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름을 간직하며 조화(調和)하는 삶
엘리베이터 안에서 남자는 어리석은 생각을 한다. 조금 전에 행복한 시간을 가졌으니 거기에서 뭔가 중대한 결과를 얻어 낼 수 있으리라 믿은 것이다.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가 함께 사는 때 말이에요.”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찬 기운이 싸하게 돌았다. 죽음의 전조와도 같은 그 싸늘한 기운을 남자는 죽는 날까지 두고두고 기억하게 될 것이다. 마호가니로 된 구식 승강기가 마치 빙하에 갇힌 듯 뚝 멈춰 버렸다. 기이한 침묵이 서렸다. 얼음처럼 투명하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침묵이었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그것에 베여 피가 흐를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그녀의 입술에서, 조금 전까지도 공모의 말을 속삭이고 온갖 뜨거운 몸짓을 부추기던 그 입술에서 차갑기 그지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절대로 남편과 헤어지지 않아요.”
그러자 사람살이의 자명한 이치가 바로 섰다는 듯, 승강기가 다시 움직이고 하루가 운행을 재개했다(낙원이여, 안녕).
핵심적인 가치를 공유하는데도 서로 극과 극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다르게 보일 뿐 아니라 때로 많은 사람들을 죽고 다치게도 할 정도로 대치하기도 한다. 나에게는 프로테스탄티즘과 커뮤니즘이 그렇게 보인다. 핵심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다름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해 보이는데 어떻게 저렇게까지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서로 갈등할 수 있는지.
정반대의 것도 있다. 유대인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 비판과 독일인 하이데거의 나치즘 옹호가 그렇다. 서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동일한 본질을 바탕에 깔고 있다. 놀랍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 정도로는 받아들이기 벅차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게 되는 걸까? 무엇보다도 하이데거는, 실존주의의 대표 사상가이면서 어떻게 나치즘 같은 비이성적인 전체주의를 옹호할 수 있었을까?
최근 한나 아렌트에 대한 글들을 찾아 헤매다 발견한 내용들은 머리를 어질어질하게 했다. 내가 모자라고 순진했다. 나는 니체의 사상을 일종의 현실의 것이 아니거나 현실의 것을 고도로 일반화한 이데아처럼 여겨왔었다. 그래서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어떻게 니힐리즘을 극복할 수 있을지를 질문하며 스스로를 일종의 실존주의자라고 여겨왔는데 실존주의가 역사에서 그은 획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물론 실존주의도 한 갈래가 아니니 주의해야 하겠으나,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실존주의의 아이디어로 저런 기록적인 폭력이 지지될 수 있었을까.
일견 떠오르는 생각은 : ‘우월‘과 ’열등‘에 대한 무의식적, 암시적, 명시적 분류를 행하는 순간 모든 아이디어는 폭력성을 가지게 되며, 갈등에 있어 화해의 여지를 없애 버린다. 위대한 누군가가 있어 다른 이들을 구원해준다는 생각과 같은 것이 그렇다. 나는 니체를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고, 니체의 초인은 타의 모범이 되리라 정도만 생각했지 그러한 존재가 타인을 이끌어간다는 생각을 못 했는데, 하이데거의 아이디어로는 히틀러가 다른 사람들을 더 나은 세계로 이끌어 갈 초인과 같은 위대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메시아 문화로부터 암시받은 걸까?) 한 끗의 생각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극과 극의 결과.
그러나 이 ‘우월’과 ‘열등’을 다른 척도로 바꾼다면? 예를 들어 ’최선‘과 ’필요악‘이라든지. ‘최선’과 ‘우연’이라든지. 존재의 다양성과, 우연과 무작위의 가치를 최대화한 척도들을 사용한다면 ‘우월’과 ‘열등’을 절대적으로 구분하기 어려워지지 않을까? 그렇다면 조금 더 다른 사람의 가치와 작은 아이디어들을 존중할 수 있게 될까?
훗날, 아주 먼 훗날, 그는 엘리자베트에게 그날의 일을 상기시키게 된다.
“레지나 호텔의 엘리베이터 생각나요? 당신이 나를 배려했다고 말할 수는 없죠.”
그녀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듯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가엾은 가브리엘! 보아하니 당신은 가장 중요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군요.
법도란 인간에게 뜨거운 기운을 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죠. 법도의 역할은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안정성을 제공하는 거예요. 비록 허울뿐일지라도 영속성을 제공하기도 하죠. 그러니까 법도는 냉기에 뿌리를 박고 있어요. 무언가를 보존하려면 찬 기운이 필요한 법이에요. 설마 그런 것도 모르지는 않겠죠?
엘리자베트는 한 끗 차이를 확실히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엘리자베트의 이야기는 태극(太極), 음양(陰陽)에 대한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엘리자베트의 말처럼, 무엇 한 가지가 더 우월하다고 여겨 그 한 가지만을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그 한 가지가 ‘사랑’같은 거라고 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