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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all talk Jun 04. 2020

10. 사랑의 구상

가브리엘의 선물

가브리엘 부자가 모의(謀議)를 한다. 가브리엘의 열정에 엘리자베트가 감동하여 그의 사랑을 받아들인다고 가정하고서, 그녀를 대체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오래오래> 지속되어야 할 사랑의 첫 포석을 놓는 일이다. 가브리엘과 엘리자베트가 첫 정을 나누는 곳은 어디가 마땅할까. 조롱과 범속의 흔적이 가득한 호텔방은 절대 불가하다. 타인과의 공모를 전제로 하는 친구의 아파트도 바람직하지 않다. 빈 집을 빌리는 일은 여자를 구속하려 한다는 암시, 혹은 과거의 다른 여인에 대한 암시, 또 혹은 쾌락만을 추구한다는 암시를 줄 수 있기에 역시 적절치 않다.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것이 되어야' 할 가브리엘과 엘리자베트의 열정에 적합한 장소는 어디가 가장 좋을까.


가브리엘은 파리식물원, 그 중에서도 어둠과 자신의 옛 시절 열정어린 기억이 가득한 고산식물정원으로 마음을 정하고 그녀에게 줄 선물을 꼼꼼하게 계획한다. 이름하여 '고산식물정원 작전'.


고마워요. 소설 같네요.


파리식물원에 입장하여 철문을 닫은 순간, 여느 사랑의 작전처럼 가브리엘의 작전도 변수와 우연에 휘말린다. 사실 그 변수와 우연 덕에 이 장면이 더 흥미진진하고 아름다웠다고 볼 수 있다. 가브리엘의 초대에 고마움을 표하는 엘리자베트의 말로 시작하여 새벽을 맞아 엘리자베트가 갑자기 떠나기까지 전체적인 장면장면을 숨죽여 천천히 읽어나가다 보면 다양한 감각들을 (환상적인 와인의 향과 맛을 묘사하는 글들처럼) 복합적이고 극적(기승전결 형식)으로 느낄 수 있다. 문장들은 추상적이면서 동시에 물질적(신체감각적) 암시가 가득하여, 에릭 오르세나가 의도한 대로 매우 복잡하고 입체적인 맛이 난다. 장면의 초입, '초목의 향기와 축축한 흙의 냄새를 품은 공기'가 가득한 어두운 식물원에서 말없이 걷는 동안, 두 사람의 '막연히 느끼던 욕망'이 '분명한 실체'로 변해간다. 이 실체는 단순한 성적 욕망을 현실화시키는 것 이상으로, 두 사람의 '미래를 규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두 사람의 욕망은 순간의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의 욕망에는 '미래'의 관계가 내포되어 있다. 엘리자베트와 가브리엘은 이미 전설적인 사랑을 할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다.



유칼립투스(에우칼립투스 구니이)에 기대어 엘리자베트가 가브리엘을 부른다. 뒤죽박죽이 된 작전 속에서 엘리자베트가 먼저 실체화된 욕망을 드러낸 것이다. 작전의 주도권은 사실 엘리자베트에게 있었다.


아버지 가브리엘의 조언은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유용했다. 엘리자베트의 불안감과 성급함, 가브리엘의 (이러한 종류의 사랑에 있어서의)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 가브리엘의 조언(특히, 한 번으로 끝내지 말고 반드시 두 번을 하되 두 번째에는 되도록 천천히 해야 한다는 조언) 덕이었다. (실제로 엘리자베트는 이 작전 속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가브리엘에게 알려준다.) 더하여 작전의 질(質)을 결정한 조언들에 있어 그 내용이 매우 중요하며 타의 귀감이 되므로 간단히 요약을 해 두고자 한다.


가브리엘이 사랑에 빠진 엘리자베트는 여왕과(科)가 분명하며, 그런 여자을 붙들어 둘 수 있으려면 반드시 세계를 선물로 주어야 한다.

비(非)물질적이지만 실재하는 어떤 것, 그래서 영원토록 남게 될 어떤 것, 이를테면 꿈이나 은근한 연대의식 같은 것을 그녀의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앉혀야 한다.  


이 조언을 적극 반영하여 가브리엘은 엘리자베트를 파리식물원 안의 고산식물정원으로 데려간다. 이 정원은 세계의 축소판이며, 가브리엘의 역사, 열정, 정체성 자체이다. 고산식물정원은 아주 완벽한 선물이었다. 훗날 엘리자베트가 고산식물정원에서의 기억을 회상하며 가브리엘이 자신의 '지리적 탐사'를 좋아하는 취향을 간파하고 만족시켜 주었던 점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문장은 분명 신체적 쾌감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가브리엘이 선물한 '고산식물정원'에서의 세계의 기억이 그녀의 무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또한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히말라야자작나무 아래. 세계(의 축소판)를 탐사한 엘리자베트는 지쳐 앉아 한기에 부르르 떤다. 아버지의 조언을 충실히 따르던 가브리엘은 엘리자베트의 한기를 달래주다가 다만 '추상화와 상징화의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엘리자베트와 다시 사랑을 나눈다. 한참이 지나 '창백한 새벽빛이 불그스름한 밤하늘에 섞여들자' 이성을 되찾은 엘리자베트는 작전을 끝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작전의 주도권은 엘리자베트에게 있다.) 가브리엘은 찬 공기 속에서 얼어붙어 아무런 말도 몸짓도 하지 못하고, 엘리자베트는 가볍고 단호하게 떠난다.

 

나에겐 내 삶이 있어요. 당신, 이해하죠? 그럼 이만.




나도 엘리자베트처럼 선물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내 기억엔 아쉬움과 엉성함, 쓰라림만이 가득하다. (역시 내가 잘못한 일이다.)


발써 15년 전, 한의대 본과 2학년 2학기를 마치고 방학에 들어간 첫 날이었던 것 같다. 겨울...의 기억이 난다. J는 나를 위해 여행을 계획해주었다. 새벽에 집앞으로 데리러 온 J의 차에 타서야 들은 목적지는 강릉이었다. 최단거리로 계산했을 때 왕복 700km 정도의 여정이었으나 J는 오로지 나를 위해 당일치기의 일정을 계획했다.


출발하여 점점 밝아지는 날 J의 세밀한 계획 아래 우리는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달렸다. 날은 좋았고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도 상쾌하였으며, 낯선 국도 주변의 풍광은 아름다웠고,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J는 길가의 풍광조차도 계획하여 경로를 정하였다고 했다. 가는 길 동안 J는 우리가 달리는 길과 도시와 지나쳐가는 산과 강에 대한 설명을 끊임없이 해 주었다.


강릉에 가기까지 서너번 멈추었던 것 같다. 아주 외딴 곳의 작은 식당, 등산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던 한 작은 휴게소, 그리고 한 강자락이 기억난다. 강자락에 닿을 무렵엔 해가 지고 있었다. 역시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J는 각 장소에 도달하는 시간 또한 예상하여 계획하였다고 했다. 노을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칠 법한 그런 곳이었다. J의 취향과 개인적인 기억이 담긴 곳이었던 것 같다. 인적은 드물었고, 강변은 추운 계절에 노랗게 마른 풀들이 가득했으며, 노랗고 붉은 빛의 기억이 난다. 우리는 특별한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고 한동안 그 곳에서 시간을 보내었다. J는 그 장소를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다시 길을 달려 강릉에 도착했다. 도착할 무렵 J는 7번 국도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J는 그 번호를 고유의 이름처럼 사용했다. 나는 국도를 번호로 기억하는 사람을 이 때 처음 보았다. J는 우리나라의 길 중 이 7번 국도를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아름다운 길이었다. 많이 캄캄해지고 있었지만 아직 남은 푸른 하늘에 멀리 닿은 바다가 보였다. J에게 어울리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J는 낭만적이었고, 천성으로 방랑벽이 있었으며, 성급한 편이었고, 그 성급함을 다스리기 위해 매우 큰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었다.


느즈막한 시간, 경포대에 갔다. 물이 빠지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J의 전체적인 계획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어두워지자 마음에 염려가 생겨 조금 초조했다. 캄캄한 해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우리 말고 다른 한 커플이 멀리 있을 뿐이었다. 조용한 바닷가에는 파도 소리만 가득했고 하늘에는 보름달이 오르기 시작했다. (J는 이 보름달마저 계획에 두었다고 했다.) 물가에 잠깐 갔다가 물러나와 모래 사장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들이 이제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J는 송강 정철이 성격은 지랄맞아도 틀린 말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이 경포대에 있다는 다섯 개의 달 이야기였다. 송강 정철을 옆집 아저씨하듯 말하며 송강이 경포대에 달이 다섯 개 있다고 했는데 맞춰볼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하늘에 있는 것 하나, 바다에 비친 것 하나까지는 쉽게 맞추고 술잔에 비친 달까지는 겨우 맞췄는데, 나머지는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무식을 타박받으며 들은 나머지 답 중 하나는 경포호에 비친 달이었고, 한참 뜸을 들이다가 알려준 마지막은 사랑하는 사람 눈동자에 뜬 달이었다.


당시 난 물정 모르는 스물 셋이었다. 나는 학과 공부에 파묻혀 살았다. 분하게 여기곤 하던, 나름의 현실적인 사정이 있었다. 나는 본질적으로는 아빠를 닮아 (<로드 짐>에서 논의된 성격의) 로맨틱한 사람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엄마를 닮아 현실의 가혹함에 대해 겁이 많은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와 달리 J는 나이도, 다닌 학교의 수도, 읽은 책도, 아는 한자도, 사랑했던 경험도 나보다 훨씬 더 많았다. J는 거침없으면서도 한없이 섬세했다. J의 선물은 나에게 전례가 없을만큼 로맨틱한 것이었고, 그것은 J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엘리자베트처럼 준비된 사람이 아니었다. J는 나에게 과분했다. 나는 J의 선물을 만끽하지도, J의 열정과 사랑을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나는 미래에 벌어질 일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당연히 주도할 능력도 없었다. 나는 다섯번째 달 이야기를 듣고서 어색함을 감추려 애써 가볍게 웃어 넘기고 말았다.


경포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350km를 J는 거의 쉬지도 않고 달렸다. 나를 너무 늦지 않게 집에 데려다 주고자 함이었다. J는 엄청난 골초였으나 그 날은 나를 위해 단 한 개비의 담배도 입에 물지 않았다. 나는 무식에 가까울 정도로 무심하여 금단이 얼마나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힘든 일인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J는 종종 말이 없어지며 눈빛과 손짓에 초조함이 서리곤 했는데, 그것이 담배 한 개비로 편해질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아주 늦게서야 알았다.



나는 J의 로맨틱한 열정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사실 자격도 없었다.) J는 첫눈이 오는 날 꽃다발을 준비하여 나를 기다렸으나, 나는 아무 생각없이 학과 일정이 끝나자마자 집에 가버려 J를 크게 실망시켰다. 이후로도 나는 여러 번 J를 실망시켰고, J는 끝까지 나를 존중하여 나를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이후 J는 급한 결혼을 하였고 부인 된 사람 외에 다른 여자도 한 명 더 만났다고 하였다. 여행을 다녀온 지 1년쯤 지나 잠깐 나눴던 통화에서 J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고 하였다. (나는 그마저도 무심히 넘겼다.) 그리고 다가온 봄 어느 날 J는 잘못된 계산으로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하였고, 나는 사흘을 심하게 울었다. 운동신경이 대단히 좋았던 J는 당시 심한 스트레스 환경에서 반사적으로 움직였던 것 같다. 그 때 J가 담배 한 개비만 피울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J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쓸모 없는 생각들이 지금까지도 맴돈다.




이 기억을 끄집어내기가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그 당시 찍었던 사진과 동영상들을 모두 지워버린 지금 (J는 분명 모두 지우기를 원했을 것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나는 조금 후회가 되어, 남은 기억을 짜내어 글로 남겨보았다. 며칠 동안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좀 더 성숙했다면 이야기가 좀 더 달라질 수 있었을까, 나와 J의 낭만적인 실존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여러 가정들을 반복적으로 상정하여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당시의 우리의 나이와 경험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모두 실패하리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의 시대에는 더 이상 J와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가브리엘의 '고산식물정원 작전'의 성공이 나의 실패와 대조되어 기억이 더 쓰라리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내가 <오래오래>의 가브리엘과 엘리자베트를 집중하여 관찰하는 것은 환상에 살고자 함이 아니라 실존하고자 함이다. 나는 이 이야기가 성공적인 낭만적 실존의 실마리를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에릭 오르세나는 성공했을까?


더하여, 우리의 필연적인 실패에 상관없이 나는 J에게 매우 미안한 마음이 든다. 사과를 전할 길이 없어 한없이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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