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mall talk Aug 09. 2020

12. 카마(Kama)

참고 : <카마 수트라(Kama Sutra)>

가브리엘 12세, 사랑의 돈 키호테는 기사서임을 준비한다.


1960년대 중반 프랑스의 돈 키호테, 가브리엘은 위대한 사랑의 모험을 헤쳐나갈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 (스페인의 돈 키호테와는 다르게) 더없이 현실적인 것들, 섹스와 돈과 정치같은 것들을 철저히 학습하고 준비한다. 가브리엘 곁에는 사랑의 조력자들, 아버지 가브리엘과 앤과 클라라가 있다. 그들은 구체적이고 노골적으로 가브리엘을 교육한다. 학습의 첫 과목은 단도직입, 섹스에 대한 것이다. (이번 글을 시작하는 데 시간이 한참 걸린 이유가 있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꼬.)


섹스와 같은 흥미로운 주제를 다룰 상상력이 부족한 나의 글은 여느 때처럼 자료조사로 시작한다. 아마존닷컴의 서적 카테고리에서 'sex money power'라는 키워드로 책을 검색하면 '강력하고 노골적인 섹시함'과 '종교적 경건함'이라는 두 종류의 상반된 이미지들로 첫 화면이 채워진다. 대체로 무시무시한 이미지들이 주를 이룬다. 성(性), 돈, 권력은 모두 생명의 기원 이래로 추구되어 온 강력한 삶의 요소들인 만큼 책들은 아주 많았다. 하지만 내가 필요로 하는 책은 찾지 못했다. 즐거운 성관계를 위한 체위와 도구들에 대한 사전적 혹은 교육적인 기록들은 이미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에릭 오르세나는 <섹스를 논하는 대목>에서 쾌락을 위한 방중술을 단도직입적으로 (하지만 간접적으로) 논하였다. 부끄러움, 붉어진 낯빛 같은 것들도 언급하긴 하였으나 집요하고 대담한 앤과 클라라는 가브리엘의 쾌락(과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 구체적인 포인트들을 하나하나 짚어준다. (이 대목은 단호한 교육적 어조로 끝맺어지지 않고 페이드아웃(fade out)으로 마무리된다.) 내가 짐짓 먼 산을 보며 성적 쾌락에 대한 고차원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들을 한다면 이 글들을 쓰는 목적에서 벗어나게 된다. 대신 앤과 클라라의 페이드아웃된 대화를 이어받아 쾌락을 위한 애무와 체위같은 것들을 논한다면 나는 여러 면에서 곤란해지고 말 것이다. 덫에 걸린 기분이 든다. 


이 대목을 빠트리고 지나기는 것은 불가하다. 이런 대목들이야말로 <오래오래>의 가치이자 매력포인트인 것이다. 


정공법(正攻法). 체위 하면 일단 <카마 수트라(Kama sutra)> 아닌가. <카마 수트라>가 긴 시간을 살아남아 재창조되어 읽혀지는 고전(古典)이라는 사실은 참 다행스럽다. 체면 손상될 걱정 없이 읽어볼 수 있으니. 관절이 유연해야만 가능한 체위가 가득하여 부끄러움 반, 헛웃음 반으로 읽게 될 것 같은 책. 들어만 봤지 읽어볼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던 책. 하지만 막상 책은 (남자의 힘과 여자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가장 큰 쾌락을 선사해준다는 체위에 대한 내용이 아니더라도) 조금 놀랍고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해 대략이라도 알게 된다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카마 수트라>는 계획이 다 있었다. 


Wikipedia: Kama sutra, Vatsyayayan, commentary, sample ii, Sanskrit, Devanagari.jpg


힌두 전통에는 인생의 네 가지 중요한 목표(Purusharthas)에 대한 개념이 존재한다고 한다. Dharma(우주 존재의 질서, 의무, 법, 덕성 등을 의미), Artha(삶의 수단, 활동과 자원 등을 의미), Kama(소망, 욕망, 열정, 감정, 감각적 쾌락, 삶의 미학적 즐거움, 애정, 사랑 등을 의미), Moksha(해방, 자아인식, 각성, 삶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짐을 의미)가 그것이며, <카마 수트라>는 그 중 카마(Kama)에 대한 이야기(Sutra)로 일종의 욕망의 안내서(guide manual)인 셈이다. (다른 삶의 목표들도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긴 하지만 지금은 Kama만으로도 벅차니 언급만 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카마 수트라>는 일상의 다양한 애정 상황들에 대처하는 방법들이 자세히 실려 있는데 하나하나가 꽤 재미있다. 대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느낀 점은 <카마 수트라>는 특정한 집단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카마 수트라>에는 유부녀를 유혹하는 방법과 처녀를 유혹하는 방법이 달라야 함을 명시하고, 구체적인 행동의 예시들을 적어두었다. 또한 유부녀를 유혹함에 목숨이 달아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적고 있으며, 유부녀가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이유들을 백과사전식으로 나열함과 동시에 자신의 부인이 다른 남자에게 유혹당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도 자세히 적고 있다. 또한 <카마 수트라>는 남자들이 읽도록 쓴 책이지만 관계를 맺는 여성의 경험, 성격적 특징, 특히 여성의 반응을 자세히 살펴 행동하도록 누누이 이야기한다. 당시 인도의 일부다처제 특성상 남편 한 명이 여러 명의 부인을 공평하게 만족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하지만 가급적 공평하게 만족시켜야 한다고 권하고 있다) 피치 못하게 외로워진 여성들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들도 알려준다. 이 책은 성생활에 있어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도덕교육서가 아니라 (당대의 사회적인 법규와 관습 안에서) 나와 타인, 남성과 여성 모두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실질적인 지침서란 뜻이다. 


체위나 유부녀 유혹법 같은 내용은 일단 제쳐두자. 나에게는 <카마 수트라>라는 쾌락(Kama)을 다루는 책에서 애정관계에 연루된 다양한 이해관계의 사람들 각각의 관점을 모두 반영하고 존중하여 쾌락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방법을 논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특징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쾌락은 공유되는 것으로, 단순히 개인간의 문제로 치부되거나 배타적이거나 비밀스럽지 않다. <카마 수트라> 안에서는 쾌락에 대한 관계유형들이 자연수의 가짓수로 꼽아지며 사뭇 통계적인 방식으로 다뤄진다. <오래오래>에서 가브리엘과 엘리자베트의 사랑은 <카마 수트라>적 쾌락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면 오히려 단순명료한 고대의 진리(특히 쾌락에 대한 진리)에 고차원적이고 현대적으로 접근한 하나의 사례로 여겨질 수 있다. 기독교적 성(性) 인식과 부르주아적 결혼관이 주종을 이루기 이전, 그보다 훨씬 훨씬 이전 고대 인도에서의 애정과 쾌락에 대한 인식은 지금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고 다채롭다. 


1891년 영역된 카마수트라의 표지. 1960년대까지도 출판이 불법이었다고 한다. 


직접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긴 곤란하지만 <오래오래>가 <카마 수트라>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혹은 두 책이 서로 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이 몇 군데 있다. 앤과 클라라가 '귀를 잘근잘근 깨물어 주느냐'고 묻는 대목(愛咬), 엘리자베트가 파리식물원에서 있었던 가브리엘과의 첫 운우지정을 회상하면서 '지리적 탐사를 좋아하는 자신의 취향'을 운운하는 대목 등이 그것이다. <카마 수트라>의 특정 문구를 떠올리며 엘리자베트의 회상을 다시 읽어보면 조금 헛기침이 나거나 얼굴이 붉어질수도 있겠다. (이 이상 더 자세히 쓰기는 매우 곤란하다.)


교보문고의 댓글리뷰들은 나의 의견과 많이 다른 편이다. 사실 오래오래에 대한 서평들도 나와는 다른 입장들이었다.


알랭 드 보통이 운영하는 '인생학교'라는 단체에서 성생활과 관련된 책이 출간된 것이 있다. <섹스: 섹스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는 법>이라는 책이다. 읽으면서 알랭 드 보통이 직접 쓴 책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어 실망했고, 몇몇 내용들에 대해서는 더 실망을 하고 말았다. 기본적인 내용들은 나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것들과 상관없이 이 책이 취하고 있는 일종의 가르치는 자세(?), 무엇은 옳고 무엇은 틀리다고 자주 단언하는 어조가 마음에 거슬린다. 또한 이 책이 추구하는 바는 분명 '마음의 평온'인데, 사람 각각의 생물학적 차이를 감안한다면 이 목표는 현실적이지도 않으며(지나치게 이론적이다) 단조롭다. 이 책에서도 불륜을 잠시 다룬다. 하지만 읽고 있노라면... '대체 어쩌라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고 만다. (이 책의 관계자 여러분, 정말 미안합니다.) "그러므로 한쪽이 어쩌다 실수한다면 다른 쪽은 분노를 터뜨릴 것이 아니라, 그동안 두 사람이 성실함과 평온함을 잘 지켜온 것에 대해 (그 가능성이 지극히 희박하므로) 어정쩡하게 놀라는 편을 택해야 할 것"이다라는 문장은 이 책 자체의 어정쩡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문장이라고 여겨진다. (읽는 순간 내 마음이 잠깐 분노와 내적 반박으로 다채로워졌었다.) 그 외, 섹스가 끝나고 난 후 우울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 그것이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문장은 <카마 수트라>에서 성관계 후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두 사람이 함께 가볍게 과일 등을 먹으며 발코니에서 달빛을 감상하며 행복을 만끽하라는 내용과 대조된다. 좀 더 알아볼 부분이다. (한 가지 재미있었던 부분은 좀 더 엄중하고 비관적인 결혼서약을 하라는 부분이지만 여기서 더 논하진 않겠다.) 


잔혹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가득한 알함브라의 정원


가브리엘은 이후에도 엘리자베트를 기다리며 다른 사람과 함께 Kama에 대해 실습할 기회를 가지곤 했으며, 앤과 클라라를 만나 함께 논하며 앤과 클라라의 즐거움, 자신의 즐거움, 함께한 여성들의 즐거움, 이후 엘리자베트의 즐거움에 기여하였다. 

이전 12화 11. 기다림의 기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