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
가브리엘, 여전히 날 기다리고 있어요?
만약 당신이 그렇다고 대답하면, 우리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 되는 거예요. 요즘에는 사랑의 감정 따위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없잖아요. 앙드레 말로나 장폴 사르트르가 쓴 글들을 봐요. 어디에도 사랑 이야기라고 할 만한 것은 나오지 않아요…… 가브리엘, 나도 당신만큼이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어요. 내가 아는 건 단 한 가지예요. 만약 당신이 그렇다고 말하면, 우리 관계는 이제 영원히 지속되는 거예요. 내가 너무 수다스럽죠? 걱정하지 마요. 늘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니까요.
엘리자베트의 영원에 대한 도전과 같은 선언은 가브리엘이 ‘그렇다’, 그러니까 여전히 엘리자베트를 기다리고 있다고 응답해야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할 것이다. 시대는 변하여, 더 이상 사랑의 감정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요즘은 무엇이든 fantasy가 현실에 비해 우세한 시절인데, fantasy의 사랑은 나의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게. 아주 옛날에는 이데아(IDEA)가 우세한 시절도 있었는데.) 영원한 사랑을 논하는 사람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 된다. 희귀할수록 그 가치가 높아지는 법이니, 엘리자베트와 가브리엘의 도전이 성공한다면 그들의 사랑은 전설이 될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니체의 초인은 엘리자베트와 가브리엘 같은 사람들이었다. 삶에 있어 역경과 고난은 ‘신(神)이 죽었다’는 개념 따위로 야기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역경과 고난은 삶 자체가 ’현실‘이기 때문에 존재한다. 신이 있든 없든. 니체의 선언 이후로는 이제 나를 돕거나 구원해 줄 신은 없다. 삶의 목적은 더 이상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니힐리즘은 중요한 문제이지만 여기서는 논외.)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영원에 도달할 것인가. 수많은 현실의 역경과 고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오래오래>는 엘리자베트와 가브리엘이 영원에 도달하는 이야기이다. 그 길에는 사실 고난과 역경만 있는 것은 아니고 행복과 쾌락도 있으나, 현실의 어른이라면 행복과 쾌락이 그저 찰나의 것이 되기가 얼마나 쉬운지,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 되기 얼마나 어려운지 금방 이해할 것이다.
나는 엘리자베트-가브리엘 커플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영원을 꿈꾸고 전략을 세우고 행동하고 있다. 하지만 그 길이 어찌나 외롭고 쉽지 않은지. 나는 말 그대로, 정말 literally,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는다. 나는 요즘 종종 용기를 잃는다. 그리고 내가 꿈꾸는 ‘영원’한 가치를 이루지 못하고 내 삶이 끝나도 괜찮다고 슬쩍 목표를 수정하기도 한다. 진인사(盡人事)가 나의 할 일의 전부이고, 나머지는 천명(天命)에 맡겨야지. 그 정도면 충분하지. 하지만 목표를 수정하는 것은 비겁할 뿐 아니라 전략적으로도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목표를 낮추는 것만으로도, 이루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성공 확률이 낮아질 것 같다. 기필코! 반드시! 가급적?! 이루어 내리라.
엘리자베트-가브리엘 커플의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서 용기를 얻는다. 현실의 굴곡에 대해 모의학습을 하듯, 그들의 여정을 읽는다. 오늘은 그들의 영원에 대한 도전, 선언을 다시 읽으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노라 대답했다.
그 대답이 폭풍 속에서 활공하는 갈매기의 울음소리처럼 오랫동안 내 귓속에서 진동했다.
“가브리엘, 당신은 시간의 친구죠, 안 그래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작은 보트에 올라서 있는 것처럼 발밑의 바닥이 흔들리고 있었다.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해요. 당신은 식물을 다루는 사람이니까. 날씨와 세월을 벗하며 사는 사람이니까.”
“날씨와 세월은 형제죠.”
“앞으로 내게 가르쳐 줘요. 시간이 바로 우리가 머물 집이 될 테니까요. 우리는 세월 속에 거주해야 돼요. 그럼, 이만 끊을게요. 세상에,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