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 정원을 뜯어보기
기사서임을 준비하는 가브리엘 12세, 사랑의 돈 키호테는 돈이 필요하다. 여왕 엘리자베트에 대한 사랑을 <오래오래>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충분한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사업적 수완이 뛰어난 앤은 가브리엘을 찾아와 앞으로 감당해야 할 계산서들에 대해 직설적으로 조언한다. 정곡을 찔린 가브리엘은 속된 이야기 말라며 짐짓 불편해하지만, 복잡한 삶에는 비용이 많이 소요됨을 인정하며 앤의 뜻에 곧 동조한다.
가브리엘, 자기 꿈을 믿는 사람에게는 현실이 무엇보다 중요한 법이야.
가브리엘은 앤이 빌려준 수표는 돌려보냈으나 사업을 베르사유로 이전해보라는 조언은 진지하게 검토한다. 앤은 사실 사업성을 고려하여 정원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았던 루이 14세를 상품화해보라는 뜻으로 베르사유를 권한 것이었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브루스 채트윈(Bruce Chatwin)이라는 영국 작가가 '단언컨대 모든 진리는 길 위에 있다'고 했다면서, '진정한 정원애호가'들이 다니는 길목에 가게를 열고 그들의 '송라인'에 귀를 기울이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식의 속편한 이야기를 늘어놓고서는 나름의 조사차 베르사유로 향한다.
베르사유에서 진정한 정원애호가들과 관광객들을 비교, 분석하고 그 중 미국인 노부부 한 커플(관광객이면서 동시에 진정한 정원애호가에 해당하는 한 표본(sample)이다)을 골라 베르사유 정원 이후의 행로를 따라가 본 가브리엘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모든 정원은 하나의 역사이다. 정원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역사를 사랑한다.
가브리엘은 이 조사를 통해 마음을 굳힌다. 정원애호가들을 겨냥하여 가게를 낸다면 루이16세에서 프랑스대혁명으로 이어지는 길의 가장자리가 가장 좋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브리엘은 베르사유에서 새로운 조경회사를 연다. 박식함과 야망이 배어있다는 새로운 회사의 상호는 '라 캥티니 조경회사, 풍경창조'이다. (나를 비롯하여)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은 그 이름을 듣고도 박식함이며 야망이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라 캥... 뭐라고?
이 대목을 처음 읽을 때엔 그저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을 모티브로 삼아 '순수한 사랑에는 돈 문제 같은 속된 것들을 개입시킬 수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좋게 돌려 깨부숴주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가지 나의 발목을 잡은 의문점과 난점들이 있었다.
앤은 베르사유에서 정원에 관심이 많았다는 루이 14세를 상품화하라 제안했는데 가브리엘은 최종적으로 루이 16세에서 프랑스 대혁명으로 넘어가는 시간과 공간의 상징으로서 베르사유를 낙점한 것.
에릭 오르세나가 따로 한 권의 소설을 썼을 만큼(<André Le Nôtre>) 중히 다루었던 르 노트르를 스치듯 언급하고 말았을 뿐 아니라 베르사유의 정원에 대한 찬탄 같은 것은 일절 없었다는 것.
베르사유의 정원을 설계한 천재적인 르 노트르는 제쳐두고 회사 이름으로 '라 캥티니'라는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의 이름을 사용하여 여러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것.
나는 베르사유에 가 본 적이 없다는 것. 베르사유며 프랑스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것.
의문들을 조금이라도 해소할 수 있을까 싶어 <The Gardener of Versailles>와 <A History of the Gardens of Versailles> 라는 두 권의 책을 읽어보았다. (사실 첫 번째 책은 'Gardener'라는 단어를 'Garden'으로 착각하여 베르사유 정원의 멋진 사진들을 볼 수 있으리라 여기고 실수로 고른 책이었다.) 두 번째 책은 제목부터 내가 궁금한 딱 바로 그 내용을 다루겠다고 웅변하고 있었고, 책을 받고 보니 미국의 landscape architecture 관련 학회에서 학술적인 목적으로 엮은 책인지라 베르사유 정원에 대한 역사와 문화정치적 배경을 자세히 다루고 있었다. 함께 더 읽고 싶었던 라 캥티니(Jean-Baptiste De La Quintinie)의 삶을 설명하는 책들은 (적어도 영어판본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라 캥티니가 정원에 대해 저술한 책의 영역본이 있었으나 아마존에서는 한달이 지나도 배송이 시작되지 않아 포기하고 말았다.
두 권의 책을 읽고 난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베르사유에 대해 그 동안 주입받은 '사치와 향락'이라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이미지를 버리고 좀 더 복합적인 역사의 긴 단락으로서 베르사유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으며 르 노트르와 라 캥티니, 그리고 루이 14세의 성격을 조금이나마 입체적으로 재구성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에릭 오르세나가 가브리엘을 통해 자신의 취향과 가브리엘의 취향, 그리고 근현대의 프랑스가 베르사유를 어떤 역사적 이정표로서 바라보고 있는지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정원은 하나의 역사이며 진정한 정원애호가들은 역사를 사랑한다'는 가브리엘의 귀납적 결론은 '지나치게 작은 크기의 표본(단 한 개의 표본)으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했던 것이 사실이다. 정원이라는 것에 개인적 만족 이상의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작가양반의 사심 아닌가요? 이런 내 의문에 가브리엘 대신 대답이라도 해 주겠다는 듯이 <A History of the Gardens of Versailles>는 정원 자체가 가지는 역사성, 역사에 정원이 기여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로 Introduction을 시작한다. 베르사유의 정원은 계절과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transition)함으로써 베르사유 궁성(château)이 긴 시간, 격변의 역사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근본적인 탄력성 혹은 유연성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또한 베르사유 정원에는 정원을 창조한 루이 14세 전후로 300여 년 동안 변화해온 인문학적, 문화예술적 스타일들이 충돌없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고 한다). 즉 정원은 역사적 사건들의 배경이자 그 산물이며, 현재의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되살펴볼 수 있는 역사의 흔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원은 그 곳을 거닐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과 공명(resonance)하며 세계(시간과 공간, 자연과 세계의 반영으로서의 정원)에 대한 어떤 근원적이고 공통적인 감각을 체험하게 만든다. 시대를 뛰어넘어 작동하는 이러한 체험은 정원이 우리를 역사와 이어주는 독특하고 독보적인 방식이다. 루이 14세가 궁성을 등지고 서서 정원을 가로질러 지평선의 끝을 바라볼 때, 르 노트르가 자신이 설계한 작은 숲들(bosquets)을 산책할 때,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의 오두막(Queen's Hamlet, Petit Trianon)을 영국식 정원으로 가꾸고 소꿉놀이를 즐길 때, 프랑스 대혁명으로 베르사유에 입성한 시민군들이 정원에 들어왔을 때, 1차 세계대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을 맺으러 연합국의 여러 원수들이 찾아왔을 때, 정원이 그들의 마음에 작동한 방식은 지금의 우리들이 그 곳에서 경험할 수 있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정원을 통해 과거의 사람들과 공명할 수 있는 동시에 각 개인의 경험과 시대적 배경에 따라 다양한 감정적 변주를 체험할 수 있다. 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장황하고 지루한 설명이 아니더라도 정원의 역사성에 대한 가브리엘의 주장을 쉽게, 그리고 좀 더 적극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일 수 있다.
현재의 베르사유를 만들어 낸 루이 14세는 매우 흥미롭고 입체적인 인물이었다. 스스로를 태양신 아폴론에 비하여 태양왕이라 칭할 만큼 야심과 정복욕이 대단했고, 말 그대로 맨 땅이었던 베르사유에서 왕권중심주의를 성공적으로 일궈낼 정도로 정치감각이 뛰어났다. 화려함과 웅장함을 선호하였고(baroque period) 그다지 학구적이거나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이지는 않았으며 그림과 조각, 춤 같은 일반 예술분야에 조예가 깊은 편이었다. 그런데 그런 프랑스의 왕이 풀과 나무와 물과 흙으로 조형을 이뤄내는 '정원'이라는 분야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다니! (게다가 맹트농 부인에 최종적으로 정착하다니!!) 전쟁터에서도 정원을 걱정하는 루이 14세의 편지라니 이 남자는 대체 어떤 인물일까? 베르사유 정원의 풍경과 조망, 산책로와 작은 숲들에서 루이 14세는 어떤 것들을 얻고 경험하고자 했을까? 정원은 일견 야심가의 공간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남달랐다. 베르사유 정원의 사진이나 그림들을 가만히 보면서 그 공간들과 빛의 움직임, 지평선으로 끌려가는 시선, 그리고 사람들에게 정원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자랑하고 더 나은 설계를 고민하는 루이 14세를 상상하다 보면 그에게 정원이란 유년기의 기억과 연관된 안정감 이상으로 루이 14세 개인의 영광, 더 나아가 프랑스의 영광과 같은 선상의 문제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루이 14세의 야심어린 정원을 구체적으로 실현시켜 준 사람은 앙드레 르 노트르(André Le Nôtre)였다. 르 노트르는 정원 디자인에 대한 천재성을 인정받고 귀족의 지위까지 오르는 등 큰 성공을 누렸다. 베르사유 정원 외에도 르 노트르가 설계했다는 볼르비콩트(Vaux-le-Vicomte)의 정원 등의 사진을 보면 거대한 규모, 멀리 지평선을 향하는 트인 시야, 인공적인 수로나 연못, 기하학적 구성 등, 르 노트르식의 정원양식이라 할 만한 것들이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루이 14세의 정원 사랑이 의아했던 것처럼, 르 노트르의 성품 또한 의아하다. 르 노트르는 겸손하고 소박함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루이 14세의 야심을 그렇게나 잘 이해하고 정원에 웅장함(grandeur)을 구현해 준 사람이 겸손하고 소박했다고? 그의 성품이 드러나는 이야기들이 몇 가지 있다. 볼르비콩트를 르 노트르에게 맡겨 그를 성공의 길로 이끈 푸케가 후일 내란음모죄로 평생 갇혀 살게 되었을 때 루이 14세의 분노를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방문하여 친분을 유지한 일화, 르 노트르가 귀족의 지위를 받을 때 자신의 문장(紋章, coat of arms)으로 세 마리의 달팽이의 도안을 사용한 것 등이 그것이다. 르 노트르는 자신에게 주어진 지위와 명예를 존중하되 결코 그 자신을 앞에 내세우지 않았다. (문장 디자인이 몇 가지 있어 가장 정확한 출처를 찾기가 힘들었다. 공식 문서에 등록되어 있다는 아래 도안은 프랑스어로 된 한 블로그에서 인용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Bosquet des Sources(Small forest of the Spring)에 대한 르 노트르의 글에 (루이 14세의 취향이 아닌) 그 자신의 취향과 정원에 대한 애정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그 글의 일부를 거칠게 번역해보았다.
이 장소(Bosquet des Sources)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이곳의 청량함(coolness)은 숙녀들이 일하고 놀이를 즐기고 음식을 먹기 좋으며, 건물(apartment)과 같은 높이에서 이 숲으로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건물에서는 또다른 아름다움, 즉 전체 정원의 여러 다른 길(allées), 작은 숲들(bosquets), 울창한 숲(woods)을 숨어 즐길 수 있다. 이 정원은 튈르리(Tuileries)와 더불어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답고 매우 걷기 쉬운 정원이다. 다른 곳들이 더 아름답고 웅장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곳이야말로 가장 쉬운 장소(the easiest)이다.
I concede that others may have more beauty and grandeur,
but this is the easiest.
루이 14세는 왕권을 과시하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압도하기 위해 대규모의 정원을 구상했고, 없는 물줄기를 정원으로 끌어오려 끊임없이 시도했으며, 옛 신화의 주인공들을 조각으로 세우고, 분수설비 등을 설치했다. 고객의 요구에 응하여 르 노트르 또한 기하학과 광학, 당대 풍경화의 원근감 처리기법, 명암 처리기법 등을 동원하여 멀리 지평선까지 닿는 시선(long perspective)을 더 극적으로 만들어내고 엄청난 규모의 정원을 구성하였다. 하지만 르 노트르의 실질적인 애정과 열정은 bosquets(작은 숲들, 총림)에 향해졌다. 르 노트르와 루이 14세의 차이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넓은 산책로나 테라스, 드넓은 화단, 대운하 등의 웅장한 구조물들은 신과 같은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드는 효과를 만들어내는 반면, bosquets은 소주제를 가진 '열린 정원 안의 닫힌 정원'으로 매우 사적이고 친밀한 공간을 형성한다. bosquets은 르 노트르의 글처럼 웅장함이 아니라 쉬움, 편안함을 제공함으로써 다양한 모양으로 베르사유 정원에 평범한 일상의 개성을 더한다. bosquets은 나무들로 둘러싸여 닫혀 있지만, 오히려 모두의 시선에 노출되는 열린 공간(open space)인 테라스나 대로들보다도 더 숨통이 트이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트인 시야와 웅장한 규모 면에서) 유사한 다른 프랑스 정원들과 베르사유 정원이 달라지는 지점에 이 bosquets이 있다. (가브리엘이 베르사유에서 관찰한 '진정한 정원 애호가들'이 지나치게 거대한 규모에 싫증을 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작은 숲들, 즉 일부 bosquets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들어가고 싶어 안달하였다고 하였으니. bosquets에 출입이 가능했다면, 그리고 지금은 사라졌다는 르 노트르의 소박한(rustic) 스타일의 bosquets들이 남아있었다면, '진정한 정원 애호가들'은 여러 작은 숲에서 기꺼이 길을 잃고 헤매느라 베르사유를 벗어나려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A History of the Gardens of Versailles>의 저자들은 이 bosquets이야말로 르 노트르의 큰 업적이자 베르사유 프로젝트의 핵심이며 그의 천재성을 가장 잘 드러낸 설계라고 설명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기하학적으로 구성되는 '형태(form)' 만으로는 완성되지 않고 거기에 '맥락(syntax)'이 결합되어 의미가 부여되어야 하는데, 르 노트르가 bosquets을 성공적으로 조화시켜 베르사유 정원에 그러한 syntax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베르사유에 bosquets을 조성한 것은 르 노트르에게 일종의 모험과도 같은 것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과학의 발달을 경험하며 극단적인 기하학적 명확성(rigorous geometric clarity)을 추구하던 당대의 지식층에서 요구하는 바와 bosquets이라는 공간이 표현하는 시적(詩的) 내밀함(poetic intimacy), 감정적 접근방식(sentiment)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르 노트르 스스로 정원 조성의 대원칙처럼 여긴 시각적 '통일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그 둘의 조화를 이루어내기는 매우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르 노트르는 성공했고,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물론 국가 재정의 파탄이 우려될 정도로 돈이 쏟아부어졌기에 가능했던 성공이기도 했다.)
현 베르사유 정원의 'master gardener'라는 <The Gardener of versailles>의 저자 Alain Baraton은, 자신은 르 노트르에게서 천재성의 흔적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며 대담한 폄하를 적어두었다. 르 노트르의 시도들은 전대에 개발된 기법들을 규모만 키워 활용했으며, 남은 평생에 걸쳐 더 진화되지 못하고 동일한 기법들을 진부하게 반복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일반인은 얼굴을 붉히겠으나, 귀족의 지위에 올라 대대손손 사용할 문장(coat of arms)으로 달팽이를 그려 쓰는 르 노트르라면 웃고 넘어가겠지.) 바로크식 정원의 웅장함, 르 노트르가 여러 정원에서 반복적으로 표현했다는 지평선에 가닿는 긴 축(long axis), 대칭적인 공간구성, 그리고 통일성 같은 것들은 현 베르사유의 'master gardener'님 말씀대로 르 노트르 선대부터 이미 시도된 기법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선대 정원사들의 작품들, 그 선대 정원사들과 르 노트르에 지대한 영향을 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정원들, 르 노트르의 초기 작품인 볼르비콩트 정원의 이미지들을 한데 두고 살펴보다보면 베르사유 정원은 한 차원 다른 정서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물론 정원 조성에 소요된 비용 차이가 드러나는 것일수도 있다. 대운하(Grand Canal)와 분수등을 조성하여 물의 고요한 반영(反映)과 흐름의 역동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점도 그런 느낌의 차이에 일조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A History of the Gardens of Versailles>의 저자들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강조하는 '완전히 열린 시야(completely open perspective)'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큰 중심축(Great Central Axis)을 좇아 무한한 공간을 연상시키는 지평선으로 눈이 향하면 곧 자연스럽게 풍경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이끌어져 베르사유 정원이 주변의 시골풍광이며 자연 자체와 자연스럽게 섞여들어간다는 것이다.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베르사유 정원을 찍은 사진이 아닌 궁성(château)을 등지고 중심축을 따라 지평선을 내다보는 풍광을 찍은 사진을 보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책의 마지막 장 쯤에 그 사진이 한 장 첨부되어 있는데, 흑백의 사진만으로도 그 의미가 온전하게 전달이 된다. 르 노트르가 시선을 이끌어 보여준 풍광은 베르사유가 세상의 전체가 아니라 그저 전체의 일부라는 점(르 노트르가 구현하고자 했던 통일성)을 환기시키며 우리 또한 무한한 세상 속의 작은 일부로서 일종의 경건한 겸허함이 마음에 가득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르 노트르가 선대의 기술을 자신의 것처럼 도용했다거나, 그가 실질적으로 창조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거나, 그에게 큰 명예를 준 기법들을 진부하게 답습했다고 평하는 것은 그와 베르사유에 대한 몰이해와 무관심에서 비롯한 것이다. (물론 르 노트르가 자신의 이해와 성정을 글로 남긴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 오해일수도 있다. 하지만 후대에 말과 글로 무언가를 남기려는 욕망 자체가 르 노트르에게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르 노트르는 선배 정원사들인 Boyceau나 Mansart의 지식, 당대 Caravaggio나 Poussin과 같은 이들의 예술, 아버지와 할아버지게 중요하게 여긴 규칙들을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였으며, 자신의 욕망이나 능력을 앞세우지 않았다. 또한 편안함과 쉬운, 내밀하고 사적인 일상의 아름다움을 깊이 사랑하였으나 왕과 귀족들을 비롯하여 바로크 시대의 권력의 중심과 당대 지식의 흐름이 요구하는 바와 그것들이 가지는 의미를 놓치지도 않았다. 르 노트르는 여러 다양한 요소들을 오차 없는 정확성과 철저함으로 제어하여 웅장하면서도 내밀함이 살아있는 베르사유라는 역사적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성공해 낸 사람이다.
베르사유는 당시 사람들이 신(神)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하며 세계를 이해하게 된 새로운 방식, 학문의 발달, 예술적 흐름, 그리고 루이 14세의 집권 초기 재정확보능력 및 인재활용능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만들어진 공간이다. 가브리엘과 에릭 오르세나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지리학, 항해술, 국경의 개념, 측량기법, 원예학 같은 것들이 바로 루이 14세 때 왕실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으며 발전하고 빛난 분야들이었다. 이러한 학문분야들의 발달은 당시 바로크 시대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무한한 공간(immense space)에 대한 인지를 가능하게 한 동력원이자 그 인지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무역과 군대의 발달과 연관되어 훗날 (루이 14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한) 프랑스 대혁명의 동력원이자 혁명 전후로 권력의 중심이 되는 자본가계급(부르주아)의 성장을 이끌게 된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은 '편재되지 않은 자본'에 대한 개념을 전제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가브리엘이 루이 16세에서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지는 길목의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은 것은 역사인식과 현실감각이 다각도로 반영된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두 책을 모두 읽는데 한 달이 걸렸다. 글을 쓰는데는 이 주가 걸렸다. 그 동안 (아마존에서는 구매에 실패했던) 라 캥티니의 정원관리에 대한 책의 영역본을 알라딘(aladin.co.kr)을 통해 구했다. 왕의 채원을 담당했던 라 캥티니는 조경가에 가까웠던 르 노트르에 비해 식물에 대한 개인적 애정이 흘러넘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르 노트르 대신 라 캥티니를 선택한 가브리엘과 현 베르사유의 수석정원사도 그 친근함에 마음이 움직인 게 아닐까. 나중에 라 캥티니에 대해 다뤄볼 기회와 능력이 생긴다면 좋겠다.
라 캥티니의 대략까지 읽고 나면 가브리엘의 사무실 작명이 이상하다. '라 캥티니, 풍경창조'라니. 라 캥티니는 풍경이 아니라 나무와 식물이 자라고 열매맺는 것에 관심이 많았고, 풍경을 창조한 사람은 앙드레 르 노트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