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가의 열두 달> 카렐 & 요제프 차페크. 배경린 옮김. 1929
<오래오래>의 앤과 클라라, 그리고 엘리자베트처럼 열정적으로 살고 사랑하는, 인생의 즐거움과 행복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그런 실제 여성 혹은 여성작가를 찾고 싶었다. <오래오래>가 아닌 곳에도 이런 멋진 여성들이 존재하지 않을까? 귀납법과 통계를 선호하는 나는 그 여성들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요소들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혼자 노는 것을 선호하고 워낙 경험치가 일천한지라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떠오르지 않으니 이유없이 승부욕이 불타오른다. 앤과 클라라, 엘리자베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가브리엘 정도의 가벼움과 진중함, 긴 시간과 친구가 될 줄 아는 여유를 갖춘 여성이 어딘가엔 존재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어디에? (혹시 몰라 덧붙이자면, 남녀 성대결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그저 경쾌한 성격 형성에 있어 남녀의 신경내분비학적 차이가 드러난다면 그것이 어떤 식일지 궁금할 뿐이다.)
여러 여성들을 떠올려 봤지만 완전히 적합하진 않았다. 많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여성들은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기 보다는 전투적인 편이었다. 아직도 진행중이지만, 여성들은 긴 시간 동안 불합리한 차별에 맞서 싸워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생의 한가운데>를 쓴 루이제 린저와, 그 책을 칼같이 번역했던 전혜린을 한참 고민을 하여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사실 후보가 그리 많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생의 한가운데>나 전혜린 수기집, 혹은 전혜린 전기에는 마음놓고 웃을 수 있는 유머같은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본인의 적극적인 의지대로 삶을 높은 곳으로 이끌고자 했던 태도는 높이 살 수 있지 않을까? 혹은 가브리엘이나 엘리자베트와 같은 경쾌한 방식으로는 불가능한 어떤 이유나 조건이라도 확인되지 않을까? 일단 확인은 해보자는 마음에 <생의 한가운데>와 <목마른 계절>을 다시 주문하고 루이제 린저와 전혜린에 대해 좀 더 알아보았다.
반나절 동안 웹을 검색했다.(내가 저 책들을 처음 읽을 당시에는 지금처럼 인터넷에 정보가 많지 않았어서 그들의 책과 그들에 대한 책이 아마추어가 확인할 수 있는 전부였었다.) 20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몇 가지 내용들이 추가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용들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뒷목이 뻣뻣하게 굳어왔다. 나머지 반 나절 동안 새롭게 추가된 정보들을 대입하여 <생의 한가운데>와 <목마른 계절>을 다시 살폈다. 머리가 아파왔다. 아이고. 지금도 어째야 할지 완전히는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쓰긴 쓸 것이다.
오늘은 대신, 답답해오는 가슴과 쥐가 나는 머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읽은 <정원가의 열두 달>을 적어봐야겠다. (이 책을 집어든 것이 우연이라니, 내가 아주 복(福) 없는 사람은 아니었어.) 원예나 정원에 관심이 없더라도, 뭔가 답답한 일이 있어 나처럼 서두가 길어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이 책과 인연이 닿는다면 좋을 것 같다. 머리와 마음이 가벼워지면서도 종국에는 근심걱정에 대해 새로운 답이 떠오르도록 도와줄 수도 있는 책이니까. 일요일 오전 내내 R에게 구절구절 읽어주면서 킥킥거렸다.
카렐 차페크(동생 차페크)의 글을 보면 에릭 오르세나 못지 않게 까칠한 사람이며(내가 까칠한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좋아서 찾아보면 왠지 모르게 다들 까칠하다.), 하나님한테조차도 돌려 말하지 않고 할 말은 한다. 사람의 시끄러운 일들보다는 허리가 끊어져도 정원의 일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하늘이 하는 일(날씨와 계절)에는 인간이 간섭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에릭 오르세나와 가까운 곳, 가까운 시대에 살았다면 분명 친구가 되어 '정원가는 꽃이 아니라 흙을 가꾸는 사람'이라며 일장 연설을 했을 것이다. 카렐 차페크의 부인은 에릭 오르세나를 문란한 소설을 쓰는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작가라며 싫어했을지도 모르겠다. 카렐 차페크는 조금은 부인 눈치를 보면서도, 끝없이 프랑스 특유의 식생들이며 정원 관리 기술들을 물어보겠지. 또한 (부인 눈치를 보느라 굳이 소리내어 말하지는 않겠지만) 스스로가 정원에 쏟아붓는 '충족될 수 없는 열정'이 <오래오래>의 가브리엘이 긴 시간을 기다리며 엘리자베트에게 쏟아붓는 '애정'이라는 열정과 같은 종류의 것이라는 것도 너무나 잘 이해했을 것이다.
누가 가드닝을 목가적이고 명상적인 일이라고 했나.
마음을 바쳐서 하는 모든 일들이 그렇듯,
가드닝 역시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열정 그 자체다.
의료인들이 통증 환자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는 '무리하지 마세요'일 것이다. 환자들은 십중팔구 '저도 그러고 싶지만...'하고 대답한다. 먹고 살려면, 사람이라면, 몸이든 머리든 무리하여 살 수 밖에 없으니 진료연차가 쌓일수록 무리하지 말라는 말은 가급적 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책을 보다보면 잔소리가 절로 튀어나온다. 정원가에게는 일어설 때 아프기만 한 등뼈가 하등 쓸모가 없어 아예 없었으면 좋겠다니, 등뼈 없는 지렁이가 그렇게나 부러우세요? 척추가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정말 모르시는 건가요? 아니 그런 자세로 가드닝을 하시면 허리가 남아나지 않는다구요! 그렇게 언 땅을 삽으로 가래로 때리다가는 땅이 아니라 손목이며 팔꿈치며 어깨가 부서질텐데요? 아이구, 이렇게 말도 안되는 자세로 매일 일을 하면서 도대체 언제 허리가 안아파지는 거냐고 저한테 물어보시는 거에요? (물론 카렐 차페크는 정원가의 통증 따위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 하다.)
의료인들이 본다면 한숨이 푹푹 나올 정원가 동생의 자세를 형님 요제프 차페크가 잘 그려두었다. (형도 동생이랑 똑같겠지. 으휴.) 요제프 차페크의 그림은 웃음 트리거이다. 글을 읽으면서 킥킥대다가 그림을 보는 순간 빵 터져 푸하하 하면서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웃게 된다. 독자에게 동생의 볼기짝을 마주하게 하고, 산처럼 쌓인 똥거름의 낭만을 시각화시켜주기도 하며, 세상의 모든 산과 나무와 꽃과 풀과 바위를 수집해놓고서 삽과 모종삽을 든 채 고요히 바라보는 욕망 가득한 정원가의 조용한 뒷모습을 그려 웃음이 터져나오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정원에 대해 이렇게나 우습고도 뜨거운 열정을 가진 차페크라면 한의학 혹은 의학을 분명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의사였다고 했다.) 언 땅을 미리 일궈보겠다고 삽자루를 들고 덤벼봤자 삽자루나 부러지고 심어둔 구근이나 오히려 작살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사람을 치료하는 일에도 분명 때가 있어서 환자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섣불리 덤비면 알려진 통계보다도 훨씬 못한 결과를 받게 되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한 한의사 혹은 의사가 된다는 것은 훌륭한 정원가가 된다는 것과 다르지 않아서, '부모의 마음' 즉 내가 가진 능력은 가능하다면 퍼주고 싶다는 어진 마음(仁術)과, '자기만의 정원' 즉 (실체 없는 옛 환상을 좇거나 허울 좋은 과학적 논리 같은 허공에 뜬 것들이 아니라) 생명의 세부적인 모습들을 직접 보고 겪을 수 있는 '실제적인' 경험의 장(場)이 필요하다는 것도 공감할 것이다. 햇볕이며 날씨가 하루하루 내 맘 같지 않아도 차분히 (혹은 어쩔 수 없이) 기다리면서 흙과 식물을 가꾼다면 때가 되는 대로 초록이 만발하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사소한 불편함이나 사소하지 않은 괴로움이 있더라도 그것에 매달리지 않고 자기가 이뤄야 할 일에 집중하여 꾸준히 나아갈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도 허리는 아껴 쓰셔야 해요.) 폭풍우가 닥치면 정원이 난장판이 될까, 효험이 없는 줄 알면서도 신에게 원망 섞인 기도를 하며 비바람 속에 미친 사람처럼 동분서주하는 그 원예가의 마음은 한의사 혹은 의사에게도 자주 들이닥치는 마음이다. 심각했던 이 환자가 겨우 좋아지고 나면 또 다른 심각한 환자가 나타나 애를 태우다가, 누군가는 호전이 되고, 또 누군가는 슬프고 마음 복잡한 상황이 된다. 한의사 혹은 의사는 '정원가가 흙을 길들이듯 몸을 길들이셔야 해요, 좋은 것 먹어야 하고 잘 자고 잘 싸야 해요', 하고 항상 잔소리를 한다. (진리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잔소리 같은 법이다.) 한의사를 가족으로 뒀다면 평생 각오해야 할 것이다. 식물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지만 사람에게는 평생 이야기를 해 줘도 모자라다.
정원가가 식물의 이름, 특히 라틴어 학명으로 식물의 이름을 부르면 그 식물은 정원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다. 정원가에게는 특별한 존재들이 무수히 많다. 윤동주 시인이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본다'며 친구와 가난한 이웃과 시인의 이름을 줄줄이 부르듯, 차페크는 (덜 낭만적인 목소리로) 식물들의 이름을 라틴어 학명으로 줄줄이 부른다.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 하지만 분명 차페크는 낭만적인 사람이다. 이름으로 특별한 존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 이름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의 특별함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름 하나마다 차페크의 애정이 가득 느껴진다. 나도 그렇고 차페크도 그렇고, 사람에 대한 애정이 이만하지 못하다는 것은 사실 아쉽고 서운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만큼 사람에 대한 기대가 근본적으로는 크고 높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 내면에 자리한 미래의 비밀스럽고도 분주한 몸짓을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멜랑콜리와 불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덧없는지를, 또한 살아있음이, 인간(시간에 따라 성장할 수 있는 존재)으로 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차페크는 정원가의 관점에서 한의학이 사계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바를 거의 똑같이 이야기해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적어두고 싶은 부분은 겨울이다. (사람들은 겨울의 이미지에 대해, 차가움과 얼어붙음에 대해 너무 부정적이고 비극적인 이미지를 많이 가지고 있다.) 한의학에서 겨울은 폐장(閉藏)의 계절이다. 닫고 감춘다는 뜻이다. 이는 죽음의 의미도 물론 내포하고 있지만, 소멸하기 위한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순환의 전환점으로서, 다가올 봄에 새로 발진(發陳)하기 위한 충실하고 비밀스러운 준비단계를 뜻한다. (한의학은 정말 식물학적 비유가 가득하다.) 겨울은 준비하는 계절이다. 그리고 그 준비는 싹트고 생장하고 꽃피고 열매맺어 거두는 계절 못지 않게 분주하고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차페크의 말대로 원예가는 인내심 하나는 최고일 것이다. 할 일이 없을 것 같은 겨울에도 여느 때 못지 않게 분주히 움직이며 봄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달인들.
차페크 형제가 좋지 않은 때를 만나 천수를 누리지 못한 것 같은 마음에 속상하다. (어떻게 그런 시대를 살면서도 멜랑콜리와 불신이 어리석고 덧없다고 할 수 있었을까.) 차페크는 속상해하는 나를 비웃을 것이다. '네가 살고 있는 시대가 정말 내가 살고 있는 시대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거야?' 정도로 구박을 시작할 것 같다. 내가 차페크의 시대를 함께 살았다면 나는 차페크처럼 멋진 정원가가 될 수 있었을까? 하나님에게 어디 해 볼 수 있으면 해 보시지 하는 태도로 '만나를 내려주시듯 똥거름을 내려달라'면서, 세부사항들을 줄줄이 달아 요구하는 기도를 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용기있게 해야 할 말을 분명하고 깔끔하게 하고, 허리가 아픈 것 따위 개의치 않고 하고 싶은 것 하고 살 수 있었을까? 어려운 상상이다. 지금 내가 겪는 불합리한 일들에 대해서도 나는 너무 소극적이지 않은가. 여하하든, 이렇게 멋진 남자와 동시대를 살 수 없었다는 것이 몹시 아쉽다. 그의 정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