, 다른 <로드 짐>에 대한 전문적인 서평과 분석 또한 이 부분에 집중하고 있다. 이 'lost honour'에 대한 내용은 <로드 짐> 제20장(XX)에서 스타인(Stein)과 말로(Marlow)의 대화를 통해 구체적이고 집중적으로 논의된다. 이 제20장은 'Patna 편'과 'Patusan 편'을 연결하는 곳이며, 주인공 짐 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인 스타인이 핵심적인 내용들을 직접 이야기하는 곳이다. 또한 에릭 오르세나가 <오래오래>의 제사(題詞)를 골라낸 곳이기도 하다.
무릇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다 함은
마치 바다에 빠지듯
한바탕의 꿈에 빠지는 것일세.
내가 잘못했다. (나는 항상 잘못한다.) <로드 짐>은 마냥 재미없기만 한 책은 아니었다. <로드 짐> 제20장을 읽고, 또 읽고, 정리하고, 여기저기 흩어진 단서들을 엮어 보면서, <오래오래>가 지금껏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무게감(?) 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로드 짐>을 읽기 전까지 나에게 <오래오래>의 제사(題詞)는 그저 꿈에 빠져 한바탕 놀아보자는, 난장판을 여는 환상적인 포문일 뿐이었다. 하지만 <로드 짐> 제20장에서 그 문장은, 햄릿의 "To be, or not to be"에 버금가는 문제의식의 서설(序說)이다. 그 문제의식이란 것이 가장 구체화된 <로드 짐> 속 문구는 'How to be'이다. 햄릿이 일단은 살기로 결정하고 나서, 어떻게 살지 그 방법론에 대한 고민으로 전향한 셈이다. 콘래드가 말한 바다는 꿈과 환상이 가득하여 빠지면 마냥 즐거운 일이 벌어지는 곳이 아니다. 경험이 없으면 허우적대다가 지쳐 익사하고 말게 되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무서운 곳이다. <로드 짐> 속에서 스타인은 사람이 태어나면 그런 무서운 바다에 빠지듯 '꿈'에 빠지게 된다고 말한다.
Yes! Very funny this terrible thing is. A man that is born falls into a dream like a man who falls into the sea.
<오래오래>의 가브리엘은 자기도 그런 꿈에 빠져 휩쓸렸다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로드 짐>에서의 분위기를 그대로 <오래오래>까지 이어온다면, 가브리엘은 마냥 행복한 혼란에 휩쓸린 것이 아니라 아주 큰 위험에 빠진 것이 된다. 다소 극적(dramatic)인 시작인 셈이다. (조금 과장하고 노력해야 느낄 수 있지만 어쨌든) 강렬한 긴장감! 이 바다같이 무시무시한 '꿈'에 빠져 휩쓸렸다는데, 가브리엘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일단 <로드 짐>의 주인공 짐은 생존에 실패했다. (길고 진중한 소설을 너무 짧게 요약해서 미안합니다, 콘래드 작가님.) 배(Patna)가 침몰하여 수백이 죽게 되는 대참사가 예견되는 상황에서 (물론 잡지 분량을 맞추기 위해서 각색되었겠지만) 짐은 속 터지는 내적 독백을 이어가며 잘못된 선택을 한다. 대중에게 짐의 선택은 분명 비도덕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선택의 실존적인 면을 이해하는 말로와 스타인 같은 인물들은 홀로 재판과 처벌을 감당하며 고뇌하는 짐에게서 흔치 않은(rare) 섬세한(delicate) 어떤 가치를 감지하고, 외딴 섬(Patusan)에서 다시 한 번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짐을 돕는다. 짐은 이 두 번째 기회에서 성공하는 듯 하지만 악당 브라운(Brown)이라는 위기가 닥쳤을 때 또다시 시의적절치 않은 관대함을 보인다. 짐의 잘못된 결정은 결국 여러 사람을 죽게 만들고, 짐은 그 책임을 지기 위해 죽임당함을 선택한다.
다수의 사람들(의 독서평)은 짐의 인생이 비극으로 끝난 이유로 짐의 '로맨틱'한 특성을 꼽는다. 비현실적인 이상을 좇으며 몽상적인 태도는 생존에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콘래드는 이 '로맨틱'하다는 특성을 분명 어떤 결점이 아닌 희소하고 고결한 속성으로서 사용했다. 로맨틱한 사람, 꿈을 좇아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희소하며 섬세하고 고결한 존재들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나비'에 중의적으로 비유되고 반영된다.) 하지만 로맨틱한 삶은 쉽지 않다. 꿈에 빠지는 것은 바다에 빠지는 것과 같다. 꿈을 좇는 사람이 그 꿈을 이루고 제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험(experience), 강인함(strength), 영리함(cleverness)과 같은 것들(<로드 짐>에 흩어져 있던 단어들을 주워모았다)이 필요하다. 사실 짐은 로맨틱했기 때문에 삶에서 참패한 것이 아니다. 짐은 '어리숙하게 로맨틱'했기 때문에 참패했다. 짐은 콘래드가 예리한 의식으로 탐구했다는 'lost honour'의 전형이다.
The way is to the destructive element submit yourself, and with the exertions of your hands and feet in the water make the deep, deep sea keep you up. So if you ask me - how to be?
스타인은 로맨틱한 사람이 제대로 살아남으려면 세상에 휩쓸려 허우적(이것이 바로 짐이 보여준 방식이다) 댈 것이 아니라, 마치 수영을 하는 것처럼, 파괴적 요소(destructive element)들이 자신을 떠받치게끔 하면서 팔다리를 움직여주어 깊고 깊은 바다가 사람을 둥둥 뜨게 해 주게끔 하는 것이 방법이라고 말한다. 스타인의 다른 발언까지 참고하여 생각해보면 이는 로맨틱한 삶을 제대로 살아가려면 파괴적 요소들을 오히려 생산적인 것으로 활용하는 일종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말이며, 또한 끊임없이 팔다리를 움직여야 하듯 영원히 꿈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스타인은 말로의 평처럼 그 누구 못지 않게 로맨틱한 인물이다. 나도 처음 대충 읽었을 땐 스타인이 가브리엘에 비견될 정도의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드 짐>의 악명높은 모호함 탓에) 반복하여 자세하게 읽다 보니 스타인의 삶에도 몇 가지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어느 순간 뚜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매직아이'마냥 알아보기 쉽지 않지만 책에 분명히 적혀는 있다.) 그 중 하나는 파란만장하지만 성공적이었던 스타인의 삶은 (불운했던 짐과는 달리) 쭉 행운이 따랐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말년의 스타인의 삶은 자신이 수집한 나비들마냥 박제된 과거의 로맨스로서 생명력을 잃었다는 점이다. 말년의 스타인은 더 이상 꿈을 좇지 않는다. 외로운 그의 삶에는 이제 슬픔만이 남아 있다. 짐에 이어 또 다른 실패이다.
<오래오래>의 가브리엘은 모든 면에서 성공을 이루었다. <로드 짐>의 짐이나 스타인과는 다르게, 로맨틱한 존재로서 꿈을 좇는 바다에서 완벽하게 살아남았다. 가브리엘은 짐과 스타인의 한계들을 모두 극복했다. 마치 에릭 오르세나가 <로드 짐>에서 콘래드가 제기한 로맨틱한 삶의 현실성 문제를 치밀하게 연구하여 <오래오래>를 구성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그 (로맨틱한) 생존 전투의 성공에는 가브리엘의 나이(불혹을 넘겨 얻은 원숙함), 아버지(짐과 스타인에게도 아버지와 같은 존재들이 있었으나 가브리엘의 아버지만큼 구체적이고 충분한 지지를 주진 못했다), 저승의 어머니, 아버지의 연인들, 다양한 분야의 친구들의 도움, 원숙한 나이를 충분히 활용한 지리학적, 문학적 전략 구사, 원예가로서의 직업기술, 시간에 대한 순응, 죽음과의 화해로 얻은 도움 등이 모든 면에서 꼼꼼하게 동원되었다. <로드 짐> 제20장에는 앞서 이야기했던 파괴적 요소(destructive element)와는 대조적인 인상을 주는 '로맨스의 즐겁고 고원한 요소들(the exalted elements of romance)'이 스치듯 언급된다. 소박한 환경(humble surroundings), 열정(generous enthusiasms), 우정, 사랑, 전쟁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로드 짐>에서 짐은 이러한 요소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고 스타인의 삶에서 이러한 요소들은 그저 행운으로서 존재했다. 하지만 <오래오래>에서 가브리엘은 이러한 로맨스의 요소들을 매우 인내심 있고 낙관적인 태도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다루었으며, 삶의 즐겁고 괴로운 모든 면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맛본다. <오래오래>를 들어가는 말에서 가브리엘은 그 지난했던 전투에서의 승리를 자축하며 자랑스러움을 숨기지 않는다.
서기 2000년의 여명을 맞이하면서, 여기에 한 동물의 초상을 제시하고자 한다.
길들일 수 없고 시대에 뒤떨어진, 애정이라는 동물의 초상을.
'발레를 추어' 가브리엘을 축하하는 '연초록 빛깔의 커다란 산누에나방들'이 승자의 여유로움을 장식한다. (<로드 짐> 속 스타인의 '나비들의 무덤(graves of butterfly)'에 대해 알게 되면 이 축하장면은 느낌이 한결 새로워진다.) 흔들의자에 앉아 가만히 흔들리는 가브리엘의 옆에는, 그가 사랑하는 늙은 여자가 있다. 가브리엘의 전투는 (스타인의 행운 가득한 인생과는 달리) 결코 쉽지 않았기에 가브리엘에게는 무수한 상흔이 남아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스스로 만든 전설대로 꿈을 좇았고 살아남아 승리했기에 자랑스러움이 무한하다. 혼외정사의 도덕성 운운하며 핵심을 헛짚거나, 로맨티시스트의 실존성을 의심하는 위선자들의 시샘은 덤으로 얻는 즐거움이다.
콘래드의 삶을 위키피디아에서 대략 살펴보니 콘래드 또한 로맨틱한 인물로 스스로도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로맨틱한 선원으로서 콘래드는 적지 않은 고뇌로 가득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로드 짐>을 통해 로맨틱한, 즉 지나치게 이상을 추구하는 비현실적인 삶의 태도를 예리한 의식으로 다루면서 콘래드는 어떤 특정한 삶의 방식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로맨틱한 특성을 불완전하지만 고결한 가치(lost honour)라고 천명한 콘래드를 자기합리화라고 평가하는 것은 지나친 폄하이다. 이러한 존재들은 콘래드의 말처럼 (소수라 하더라도) 어디에나 존재하며,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이 다양한 정도로 가지고 있는, 가치있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콘래드의 소설에서는 모두 실패하였으나(그 시대와 문화의 한계일 수도 있다), 에릭 오르세나는 <로드 짐> 후 약 100년이 지나 승리한 가브리엘의 사례를 그려 보여주었다.
짧게 덧붙이기. <로드 짐>에는 인상적인 여성 두 명이 등장한다. 'Patusan'에서 짐이 사랑했던 보석같은 여자 주얼(Jewel), 전쟁이 나자 그녀를 위해서는 전혀 두려워 말라고 당부하고 홀로 싸워 집을 방어한 스타인의 부인(공주 신분)이 그들이다. <오래오래>의 엘리자베트도 이들과 궤를 같이 한다. 필요할 때 두려워하지 않고 싸울 줄 아는 여성들. 강하고 독립적인 고귀한 여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