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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all talk May 14. 2020

8. 오래오래 vs 순간의 지속

에릭 오르세나 vs 전혜린 (물론 나는 오르세나 편)

전혜린(1934~1965)의 아버지 전봉덕(1910~1998)은 친일 행적으로 시작하여 기회주의적 행보를 꾸준히 보인 인물로, 무엇보다도 1949년 김구 암살사건을 직접 처리하면서 암살범을 보호하고 사건의 배후를 적극적으로 은폐하며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얻어 승승장구하였다. 조선총독부 관리에서 시작하여 대한민국 국무총리 비서실장까지 올랐으며, 1980년대 김구 암살사건과 관련하여 국내 여론이 좋지 못하자 도미하여 생활하였으나 그전까지는 대한변호사협회 회장까지도 지내는 등 한국에서의 경력은 마지막까지 매우 화려하다. 전혜린의 글에 따르면 전봉덕은 그녀가 법학과에 진학하기를 원했다고 하였다. 또한 전혜린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는 자신에게서 큰 희열을 느꼈음을 이야기했다.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처음 <데미안>을 읽었다. 이후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책은 <데미안>이었고, 가장 좋아했던 작가는 헤르만 헤세였다. 서점에서 헤르만 헤세의 책을 모두 구해다가 방학 내내 읽었던 기억이 난다. 성장기 혼란한 마음속에 안정감을 주는 헤르만 헤세의 책들이 좋았고, 수채화를 그리며 말년을 보냈다는 헤르만 헤세의 소박하고 평온해 보이는 삶이 부러웠다. 지금 내가 <오래오래>를 여러 번 읽은 것처럼, 당시에는 <데미안>을 5~6년에 걸쳐 반복하여 읽었다. 어떤 높은 곳을 향하는, 모호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던 것 같다. 그리고 후일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읽으면서 그것을 번역한 전혜린이 내가 그동안 줄기차게 읽어오던 <데미안>을 번역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혜린도 헤세를 좋아했다. (당시엔 정말 이러한 우연의 겹침들이 놀라웠다. 하지만 사실은 당시 내가 읽은 책들의 범위가 너무 작았음을 의미할 뿐이다.) 당연한 수순으로 전혜린에 대해 알아보았고, 나는 전혜린의 평전과 에세이, 일기 등을 구하여 읽게 되었다. 그녀의 명철한 글에는 성장기의 나 또한 열심히 찾고 있던 어떤 높은 수준으로의 갈구가 분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당시 나는 전혜린을 홍보 문구 그대로 '비범한 천재 여성'으로 여겼다. 그녀의 수면제 과용으로 인한 죽음은 여성에 대한 어떤 불합리한 시대적 차별 탓이라고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비판의식 없이) 받아들였다.




헤르만 헤세를 내 최고의 작가에서 완전히(그렇다. 대학 들어가며 이미 나의 취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내려놓은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몇 년 후였다. <Soul of the Age: Selected Letters of Hermann Hesse, 1891-1962>를 읽으면서 헤세 본인의 목소리를 통해 그의 삶을 엿보게 된 것이 그 계기였다. 나는 그동안 헤세의 인상이 구도자(求道者)적이며 초탈한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작품을 통해 본다면 헤세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헤르만 헤세의 편지 선집


하지만 실상은 내 상상과 전혀 달랐다. 헤세가 추구하는 것들은 그의 삶, 현실에서는 전혀 구현되지 못했다. 아니, 헤세는 현실의 한계들 안에서 어떤 높은 원칙을 구현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헤세는 삶과 그것들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무시하는 것이 그것으로부터 초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던 여자들과 그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에게 헤세는 무관심했고 또한 무책임했다. 헤세는 자신의 예민하고 섬세한 마음과 높은 수준의 의식에는 그의 가족들이 (부양 문제 외에서도) 존재만으로도 방해가 된다는 듯 행동했다. 헤세의 청혼들은 그런 면에서 순간의 이기적 낭만에 휩쓸린, 그러니까 지극히 호르몬적인, 자기중심적 연극 행위나 다름없었다. 아이들은 아버지 헤세가 기약 없이 돌아오지 않을 때에도 어려움이 많았지만, 아버지가 집에 있을 때에도 숨죽여 지냈어야 했을 것이다.


나는 헤세를 좋아했던 내가 완전히 유치했음을 깨달았다. 정말 속상했다. 많은 사람들은 작가의 삶과 관계없이 헤세의 글과 사상을 사랑한다. 하지만 나는 버림받은 헤세의 가족들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 헤세를 좋아할 수 없었다. 한 작품이 아무리 높은 사상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 왜곡되어 구현되는 사상이라면 우리가 인지하기 어려운 오류와 병적인 요소들이 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오류들은 논리만으로는 탐지하기 어려운 지극히 미묘하고 작은 것들, 현실적 세부사항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것들이 제대로 짚어지지 않은 채 아름다움과 그럴듯함에 홀리고 만다면 현실에서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비극들이 펼쳐지고 만다. (역사가, 긴 시간의 흐름이 그것을 줄곧 증명해왔다.) 나는 헤세의 책이 아주 가치 없다고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어떤 오류의 가능성에 대해 한번쯤은 현실에 확고히 발을 디딘 채 논해봐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헤세의 책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그런 논의가 많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도 사실 헤세의 작품이 현학적이라는 점 외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면을 주의해야 할지 아직 정확히 짚어내기가 어렵게 느껴진다.




전혜린이 번역한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도 처음 읽었을 땐 꽤 충격이었다. (외설적이라는 논란과 전혀 상관없이) 지금까지도 파격으로 느껴질 정도의 주체성 강한 여성상이 정말 놀라웠다. 내가 가지고 있던 여자로서의 어떤 가능성, 외연이 단번에 확장되는 느낌이랄까. 이 주 전까지만 해도 그런 기대를 가지고 책을 다시 주문했다. 그러나 그 책이 오는 동안 내가 검색하여 찾아낸 내용은 하루 종일 내 머리를 복잡하게 했다. 루이제 린저가 위선적인 삶을 살며 거짓된 글을 쓰고 거짓된 말을 해왔다는 것이다.


José Sánchez de Murillo라는 사람이 루이제 린저 사후 그녀를 기리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다 루이제 린저의 숨겨진 과거 행적과 실체(친 나치 행적)를 알게 된다. 그는 루이제 린저가 고아원에 버린 혼외자 아들의 도움을 받아 2011년 <Luise Rinser: Ein Leben in Widersprüchen(모순된 삶)>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영문이나 국문으로 번역된 판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루이제 린저의 이러한 충격적인 위선과 거짓된 삶에 대해 그다지 논의된 바가 없다. 독일에서는 Murillo의 책이 출간되던 당시 관련한 논의가 매우 활발했다고 한다. 그녀의 거짓으로 점철된 삶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나름의 의미를 인정받는 추세이다. 오히려 그녀의 거짓을 고발하는 책을 쓴 Murillo가 (루이제 린저가 속했던) 교회의 위신을 떨어뜨렸다는 등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과거 내가 받은 충격과 감동이 거짓에 기반한 것이라는 사실에 나는 (그녀의 주체적 여성상의 가치가 매우 크다는 것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루이제 린저와 그녀의 책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책에 묘사한 나치의 탄압과 관련된 내용들은 참을 수 없이 혐오스러웠다. (남 일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읽기엔 그녀의 거짓에 삶을 위협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Murillo의 <루이제 린저: 모순된 삶> 표지


전혜린이 만약 지금껏 살아서 Murillo의 책을 읽게 되었다면 마음이 어땠을까. 온 마음과 체력을 다하여 이룬 일들이 거짓과 무지에 기반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무서운 일이다.




전혜린이 28세일 때(1961년) 쓴 <순간의 지속(持續)>이라는 짧은 에세이를 읽었다. (어디에 기고한 글일까?) 서두에서 전혜린은 '왜 살아야 하는가' 하고 자문하고 '정신 속에서 우리 스스로를 구제해야 살 가치가 있다'라고 자답한다. 전혜린은 인간은 정신 그 자체이며, 그 의식을 매 순간 깨어있게 하여 순수한 상태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에 대한 언급이 이어진다. 사랑도 삶처럼 '정신에 의해 깨끗하게 된 것'이어야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고독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이어진다. 전혜린에게 고독은 서로 영혼의 소통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소통이 지속 불가능한 것에 기인하는 '불안과 회의'에서 싹튼다고 하였다. 결국 사랑과 실존은 '순간'에만 가능하다.  매 순간 의식의 순수함을 지향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 그렇게 선택된 순수한 '순간'들이 삶의 가치의 전부인 것이며 그것을 생각할 때 '어떤 허망하고도 엄숙한 감동'을 갖게 된다며 끝을 맺는다.


이 에세이는 내 마음을 몹시 슬프게 만들었다. (요즘 내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이, 전혜린에 대해 너무 오래 읽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전혜린에게는 허망하지만 감동이었으나 나에게는 그저 허망한 안타까움일 뿐이었다.


전혜린은 존경해 마지않았으며 자신이 최고를 갈구하는 삶을 사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아버지라는 사람이 정확히 어떤 존재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본인이 어디서 난 것으로 먹고 공부하였는지, 자신의 삶의 목표를 어떤 기반에 세우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공부하고 싶어 했던 철학, (좀 더 특정하자면) 독일식 형이상학은 (지금의 추세와는 다르게) 몸과 마음을 분리하여 다뤄온 역사가 길었다. 전혜린은 대체로 몸의 불편은 정신이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저 무시해야 할 장애물 같은 것이며, 먹고 자는 것들은 둔한 정신의 소유자들에게나 중요한 일이라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학창 시절 경쟁 삼아 지식 탐구를 하느라 거의 잠을 자지 않는 생활을 하여 건강을 해쳤으나 그것이 안타깝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식이다. (수면이 정상적인 정신기능과 인지기능, 학습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당시의 독일식 형이상학이나 일본식 학습모델에서는 직관적인 수준으로도 전혀 인식하지 못했으며, 박탈당한 수면 탓에 심신(心身)으로 괴로워하는 많은 사람들을 실패자로 여겼다. 사실 지금도 수많은 실험 연구 덕분에 사회 인식이 아주 약간 개선되었을 뿐이다.)


전혜린은 삶과 사랑이라는 문제에 대해 에릭 오르세나와 정반대의 의견을 표한 셈이 된다. '오래오래' 이어나가는 비범한 사랑이 에릭 오르세나가 그린 어떤 이상(理想)이었다면 전혜린은 '선택'에 의해 정해지는 '순간'만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에릭 오르세나의 <오래오래>도 사실 어떤 짧은 만남들이 점선처럼(에릭 오르세나는 이것을 '섬'에 비유했다) 이어져 긴 선을 그린다. 하지만 그 만남과 만남 사이사이에도 사실 '기다림'과 '그리움'이라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으며, 가브리엘은 그 긴 시간을 이어나가기 위해 먹고 자고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것 같은 삶의 즐거운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추구한다. 하지만 전혜린의 삶과 사랑은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아무리 졸립고 배고파도 개의치 않고 '정신적 순수함' 혹은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순간의 연속 속에서 끝없이 추구(선택)해야 한다. 이 방식은 정신력 혹은 체력이 조금만 부족해져도 실패할 수밖에 없음이 자명하다. 매 순간 어떤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삶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전혜린의 죽음이 만약 자살이었다면 나는 그것이 스스로 선택한 '순간의 지속'이라는 존재와 사랑의 방식에 대해 일종의 포기 선언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자살설보다는 당시의 험악했던 수면제들에 책임을 돌리는 입장이다.) 전혜린의 삶을 하나의 실험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실험은 '실존'하는 데 완전히 실패한 셈이 된다. 높은 의식수준이 의미가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나는 그 병적(말 그대로 病的)인 의식수준을 다른 사람, 특히 성장기의 사람들이 비판 없이 받아들여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건강한 방식의 실존을 선호한다. (이렇게 단정하듯 말했지만, 사실 나는 완전히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건강과 성과는 정말 반비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러 사례들을 보면 그것들의 균형점을 찾기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전혜린


사실 전혜린이 추구한 존재와 사랑의 방식은, 전혜린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로 여겼던 학창 시절(경기여고 시절부터 독일 슈바빙 유학시절), 새롭고 즐거운 지적 활동들을 통해 의식이 끊임없이 성장해나가는 청춘, 먹고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운 시절에만 가능한 방식이란 생각이 든다. 그마저도 기회주의자라는 평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아버지의 덕에 가능하였으나 그녀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으며, 다른 사람들의 '먹고사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온전히 공감하지도 못하였다. '불꽃같은 열정으로 가득한 삶'이라는 그녀의 평소 소망은 사실 높고 무한한 지식욕을 제약 없이 만족시킬 수 있었던 아름다운 그녀의 '청춘'이 되돌아오길 바랬던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지나간 과거의 아름다움, 미완성의 존재로서 아름다웠던 청춘은 안타깝게도 재현되지 않는다. 그녀는 필연적으로 괴롭고 고독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그녀 귀에 들어간다면 무지한 동정표에 화를 낼 것도 같다. 미안합니다.) 그녀가 자신을 조금만 더 사랑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녀의 딸이 다른 삶과 사랑을 시도할 기회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것도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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