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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all talk Jul 10. 2020

11. 기다림의 기술

소요(逍遙)의 즐거움

나 기다려 줄 수 있어요?


가브리엘은 기다린다. 사실 엘리자베트는 가브리엘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떠났고, 가브리엘에게 다른 수는 없다. 몇 시간 정도만 더 기다리면, 수개월 동안 계획하고 소망해왔던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가브리엘의 기다림은 강렬한 '고통과 흥분'의 시간이다. 이에 자칭 기다림의 전문가 가브리엘은 고통과 흥분을 잠시라도 잊고 지루하지도 않게 여자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러 방법 중 네 가지를 소개한다. 유용할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즐거움까지 누릴 수 있는 방법이어서 여기에 소개하고, 나아가 다른 방법들도 탐구 및 고찰해보고자 한다.



1. 여자를 생각하지 않기 위해 앙드레 말로, 가브리엘의 경우 특히 반(反)회고록을 활용한다.

반(反)회고록은 제목은 흥미로웠으나 굳이 찾아 읽어 (흥미롭지 않음을) 확인해보지는 않았다. 먼저 훑어본 가브리엘이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다른 수가 없다면 나는 앙드레 말로 말고 요즘 갑자기 관심이 생긴 (그리고 역시 여자 이야기는 없을 것 같은) 윈스턴 처칠의 회고록을 읽어보고 싶다.



2. 포도주로 시간을 용해시킨다.

가브리엘은 불라우안이라는 13.5도짜리 모로코산 회색 포도주를 활용하였다. 연달아 두 잔을 마시자 에틸 알코올의 비특이적 중추신경 억제효과로 가브리엘은 도취감과 비현실적 자신감의 상승을 경험한다. '술을 한 모금 한 모금 목구멍으로 넘길 때마다 세상이 점점 즐겁고 만만하고 우호적인 것으로 느껴졌다'고 적은 부분이 이를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또한 가브리엘은 비판적인 사고기능이 약화되어 '여자들은 만나기로 약속했으면 늦더라도 꼭 오게 마련'이라며 그들의 선한 의도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에릭 오르세나는 알코올에 대해 의학서적이라도 들춰 보고 이 대목을 쓴 것일까?)


하지만 가브리엘의 높아진 자신감과는 다르게, 현실에서는 알코올에 의해 정신적, 신체적 반응이 둔화되어 정확한 인지 감각 운동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반드시 주의해야 할 부분인데, 다행히 가브리엘은 두 잔의 포도주에서 멈추고 더 마시지 않는다. 알코올 분해능력이 뛰어나 빠르게 해독되어 정신을 차렸거나, 본래 뇌의 비판기능이 아주 건강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술기운에 취해서는 계획을 제대로 수행할 수도 없으며, 엘리자베트의 아름다움을 인지하는 데 환각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도, 엘리자베트는 술에 취해 만날 대상이 아니라는 것도, 가브리엘은 잘 알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엘리자베트의 아름다움은 맨정신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으므로 포도주가 주는 환각은 '순전한 낭비'라고 한 표현은 다소 불충분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알코올은 순간의 즐거움을 증폭(환각)시킬 수는 있으나 사물(혹은 인물: 엘리자베트의 경이로움)의 정확한 인지를 방해하며, 운동의 속도와 정확도를 현저하게 떨어뜨린다. 특히 학습능력, 즉 기억의 형성에도 큰 지장을 주기 때문에 아름다운 계획을 실현하여 장기기억을 반드시 형성해야 하는 가브리엘의 현 상황에서는 과도한 알코올은 매우 부적합하다. '낭비'라는 표현은 알코올의 부작용을 전혀 내포하지 않는 표현이다. 알코올은 '손해'가 될 수 있다. 경고. 지나친 음주는 云云云. (그렇다. 나는 술을 못한다.)



3. 북아프리카 요리 쿠스쿠스를 활용하여 민족학적 사색이며 철학, 요리 등에 대한 사색을 이어간다.

가브리엘과 그를 창조한 에릭 오르세나는 지적 방랑벽 또한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쿠스쿠스요리에서 시작된 가브리엘의 자유연상은 전 세계를 넘나들고 분야를 막론한다. 지나치게 경계를 넘어다닌 탓인지, 가브리엘은 (프랑스에 적개심이 아직 상당히 남아있을) 알제리 출신 식당 주인의 심기를 자유연상만으로 거스르고 만다.


조금 생뚱하지만 이 대목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에릭 오르세나가 '알제리 해방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고 적었다는 점이다. 알제리 전쟁은 1954년 시작되어 1962년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할 때까지 복잡하고 격렬하게 전개되었으며, 알제리(독립전쟁으로 인식)와 프랑스(식민지 반란 진압작전으로 인식)는 각각 싸움의 성격을 매우 다르게 인식해 왔다. 알제리 독립 후 35년이 지나 프랑스의 정권이 사회당으로 바뀌고서야 프랑스는 이 싸움이 전쟁이었음을(1999년), 파리 학살(1961년)이 있었음을(2001년) 인정한다. (알제리는 아직 1962년 오랑 학살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가브리엘과 엘리자베트가 만난 시기가 대략 1965년 쯤인 것을 감안(하고 에릭 오르세나는 <오래오래>를 1998년에 출판하였음을 모른 척)하면 '알제리 해방 전쟁'이라는 표현은 가브리엘(과 에릭 오르세나)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선구적인 단어라고 가정해 볼 수 있다. <오래오래> 중간중간 언급되는 옛 프랑스 식민지령, 에릭 오르세나의 <L'Exposition coloniale(식민지전시회)> 같은 것들은 프랑스인으로서 에릭 오르세나가 옛 식민지들을 소재로 다룰 때 어떤 태도와 방식을 취하고 있는지 궁금하게 하였는데, 이 '알제리 해방 전쟁'이라는 단어가 하나의 실마리가 되어준 것 같다. (제발 원본 프랑스어가 같은 뜻의 단어이길...)


나의 이야기가 샛길로 빠진 것 같이 보이지만, 가브리엘이 쿠스쿠스 요리를 활용하여 보여준 기다림의 기술은 정확히 내가 부린 기술(샛길로 빠지기)과 동일한 것이다.



4. 기다리고 있는 여자(혹은 남자)에 대한 세부기억들을 적극적으로 회상한다.

가장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고를 요하며, 그만큼 고급 기술이라고 여겨지는 부분이다. 순수한 뇌의 작용(회상)을 통해 신체의 자율신경적 변화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당연히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그리 쉽지 않다. 눈에 어린 장난기, 입술의 갖가지 가능성과 같은 안면부에 대한 대략적인 인상 파악은 어렵지 않겠지만(안면 인식은 아주 중요한 뇌기능 중 하나이다), 젖가슴의 윤곽, 무릎의 점, 넓적다리 등을 한두번의 만남에 신체반응이 일어날 정도로 구체적으로 기억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울 것 같다. 강렬한 인상(impression), 지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필히 훌륭한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기술일 것이다.



그 외, 확실히 올 사람(나의 경우엔 R)을 기다리는 몇 가지 쉽고 즐거운 방법을 덧붙여보고자 한다.


+ 집밥 준비하기

이 기술은 가브리엘이 훗날 벨기에의 '사랑의 조계(租界)'에서 1년간 지낼 때 엘리자베트가 퇴근하기를 기다리며 사용한 방법이기도 하다.


1~2시간 정도 기다려야 하고 체력에 여유도 있어 막 지은 따뜻한 밥을 해 줄 수 있을 땐, 국이며 반찬을 R이 좋아하는 것들로 만들어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소고기무국, 모시조개국 같은 것들은 끓여주면 항상 좋아하는 메뉴들이다.


다시마, 양파, 파, 마른새우, 때로는 마른멸치나 황태채 같은 것들을 넣고 끓여 육수를 낸다. 그 동안 반찬삼을 야채들을 손질한다. (나는 R이 야채를 가급적 많이 먹을 수 있도록 애쓰는 편이다.) R은 초록풀잎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방울양배추나 당근, 감자 같은 것들은 잘 먹는다. 오븐을 예열하며 야채들을 다듬고 당근과 감자는 따로 삶아 익혀둔다. 준비한 야채들을 버터, 올리브유, 소금, 후추로 버무려 팬에 고루 깔아 오븐에 넣는다. 앞으로 한 30분 정도면 야채오븐구이는 완성될 것이다. 그 동안 손질한 국재료를 순서대로 넣어 맛있게 우러나길 기다린다. 밑반찬도 하나 둘 꺼내고, 후식거리까지 준비하면 오븐요리도 국도 다 완성되고 (나의 잔소리로 제 때 출발한) R이 집에 돌아온다. 메뉴들은 사실 매우 소소하지만 신선한 재료들이고 막 뜨겁게 완성된 음식들이라 맛있게 저녁을 먹는다.



+ 서점 떠돌아다니기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골라 읽는 것도 좋지만, R에게 들려줄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서점을 돌아다니는 것도 즐겁게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R은 유쾌한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김훈 작가님의 <개: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최근엔 카렐 차페크의 <정원가의 열두 달>, 엘레인 페인스테인의 <뿌쉬낀 평전>, 츠쯔젠의 <어얼구나 강의 오른쪽> 같은 책들을 읽어 들려주며 함께 즐거워했던 것들이 생각난다.) 서점에는 그 외에도 R과 함게 해 먹고 싶은 메뉴가 적힌 요리책, R의 사진을 남길때 참고할 수 있는 사진집, R과 나의 연결고리였던 보르헤스, 밀란 쿤데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같은 사람들의 책들이 있다.



+ 쇼핑하기

R은 시각적 동물이다. 알록달록한 것들을 좋아한다. 나는 그에 반해 어릴 적부터 줄기차게 패션 센스에 대해 지적을 받아온 사람으로,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나의 취향과 상관없이 간혹 R에게 재미있는 인상을 주고 싶을 때, 작지만 눈에 띄는 것들을 찾아 이리저리 쏘다니며 쇼핑을 해본다. 작은 귀고리들, 붉은 립스틱들('R은 보라색 립스틱이 어떻겠냐고 했었었지...'), 알록달록한 색의 치마 같은 것들을 R이 좋아할까, 재미있어할까, 좀 놀라려나, 따져보며 시간을 보낸다.



+ 한의학 서적 활용하기

한의학 서적들, 특히 어느 정도 확장적인 사고를 허용해주는 고서(古書)들을 훑어본다. (전자파일이 많아 휴대하기가 좋다.) 책을 읽으며 R의 순환, 오장육부의 넘치고 부족함, 성정(性情)과 피로, 혈압 혈당의 추이, 대변, 소변, 방귀 같은 것들에 대해 따져본다. 대변은 항상 충분한 양을 예쁘게 보는지, 소변은 시원하고 충분한지 화장실에 들고 날 때마다 캐묻는다. 이제는 나이를 존중해야 하는 시기이므로, 혈관이며 치아며 관절이며를 어떻게 관리해야 좋을지 계획을 세워본다. R의 부모님과 여동생 남동생의 건강문제들까지 다 종합하여 R의 상태를 파악하는데 참고한다. 여러 처방들의 구성을 훑어 따져보며 내가 놓친 것들이 혹시나 있는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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