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애를 키워도 될까
결혼한 지 만 3년이 지나고 4년 차를 맞이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적극적인 DINK를 추구한 건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임신이 미뤄진 것은 직장의 영향이 컸다. 결혼하고 5개월 만에 내가 해외에서 근무하게 된 것. 다행히 멀지 않은 국가라서 한국에 종종 올 수 있긴 했지만 아이를 가진다는 건 무리였다. 아내는 워커홀릭은 아니지만 직장생활을 하며 경제활동을 하길 원했고, 결정적으로 나보다 연봉이 높았다! 둘 다 결혼 전까지 학교 앞 동네에서 자취한 덕에 8년간 CC로 연애하면서 떨어져 지낸 적이 거의 없는데 오히려 결혼하고 나서 2년을 떨어져 살게 되었다는 이런 아이러니. 그래서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열심히 놀고 여행 다니기 바빴다. 특히 연애 중에는 양가에 눈치 보여서 가지 못한 해외여행을 열심히 다녔다.
약 2년에 걸친 해외근무가 끝나고 한국으로 복귀했다. 이젠 아이를 가지는 것에 대한 결정을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나부터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나는 정말 아이를 가지고 싶은가? 아이를 키울 준비가 되어있는가?
어린 시절에는 막연하게 당연히 아이가 함께인 가족을 꿈꿨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직장을 다니며 경제생활을 하고 여러 가지 현실을 겪으면서 구체적인 고민이 많이 생겼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갖기 주저하는 여러 요인들, 나도 비슷한 이유로 망설였다. 결혼을 결심할 때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배우자는 책임질 대상이기도 하지만 든든한 지원군이기도 하고 내 아내는 아주 훌륭한 여자였기에 이 결혼은 정말 남는 장사였다. 하지만 아이는 내가 오로지 책임질 것만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둘이서 지내는 신혼이 정말 좋았기에 딱히 변화를 원치 않았다.
아이를 가질 결심은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나왔다. 내가 기억이 있는 시점부터 지금까지 부모님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랑을 주셨다. 부모 자식 관계에서 갈등과 상처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걸 의심한 적이 없는 시간을 함께했다. 그리고 부모님은 나와 형 때문에 행복하다는 말씀을 정말 많이 했다. 그 말이 새롭게 다가왔다. 아무리 봐도 난 딱히 효도란 걸 한 적이 없는데(말썽도 별로 없었지만) 왜 나 때문에 행복하시다는 걸까. 자식과 함께하는 삶에 뭐가 있길래. 그게 궁금해서, 나 같은 자식 낳아서 살아보고 싶어서, 결심했다. 아이를 가지기로.
이제 공은 아내에게 넘어왔다. 임신과 육아는 여자의 희생이 훨씬 많으므로 내가 원한다고 강요할 순 없다. 아내의 동의와 결정이 필요했다.
아내는 3남매의 장녀로 살면서 형제들과 우애가 좋았다. 여기서 우애가 좋다는 건, 아주 각별하고 살가운 관계라기보단 적당히 투닥거리고 부대끼며 살았던 어린 시절을 지나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의 존재를 긍정하고 돕고 의지하는 관계다. 아내는 결혼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지만 (프러포즈를 한 번 까였다...) 결혼하고 나서는 아이와 함께 가족을 이루는 거에 거부감이 없었다. 아마도 우애가 좋은 형제들이 아이를 가지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아내도 아이를 가지기로 쉽게 결정하진 못했다. 아이를 가지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많은 희생 때문이었다. 아내는 어디에서나 유능한 사람이었고 본인 일에도 욕심이 있었기에 커리어를 크게 손해 보는 결심을 하는 건 쉽지 않았다. 아이 vs 커리어, 이 내적 갈등에 돌파구를 가져다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내의 직장이었다. 직장생활 n년차를 맞이한 아내는 일종의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대부분의 회사가 그러하듯이, 아내의 회사도 열정적인 한 직원에게는 무겁고 답답한 곳이었고 아내는 뭔가 변화가 필요했다. 여기에서 내가 제안한 삶의 변화와 돌파구가 아이를 가지는 것이었다. 쉰다기보다는 다른 세상에서 견문을 넓히고 직장생활도 돌아보는 시간을 갖자고, 귀중한 경험과 함께. 아내는 조금 고민하더니 내 제안을 수용했다. 몸에 부담이 덜하도록 더 늦기 전에 아이를 가지자고.
이렇게 우리는 아이를 가지기로 했다. 하지만 이제 출발선에 섰구나 싶었던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출발선에 서러 갈 길이 아직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