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은 성가셔
아이를 싫어했다.
좀 더 설명하자면,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싫어한다. 그게 무엇이든. 그러니 말을 섞을 수조차 없는 아이와 동물 같은 경우는 애초에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것이다. 주변에 어린 동생이 없이 살다 보니 아이를 만나는 건 명절 같은 연례행사뿐이었고 명절의 사촌동생들은 시끄럽고 귀찮기만 한 존재였다. 다행히 아이를 좋아하고 아이도 좋아하는 우리 형이 아이들을 몰고 다녔고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거나 어른들과 약주를 했다.
아이란 건 대체로 나를 성가시게 하는 존재였다. 대부분의 공공시설에서 맞닥뜨리는 (모르는 사람의) 아이는 나를 불편하게 했고(정확히는, 아이로 인해 불편했던 것만 기억에 남았다. 애초에 아이에게 관심이 전혀 없으므로.) 나는 주저 없이 부모에게 아이를 제지하라고 요구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영화관, 기차, 버스 같이 자리가 정해진 경우에 성가신 아이가 근처에 있으면 아주 괴로웠고 가끔은 아이 부모와 언쟁을 하기도 했다. 애 싫어한다고 대놓고 얘기한 탓에 지인들에게 면박도 당하고 그랬다.
이렇듯 아이는 내 인생에 전혀 자리가 없었다. 몇 년 전까지는.
아이에 대한 생각이 변하기 시작한 건 가까운 사람들의 아이 때문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는 싫어했지만 말이 통하고 같이 지내는 게 즐거운 사람들을 아주 좋아했다. 운이 좋게도 학창 시절에 그런 벗들을 많이 만나고 즐겁게 교류했다. 졸업하고 시간이 지나 나도 그들도 각자 결혼을 하고 그중에서는 아이가 태어났다. 신기한 게, 가까운 사람의 아이는 이뻐 보이더라. 그 아이가 뭘 해도 성가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아이를 좋아하나 싶었다. 사람들은 니 아이가 태어나면 훨씬 더 이쁠 것이라고 했다.
아이가 이뻐 보인다와 아이를 갖고 싶다는 또 다른 영역이었다. 나와 아내는 대학에서 동아리 선후배로 만나 8년을 연애하고 결혼했다. 우리가 결혼을 한 이유는 공인된 관계로 같이 살고 싶어서, 함께 생활하는 데 있는 여러 가지 제약을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만났다 헤어져 각자 집으로 갈 필요도 없고 여행을 가든 뭘 하든 눈치 볼 필요가 없으니까.(신혼여행이 첫 해외여행이었다.) 보통은 결혼을 통해 각자의 집안에 매이게 된다는데 우리는 양가가 모두 먼 지방이라(전남과 경남의 아름다운 동서 결합!) 그 걱정이 훨씬 덜했다. 이를테면 자유를 더 갖기 위해 결혼했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면, 맘 편히 같이 놀고 싶어서 결혼했다.
임신과 육아는 이런 우리의 결혼 목적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주변에서 임신과 육아를 하는 모습을 보면 삶의 자유가 줄어드는 건 명약관화였다. 그래서 우린 완전한 딩크(DINK) 까지는 아니더라도 당분간은 연애의 연장선에서 둘이 열심히 신혼을 즐기기로 했다.
인생에서 가장 신나게 보낸 3년이 지났다. 늦게 결혼한 탓에 둘 다 삼십 대 중반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우린 이제 아이를 가지는 것에 대해 진지한 고민과 결단이 필요했다.
아이를 가져야 할까? 언제 가져야 할까? 어떻게 키워야 할까? 우리는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