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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all talk Aug 15. 2021

15. 포도주입문기(葡萄酒入門記)

소설 때문에 술을 시작하게 될 줄이야.

사실 재작년 첫 와인을 시작했다.

지금은 한달에 두어 번, 금요일이나 토요일 저녁에 좋은 음식을 준비하여 와인 조금을 함께 마신다.


나는 본래 술을 잘 못 하는 사람이다. 일 년에 두세 번, 겨우 맥주 한 잔이나 소주 두어 잔 마시던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달에 두어 번이나 마신다. 그래도 '술 마신다'고 이야기하고 다니기에는 또 좀 부끄럽다. 한 달에 두어 번 마시는 것을 한 번에 겨우 두어 모금 분량을 먹는지라 와인 한 병을 열면 두 달은 나눠 마시게 되고, 그리고도 좀 남아 이런 저런 음식 만들 때 사용한다.


술을 즐기는 아빠와 남동생, 술 못마시는 유전자를 나에게 물려 준 엄마는 내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 동안 나는 집안에서 (직업상) 금주령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고 앞으로도 쭉 아빠와 남동생의 음주를 줄이도록 계도(?)해야 하기에 일단 끝까지 숨겨 볼 작정이다. 내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는 것, 더하여 조금 즐기기까지 하고 있다는 것을 가족들이 알면 한쪽에서는 두 팔 벌려 환영하며 무절제한 잔치를 벌일 것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근심걱정 가득한 끝없는 잔소리를 시작할 것이다.


왜 여러 술 중에서도 굳이 와인이냐 한다면, 와인일 수 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에릭 오르세나가 ⟪오래오래⟫ 속에서 와인을 마시면 행복감 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듯한 기분이 되거나 도무지 없던 용기가 불끈 생기거나 아찔함이 증폭되는 등 어떤 다른 차원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처럼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와인과 함께 하는 음식이 몇 배는 더 맛있어지는 것처럼 묘사했기 때문이다. 한 두 번도 아니고 매우 여러 번,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와인이 다양한 음식과 함께 등장하여 다양한 상태를 연출한다. 호기심이 강력하게 일었다. (에릭 오르세나의 글을 읽고 있으면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가 없다. 모든 문장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정말 술 몇 모금이면 차원이 다른 행복감에 젖어 나른하게 오후를 보낼 수 있는 걸까? 환상적인 아뜩함, 그것 나도 느껴볼 수 있을까? 그리고 대체 뭐가 얼마나 맛있길래? 술에 대해 내가 아직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그것들이 혀끝에서 뒤섞일 때의 그 아뜩한 기분이라니!


하지만 환상으로 향하는 길은 전혀 쉽지 않았다. 사실은 일년 반을 헤매다가 최근에야 그 길 위에 올라섰다. 그러니까, 이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셈이다. 그 출발선에 서기까지의 대강을 적어보고자 한다.


처음 구한 와인은 방돌산(產) 로제 와인이었다. ⟪오래오래⟫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와인이다. 가브리엘이 한사코 피하던 아버지와 재회한 자리에서 '마늘 올리브 소스를 친 대구 요리'의 맛을 돋구어주면서 가브리엘과 아버지 가브리엘의 용기를 북돋아주었던 와인. 웹에서 ‘방돌 로제’로 검색을 해 보니 종류가 무척 많아 고르는 데 한참 걸렸다. 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밥 먹을 때 달콤한 반찬은 싫어하는지라 낮은 당도를 첫 기준으로 삼고, 어차피 많이 먹지도 못하는 술 제대로 경험하려면 조금 값나가는 것으로 골라보자 싶어 (당시의 내 기준으로는) 조금 비싸지만 너무 비싸지는 않은 와인으로 골랐다.


열심히 골라놓고 보니 와인은 전자상거래를 통해서는 살 수가 없는 품목이었다. 주류판매점에 직접 방문해야 한다고 했다. 상점 몇 군데에 전화를 걸어 물건이 있는지 확인했다. 초심자에게 프랑스 와인은 이름이 너무 어려웠다. ‘도멘 뭐시기 샤또 뭐시기 방돌 로제 와인’ 있느냐고 물어보면 다들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어요?’ 하고 되물었다. 그냥 물어보기만 하는데도 뭔가 나의 무식이 적나라하게 탄로나는 느낌이 들어 얼굴의 근육들이 뜨겁게 굳어졌다. 어렵다. 어려워.


구하는 방돌 로제 와인을 가지고 있다는 곳이 다행히 주말마다 장 보러 가는 곳 근처에 있어 방문했다. 때마침 추석 즈음이어서 행사를 하고 있었다. 내가 고른 로제 와인은 색이 정말 고왔다. 병에 붙어 있는, 알지 못하는 표기들이 가득한 라벨도 멋있었다. 소주나 맥주보다도 훨씬 비싼 와인을 한 병 계산하고 들고 나오는데 (곧 40대에 진입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른 흉내를 내는 청소년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기했다. 내 인생에 내 돈 내고 술을 사먹는 날이 올 줄이야. (그 당시에는 내가 술독(?)에 빠지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술값에 책값만큼이나 돈을 쓰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내가 고른 로제와인은 해산물보다 치즈 육류와 더 잘 어울렸다.


토요일 오후, 혼자 저녁을 준비하며 와인을 열었다. 미리 준비해두었던 멋진 와인잔에 와인을 따랐다. 일단 향을 맡아보는데... 하... 알콜 냄새... 뭔가 살짝 향긋하긴 한데, 알콜이다. 색은 예쁜데, 분명 알콜이다. 알콜이 훅 코로 들어오니 마시기도 전에 취하는 듯한 기분. 예전에 조개찜을 하느라 청주를 부어 요리하다가 공기중으로 날아오른 알콜에 취해 혼자 벌개진 얼굴로 밥을 먹던 기억이 났다. (도대체 이런 알콜이 뭐가 맛있다고 다들 난리일까.) 한 모금 마셔보았다. 시큼... 시큼하고 쓰고 떫었다. 입 안이 아린 듯도 했다. 삼키려니 목구멍을 세게 때리고는 불덩어리가 가슴 아래로 내려갔다. 맛이 조금 거칠다고 느껴졌다. 최대한 좋게 해석해보려고 노력했다. 서너 모금을 더 마시면서 '굉장한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걸까. 객관적으로 이건... 그냥 불쾌한 맛 아닌가?!! 알콜도수가 낮지는 않은 와인이어서(13.5도) 나는 금세 어질어질 취해버렸다. 그렇게 붉어진 얼굴로 저녁을 먹고 곧 쓰러져 누웠다.


다행이면서 신기한 것은 이 로제와인을 먹고서는 술 마신 뒤끝, 숙취가 없었다. 와인과 비슷한 알콜도수의 소주(증류주)는 한 잔에도 취하고 울렁거리며 석 잔이면 구토를 시작하고, 와인(발효주)과 비슷한 방식으로 양조한다는 막걸리(발효주)는 살면서 대학 초년에 단 한 번 먹어본 적 밖에 없는 나로서는(정말 끔찍한 두통과 구역감에 시달렸었다) 와인을 마신 직후 어질했던 것 말고는 다음 날 두통이며 구역감이 거의 없다는 것이 조금 놀라웠다. (나... 와인이랑은 좀 맞는 걸까...?) 숙취도 없는 김에 계속 시도해보기로 했다. 남은 와인이 아직 한가득이었다. 적지 않은 돈을 주고 산 와인을 그냥 버릴 수는 없었다. 에릭 오르세나가 거짓말을 했을리 없다. 이 와인 한 병(750ml)을 다 마실 때까지 실험을 계속하리라. 냉장고에 두었던 와인을 다시 열어 잔에 따랐다. 향은 비슷하다. 그리고 맛은???


놀랍게도 맛이 달라져 있었다. 어제보다 좀 더 맛이 순해진 느낌. 좀 더 부드럽게 목에서 넘어가는 느낌. 떫지도 않고, 지나치게 시큼하지도 않고. 조금 더 산뜻해진 느낌. 마시고 난 입 안에는 꽃 향 같은 것이 조금 남아있는 듯도 하다. 이걸까...? 이게 '굉장한 그 무언가'일까...?


중간결론부터 말하자면, 진짜 '굉장한 그 무언가'는 겨울이 되어서야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굉장했다. 2020년 그 해 초겨울, 해물야채육수에 감자, 애호박, 당근을 넣고 끓이다 쌈배추와 청경채를 더해 살짝 익히며 얇은 채끝살을 넣어 고깃국물 맛을 더해 준비한 저녁식사에 (그 때까지도 아직 다 마시지 못한) 로제와인을 곁들인 날을 기준으로 내 인생은 크게 달라졌다. 40여년을 술과 담 쌓고 살아왔던 내가 그 해 겨울 저녁식사 이후로 술맛을 조금 알게 된, 더 정확히는 술맛을 '깨닫게' 된 사람이 된 것이다. 어마어마한 맛이었다. 그 동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맛이었다. 이런 맛을 모르고 일생을 허비할 뻔 했구나, 정말 크게 아쉬울 뻔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술이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맛이라고 느껴졌다. 부드럽고 담백하면서도 아주 적당한 정도의 기름맛과 야채의 향과 해물육수의 뜨거운 감칠맛이 로제와 어우러지면서 입 안에서 환상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향과 맛이 뿜어져나왔다. 밥 먹는 내내 감탄을 연발했다. 와!! 이런 황홀한 맛이 있었다니!! (함께 식사하던 R은 이십 수 년 전 술독에 빠졌다가 나온 이후로는 술에 시큰둥해져 거의 마시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라, 함께 조금 맛만 보면서 동조해 주는 정도로 장단을 맞춰주었다.)


이제 좀 더 본격적인 환상의 세계로 나아가 볼까, 하며 호기롭게 몇 가지 와인을 더 준비해보았다. 앤과 클라라가 가브리엘과 함께 섹스를 논하는 대목에서 그녀들의 쾌활함과 장난기를 더해주었던 키안티 와인(산지오베제 품종) 한 병, 와인의 왕이라는 바롤로보다는 조금 저렴한 이탈리아의 랑게 네비올로(네비올로 품종) 한 병, 섬세하기로 유명하다는 부르고뉴 피노누아 와인(피노누아 품종) 한 병을 구했다. 그리고 나는 수 개월 동안 혼란에 빠져 헤매게 된다.


처음 마셔본 레드와인은 피노누아였다. 역시 첫 맛은 시고 떫고 당황스러웠지만, 하루 두었다 먹으면 더 맛있었던 로제 와인의 기억을 활용하여 하루이틀 냉장고에 두었다 먹었더니 훨씬 수월했고 향도 좋았다. 하지만 몇 주 지나고 난 피노누아는 맛이며 향이 심하게 밋밋해졌다. 적지 않은 돈을 들여 구한 와인인데 이렇게 얼마 마시지도 못하고 나머지를 처리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술친구도 없고,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네댓 모금 정도가 다인데 도대체 어떻게 저 술을 관리해야 한단 말인가? 하루 지나면 술의 맛이 부드러워지는 것, 오래 지나면 향과 맛이 밋밋해지는 것은 와인 개봉 후 산소와 만나며 발생하는 산화 현상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살짝 산화하되 과하지 않은 산화가 필요했다. 이후 여러 밀봉 방식을 실험해보았다. 하지만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그저 랩과 코르크를 동원하여 최대한 밀봉하는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알아보니 나만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구체적인 사례는 생략하겠지만, 다들 다양한 방식을 동원하고 있는 것 같다.


또 다른 문제는 랑게네비올로 와인을 마시면서 발생했다. 좀 더 심각한 문제였다. 마시는 순간부터 심한 두통이 발생한 것이다. 피노누아와 크게 다른 점이라고 하면 목구멍을 세게 때리는 듯한 목넘김이었다. 한 모금 마시자마자 두통과 함께 비염 증상이 바로 시작되었다. 몇 모금 마시고 다시 냉장고에 넣어두었는데, 이후 다시 마셔보지 못했다. 두통은 아주 심했고 완전히 가시는 데 사흘여나 걸리는 바람에 두려워서 마실 수가 없었다. 알아보니 유명한 ‘레드와인 두통’이었다. 학교에서 배울 때에는 술에 완전히 문외한이어서 그저 술을 많이 마셔서 생기는 숙취겠거니 하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와인이라는 술 자체가 특이적으로 유발하는 두통이었다. 단순한 숙취로 치부하기는 어려웠다. 로제와인이나 피노누아를 마실때까지만 해도 이런 문제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끔찍했던 두통의 기억, 랑게 네비올로


커뮤니티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었다. 탈수나 타닌 성분 때문에 그렇다는 이야기가 지배적이었지만 요즘은 아민 성분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더 많았다. 내 경우에도 두통과 동시에 거의 즉시 비염증상이 시작되었기에 아민 탓에 생긴 현상이라는 이야기가 더 신뢰가 갔다. 하지만 무엇 하나 확실하지도 않았고 별다른 대책도 없었다. 누군가는 화이트 와인을 먹으면 발생하고, 또 누군가는 샴페인과 같은 발포성 와인에 대해 심하게 두통이 있다고 했다. 내추럴 와인은 첨가물이 없어서 숙취가 없다는 사람도 있었고, 내추럴 와인이 오히려 숙취가 더 심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피노누아 품종이 두통이 없다고 이야기해서 그런가 하고 나도 시험해보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어떤 피노누아 와인은 나도 두통이 발생했고, 더 놀랍게도 내내 괜찮게 마시던 로제 와인도 병을 다 비워갈 무렵 두통이 발생했다. 와인과 관련된 두통은 패턴이 명확하지 않아 보였고, 확실한 해결책도 없었다. 아주 큰 문제였다. 두통 탓에 와인을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르게 된 것이다.


온갖 자료를 뒤져보고 와이너리에 편지도 보내보고 하며 고민하던 와중, 원장님 두 분(모두 한의사)이 와인 관련 두통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실마리를 공유해 주셨다. 그 실마리를 가지고 몇 개월 동안 여러 와인으로 시험하여 나름의 해결책을 만들었다. 여러 변수에 대해 기록하는 '음주일지'를 엑셀로 만들어 두통과 관련있다고 여겨지는 여러 요소들에 대해 수 개월 동안 기록하며 반례(反例)를 확인하여 소거하는 방식으로 와인 다루는 방법을 정제해냈다. 와인에 대해서 잘못 입을 놀리면 두고두고 자칭 와인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놀림을 당할 수 있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적지 않겠다. 다만 그 실마리만 공유하자면 하나는 '숙성'이고, 또 하나는 '침전물 제거작업(고전적 의미의 디캔팅)'이다. 이 두 원칙을 잘 지키기 시작한 이후에는 두통으로 고생한 일은 별로 없었으나 그래도 아직 나만의 가설이고 나만의 해결책일 뿐 아주 확실한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음을 못박아둔다.


왜 저렇게 술병에 끈 달아 가지고 다니고 싶어했는지, 이젠 알겠다. 공감. ㅋㅋㅋ


남은 인생에 어떤 재미 하나를 추가하였다. 이제 나는 우리나라 전통주 같은 것들도 맛볼 계획이다. R에게 와인 이름 몇 가지를 가르쳐두었다. 혹시라도 뭔가 축하할 일이 생기거나 하여 와인을 살 일이 있으면 사 오라는 뜻에서 말이다. 하지만 와인 이름들이 너무나 길고 어려워 성공할 것 같지는 않다.


*  읽으시는 모든 분들, 혹시 하는 마음에 잔소리 더해둡니다. 음주는 적정히 하시길 권합니다. 아예 하지 않으시는 것도 아주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엄청 많이 마신 것처럼  놨지만 일주일 혹은 이주일에  , 그것도  번에 두어 모금 정도를 반드시 음식과 함께 천천히 마셨어요.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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