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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all talk Jan 24. 2021

14. 걷기예찬

「걷기, 사랑의 고통에 당당하게 맞서는 한 가지 방법에 관하여」

에릭 오르세나가 작품에서 애정을 드러내는 분야는 아주 다양한데, 그 중에서도 '걷기'를 그리는 대목들은 항상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산책보다는 확실히 '걷기'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산책'은 특별한 사건 없이 고요함 혹은 평안함을 추구하는 느낌이라면, 에릭 오르세나가 다양한 작품들에서 작중 인물들을 걷게 할 때는 인물들마다 다양한 목적으로, 감정적으로 조금은 격렬하거나 보다 능동적인 상태에서 여러가지 모습을 드러나게 한다.  


에릭 오르세나의 걷기 사랑은 눈치를 못 챌래야 못 챌 수가 없다. 『대필작가 가브리엘의 고백』, 『The Indies Enterprise』, 『Andre Le Notre』에는 하나같이 걷기를 강조한 부분들이 있다. 『물의 미래』, 『코튼로드』, 『종이가 만든 길』은 각각 물, 면화, 종이의 걸음을 따라가며 쓴 글이다. 『오래오래』에는 '걷기예찬'이라는 대목을 따로 두었으며, 정치는 이제 싫고 글쓰며 산책하는 삶을 살겠다고 공언할 정도이니 더 할 말이 없다. 의학(醫學) 외의 분야에서 걷기를 이렇게나 중요한 삶의 요소로 여기며 애정으로 다룬 작가가 있었던가? (걷기에 대해 이만큼의 애정을 표할 정도라면, 에릭 오르세나가 연인에게 퍼부을 애정의 언행(言行)은 대체 어느 정도일지.)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지만 제가 모셔다 드릴까요?
아닙니다. 뜻은 고맙지만 저는 그냥 걸어갈까 합니다.


『오래오래』의 걷기예찬 대목은 그 전전장(前前章), 꿈같았던 벨기에에서의 동거 생활을 정리하는 장의 마지막 부분, 엘리자베트는 진작에 먼저 떠나버리고 가브리엘만 혼자 남아 집주인과 계산을 마무리한 후 벨기에를 떠나는 부분에서부터 시작된다. (잠깐 사소한 딴 얘기지만, '걷기예찬'의 실질적인 시작이 '걷기예찬'이라는 제목 이하가 아니라 그 전전장부터라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이런 글의 전개와 단락지음은 에릭 오르세나가 인간적인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보여주는지를 문득 느끼게 한다.)


가브리엘은 프랑스에 접한, 벨기에의 끄트머리에 달해 모자를 벗고 벨기에에게 공손히 감사의 작별인사를 고한다. 감사인사는 가브리엘이 걸었을 걸음처럼 찬찬히, 하나하나, 진심을 담아 나열된다. 벨기에가 (가톨릭교회의 맏딸이자 인권의 어머니인 프랑스와는 다르게) 특별한 것 없이 거만함이 없는 나라여서, 소중한 것들이 (역시 대국인 프랑스와는 다르게) 멀지 않은 거리에 모여 있는 작은 나라(小國)여서 좋은 휴식처가 되어주어 고맙다는 첫 감사인사는 웃음이 나면서도 나름 공감이 되어 '그래 맞아, 작고 특별하지 않은 곳들은 나름의 소중함이 있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가브리엘은 플랑드르(벨기에 북부, 네덜란드어 사용)와 왈로니(벨기에 남부, 프랑스어 사용) 사이의 언어 전쟁에도 감사인사를 한다. 그렇지, 갈등은 무언가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가브리엘은 이어 브뤼셀 부동산개발업자들의 세계챔피언급 도시파괴를 이겨내고 남은 옛 건물들과 거리들에 고마움을 표한다. 단순히 옛 것이 없어지는 것을 슬퍼하고 옛 것이라면 뭐든지 좋아하여 지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긴 시간과 친구가 되어 엘리자베스와 더불어 ‘전설’이 되고자 하는 가브리엘의 소망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브뤼셀의 <길드의 집들> 거리, <고기와 빵> 거리, <채소> 거리, <땔나무> 강변로같은 것들이 실제 사례로서 가브리엘에게 희망을 준 것이다.

(그냥 읽고 넘어가도 되는 대목에서 갑자기 현실의 말들이 떠오른다. 아주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유형의 문제(시대와 세대의 변화랄까)에 대해 밀란 쿤데라는 신랄한 슬픔 같은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 갑자기 생각난다. 실제 정치에서 에릭 오르세나가 겪었다는 어떤 실망의 이야기들도 생각이 난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무능함과 허세를 비웃으며 "돈이 전부"라고 단언하던 오늘 누군가의 말도 생각이 난다. 이런 세상에서도 희망을 감지하고 그에 감사해하는 에릭 오르세나는 정말 그런 희망을 느낀 걸까? 아니면 그저 우스개소리로 써 둔 것일까?)


나머지 선별된 감사인사는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왕립 중앙아프리카 박물관, 헨트에서 태어났다는 카를 5세와 아르누보 건축가 빅토르 오르타에 나눠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벨기에를 폄하한 보들레르의 어리석음을 꾸짖으며 국경으로 향한다. "한심한 보들레르, 『한심한 벨기에!』를 쓰다니!"



무엇 때문에 그렇게 걷고 계신지 알 수 있을까요?
... 슬픔 때문입니다.


'걷기예찬'의 장은 요약하자면 사랑의 고통, 간헐적인 분노로만 잠시 멈춰지는 슬픔 가득한 걸음에 대한 장이다. 대체 걸음의 무엇을 예찬하는 것일까? 가브리엘의 걸음은 시도때도 없어서 주변 사람들의 정신을 산란하게 만든다. 걸음을 멈추면 피가 눈물로 변할 것 같다는 가브리엘에게 정신과 의사는 '소요성(逍遙性) 우울증'이라는 진단명을 붙여준다. 의사는 가브리엘이 성지(聖地)를 향해 걸어 나아가는 일종의 순례자가 아닐까 하고 부언한다. 순례자... 순례자라... 곱씹어볼수록 참 적절한 진단이다. (名醫로세!) 이 진단을 한 번 찬찬히 살펴보아야겠다.


가브리엘의 걸음을 좇아 상상해본다.

가브리엘은 끊임없이 걷는다. 불쑥 화가 치밀 때에나 멈춰질 뿐이다. "왜? 도대체 왜? ... 왜, 왜, 그토록 많은 낮과 밤을 함께 보내고도 왜 나를 버린단 말인가?" 그리고 가브리엘은 또다시 분주히 걸어다닌다. 그 걸음을 멈추면 가브리엘은 울 것 같다고 느낀다. 몸의 모든 피가 눈물로 변해버릴 만큼이나 끝없이 울게 될 것 같다고 느낀다. 걸음은 가브리엘의 (일단 터져버리면 끝이 없을) 울음을 터지지 않게 도와주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걸음이 고통을 '망각'하게 하거나 사랑을 잃은 애도의 눈물을 대신하여 가브리엘로 하여금 '체념'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아니다. 이를 가브리엘이 얼마나 강조하였는지!


가브리엘은 작중청자(作中聽者), 즉 손자에게 사랑의 절절한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볼 것을 권한다.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체념하거나 애도하는 것은 추억을, 그 추억을 간직한 자기 영혼의 일부를 없애버리는 혐오스럽고 사악한 행위라는 것이다. 이어 가브리엘은 사랑의 고통에 대해 예찬한다. 명언이라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

오로지 고통만이 자기 안에서 유랑 부족처럼 떠도는 감정들의 실체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런 경험이 없다면 사랑의 감정이란 그저 모호하고 불안정한 감정일 뿐이다.

즉, 위대한 사랑에 있어 고통은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일 뿐 아니라 사랑을 더 가치있고 온전히 경험할 수 있게 해 주는 장치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고통을 포함하여 심하게 고통스러운 경험은 상처, 즉 트라우마로 남기 쉽다. 트라우마가 자리잡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과거와 미래의 고통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방어자세를 취하고, 그 과정에서 에너지를 과도하게 소모해버린다. 그리고 나면 정작 현재의 삶은 살만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렇게 자칫 마음의 큰 병을 만들 수도 있는 사랑의 고통을 어떻게 온전히 받아들이란 말인가? 어떻게 사랑의 고통에 압도되지 않고 사랑을 하며 이후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가브리엘이 치료방책으로 제시한 방법은 ‘걷기’이다. (에릭 오르세나에게, 그리고 다른 많은 작가들에게 간혹 깜짝 놀랄때가 있는데, 이 부분에서도 그랬다. 실험만으로 의료의 모든 것들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편협하고 오만한 일인지. 모든 실험은 가설로부터 시작되어 기획, 설계되고, 그 가설은 불가피하게 인간의 통찰력에서 시작된다. 사려깊은 사람들, 사람과 인간관계와 삶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보여주는 예리한 직관과 통찰은 의학계, 과학계 등의 분야에서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알아낸 것들보다도 더 자주 진실과 핵심에 가까이 있다.) 일단, 에릭 오르세나가 가브리엘을 통해 나열한 몇 가지 걷기의 치유효과라는 것들이 재미있어 요약 및 해석해보았다.


1. 걸을때 느끼는 공기의 흐름이 이별하여 홀로 된 사람의 몸과 마음에 애정어린 위로의 어루만짐이 되어준다.

2. 걸어 지나치며 구경하게 되는 타인의 삶을 상상하며 간접체험하여 현재의 고통스러운 자신의 이별상태를 벗어나 잠시 건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3.. 끊임없이 땅바닥에서 발을 떼어 이동하는, 매우 작은 시공간적 규모의 이별연습을 반복함으로써, 더 큰 이별을 하더라도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있음을 학습한다.

4. 걷기를 통해 발꿈치 끝, 아주 가느다란 혈관에서부터 혈액순환을 자극하여 전신의 순환이 활기차게 되면 기분이 고양되어(일종의 Athlete’s High) 이별의 고통을 좀 더 가볍게, 심지어는 잊고 웃기까지 할 수 있다.

5. 처음엔 어리둥절하거나 소심하거나 우울한 상태로 걷기 시작하더라도, 대지를 느끼며 수 킬로미터를 걷다 보면 아무래도 마음도 비워지고 심장 박동은 빨라질테니 (‘대지의 음악이 느껴지고 격렬한 축제의 춤판에 휩쓸려’) 활기찬 걸음, 나아가 더 활기찬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가브리엘의 통찰,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개인에게 걷기가 미치는 치료적 영향을 논하는 의학논문은 이미 적지 않게 발표되어 있다. 이 논문들은 가브리엘의 논조에 비해 덜 낭만적이고 덜 열정적이지만, (엘리자베트가 법도의 냉기가 가진 역할에 대해 깨우쳐주었듯) 그러한 차가운 특징 덕에 오히려 가브리엘의 주장에 신뢰를 더해준다. 걷기는 굳은 땅 위에 딛고 있는 두 발의 확고한 감각을 반복적으로 되살려 줌으로써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개인을 현재의 삶으로 되돌려놓는다. 게다가 걷기는 단순히 몸의 움직임을 통해서만 치료효과를 내는 것이 아니다. (에릭 오르세나가 자신의 책 『Andre Le Notre』 안에서 앙드레 르 노트르의 걸음에 대해 언급했던 것처럼) 걷기는 다양한 시간과 공간, 풍광, 하늘, 빛, 색, 바람, 기온, 시선의 깊이 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속에 개인의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내맡기고 그 안에서 같이 동화되고 흘러갈 수 있도록 한다. 걸으면서 개인이 경험하는 공간과 시간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걸음의 속도 덕에 개인은 그 안에서 떼밀릴 듯한 불안이나 공포감 없이 스스로 속도를 조절하여 그 흐름, 현재(現在)의 흐름에 적응해 나갈 수 있다.


예를 들어, 범속한 논리로 해결할 수 없을 정도의 문제가 생겼을 때 혼자 걸을 일이 있다. 걸음을 따라 풍광과 시야는 변하고 처음엔 그 속에서 나는 내가 너무 작다고 느낀다. 풍광이 찬찬히 눈에 들어온다. 처음엔 복잡한 근심들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 듯 하지만 이내 일차적이고 말초적인 감각과 생각들이 밀려들어온다. 저 나무의 초록색은 참 팔자좋도록 싱그럽고 예쁘네. 저 소나무는 큰 가지 하나가 완전히 붉게 말라죽었구만. 아이고 옆의 나무도 그렇고. 기후변화 탓이겠지. 심각하네 쯧쯧. 저 초록 참나무 위로 닿은 하늘색이 참 예쁘다! 구름은 저리로 흘러가고. 어릴 적엔 구름이랑 별이랑 보겠다고 하늘 참 많이 올려다 봤었는데. 이제는 경추가 많이 뻣뻣해져서 그런지 자주 쳐다보지 않는 것 같아. 지금쯤 R은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서 오스테오파시(Osteopathy) 책들을 들춰보고 있겠지. R도 걷는 것을 좋아한다면 좋으련만. 내 걸음의 속도에 맞추어 찬찬히 변하는 풍광과 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시야 때문인지 어느새 나는 안도감이 든다. 그리고 나는 예전과는 다른 상태의 내가 되어, 어디 가지 않고 남아있는 기존의 문제를 다른 각도로 다시 한 번 살펴보게 된다. (엘리자베트에 대한 가브리엘의 사랑이나 신에 대한 순례자들의 사랑 같은 일에 비견할 만한 정도는 아니지만, 큰 문제의 구조를 다룰 때 작은 문제를 통해 단순화하여 생각해보는 것이 이해하기 쉬워진다.)



무작정 걷는다고 문제를 회피하는 것(혹은 합리화를 추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걷는 동안 우리는 무의식 단계에서부터 예전과는 다른 각도, 다른 조건, 다른 환경 속에서 상황을 더 면밀히 살펴 새로운 차원의 문제제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왜 나를 버린단 말인가?”라는 질문은 폐기 혹은 변형될 것이다. 그 원망의 질문은 처음에나 강렬할 뿐, 긴 시간 동안 반복하기엔 너무나 지루할 것이 분명하다. 지루한 원망은 사라지고, 걸을 때마다 엘리자베트와 함께했던 기억의 파편들, 무수한 파편들이 떠오른다. 가브리엘은 그 조각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모은다. 꿈을 설득하여 빈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이라고 하는 가브리엘의 말은 정말 정확한 말이다.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을 되살려 모아 통찰하는 일은 많은 에너지소모가 필요한, 일종의 ‘의지’를 필요로 하는 능동적인 활동인 것이다. 그 ‘의지’는 별다른 것이 아니다. 긴 시간의 고통 속에서도 목표를 포기하지 않는 것. 멀고 험한 길 속에서도 성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의지를 버리지 않는 것. 신(혹은 진리)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신(혹은 진리)에게로 향하는 길을 (혹은 증명하고자 하는 의지를) 멈추지 않는 것. 피할 수 없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트에 대한 사랑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는 것. 그 지난한 활동을 통해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점차 회복하게 된다. 회복된 우리는 이전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또한 마냥 행복으로 가득한 상태이지도 않다. 그러나 한결 더 충실해진 존재임은 분명하다.

가브리엘은 비로소 자기 안에 일종의 평화가 깃드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즐겁지는 않지만 고요한 힘이었다. 격렬한 고뇌가 물러난 자리로 조용한 슬픔이 서려 들었다. 번민에 지친 그에게 휴식을 주는 슬픔,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슬픔이었다. 누구도 빼앗아 가지 못할 슬픔, 언제나 그를 동행하게 될 슬픔이었다.


걷기만큼 우리의 생명력을 근본적으로 자극하는 활동이 또 있을까?



그 시각, 엘리자베트는 가브리엘 없는 삶의 행복, 소소한 행복들을 하루하루 빠짐없이 기록하며, 가브리엘 없는 삶의 행복함을 증명하고자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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