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전쟁 영웅과 내향성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유능한 장군이라면 어쩐지 무예와 싸움에 능하고, 호탕한 남성적인 에너지가 떠오른다. 물론 튼튼한 신체와 운동 능력 같은 것은 장수에게 중요한 자질임에 틀림없다. 이순신 장군도 어린 시절 전쟁놀이를 좋아했고, 활쏘기와 무예에 능했다.
지혜와 믿음의 상징 다윗이 힘의 상징 골리앗을 물리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말콤 글래드웰은『다윗과 골리앗』에서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 규칙을 지적한다. 골리앗의 대결 방식은 일대일 싸움으로 절대적인 힘과 경험이 유리하다. 다윗은 힘도, 경험도, 무기나 갑옷조차 없었다. 다윗은 골리앗의 방식이 자신에게 승산이 없을 걸 알고 그 자리에서 싸움의 규칙을 전환한다. ‘다가와 싸우자’는 골리앗의 요구를 무시하고, 조약돌 몇 개를 주워 ‘거리를 두고’ 섰다. 다윗은 양을 치는 목동이다. 수 해 동안 돌 던지기로 맹수들의 공격에서 양을 보호해왔다. 매일매일의 일상에서 맹수의 급소를 노려 적중시키는 훈련을 했다. 골리앗의 ‘호탕한’ 기선에 응하는 대신 정확히 골리앗의 급소를 향해 돌을 던졌고, 돌은 골리앗의 급소를 가격해 단번에 무너뜨렸다.
전쟁에서 힘과 물자의 우위는 매우 중요하지만 다윗처럼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큰 승리를 거둔 일은 역사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불가능을 이룬 듯이 보이지만 이 불가능한 승리 뒤에는 다윗처럼 승리를 필연으로 만든 우수한 전략이 있었다. 전략 수립은 힘, 호탕한 기세, 인적 네트워크와는 거리가 멀다. 상대와 나를 분석하고 관찰하는 과정이 핵심이다.
그렇다면 전략적인 사고는 외향적인 사람에게 유리할까? 내향적인 사람에게 유리할까? 너무나 간단하게 숙고하고 사색하는 내향적인 인물이라는 답을 낼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전쟁을 자신의 규칙으로 바꾸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이순신 장군은 군사를 호령하고, 엄하게 군율을 세우고, 무예를 닦고, 인적 네트워크를 키우는 ‘외형적’인 행보에도 충실했다. 그러나 난중일기를 살펴보면 군인의 외적인 측면 못지않게 내적인 부분에도 만전을 기했음을 알 수 있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의 일상은 지루하리만치 일상적이다.
(1592년 2월 15일)
비바람이 크게 불었다. 동헌으로 나갔다. 공무를 처리했다. 새로 쌓은 포갱이 많이 허물어졌기에 석수 등을 벌주었다. 다시 쌓게 했다.
(1592년 2월 19일)
맑았다. 순시를 떠났다. 백야곶의 감목관에게 도착했더니, 승평(순천) 부백(부사 권준)이 그의 동생을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도에 도착했더니 영주(흥양) 쉬(현감 배홍립)와 여도 권관(김인영)이 나와서 맞이했다. 방어 준비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점검했다.
(1592년 2월 22일)
아침에 공무를 처리한 뒤 녹도로 갔다. 황숙도도 같이 갔다. 먼저 흥양 전선소(전선을 건조하는 곳)에 도착했다. 직접 배와 배에 필요한 물건들을 점검했다….. 만호(정운)가 온 정성을 다한 것이 모든 곳에 있었다.
(1592년 2월 27일)
아침에 점검을 마쳤다. 점심을 먹은 뒤, 북봉에 올랐다. 형세를 자세히 살피고 둘러보았더니 외롭고 위태롭게 단절된 섬이다. 모든 방향에서 적을 맞을 수 있었다. 성과 못 또한 아주 엉망이었다 걱정이다, 걱정이다.
매일의 날씨와 조류를 살핀다, 관할 지역을 방문해 군사와 물자를 살핀다, 높은 곳에서 지형지물을 분석한다, 적의 움직임, 목적을 곰곰이 생각했다, 하루하루를 기록하며 그 날을 되돌아본다. 객관적이다. 차분하다. 일상이나 전쟁에서 ‘대박’을 노리는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저 전쟁이라는 상황에 맞춰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임진왜란에서 이순신 장군은 조선의 본토로 물자를 수송하려는 왜의 수송선을 제압했다. 전쟁에서 수송은 절대적이다. 물자를 원활하게 보급하지 못하면 전쟁은 불가능하다. 이순신 장군은 왜의 물자 보급선을 괴멸시킴으로써 조선을 침략하고 명으로 올라가려는 왜의 계획을 무산시켰다.
이순신 장군이 활동한 바다는 남해안의 좁고 복잡한 해안이다. 왜의 안택선은 빠르게 상대에게 붙어 상대편 배에 올라가 일대일로 육박전을 벌이는 방식이다. 왜의 병사는 백 년간 전국 시대로 다져진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육군이다. 반면 조선의 판옥선은 느리고 크다. 거리를 두고 대포로 공격한다. 조선의 군사는 육박전보다 활쏘기에 능하다. 빠른 안택선과 백전노장의 무사를 상대로 큰 바다에 나가 일대일로 싸운다면 승리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순신 장군은 남해안의 좁고 복잡한 해안선을 따라 적을 유인하며 거리를 두고 활과 대포로 공격하는, 거북선과 우리 병사에 최적화된 전술을 펼쳤다.
왜는 이순신이 있는 한 전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재침을 하면서 이순신을 제거하는 작전부터 벌인다. 거짓 정보로 이순신을 부산 앞 큰 바다로 유인한다. 선조는 왜의 정보에 바로 꾀어 들어 이순신에게 출정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순신은 모든 정보들을 모아본 결과 앞뒤가 맞지 않다고 판단하고 왜와 나가 싸우라는 임금의 명령에 응하지 않는다. 그 결과 이순신 장군은 파직을 당해 겨우 사형 신세을 면한 대역 죄인이 되었다. 원균 장군이 이순신을 대신하여 출전했으나 칠천량 해전으로 우리나라 해전 역사상 기록에 남을 대패를 했다. 이순신 장군이 애써 키운 전함 130 척과 수군이 궤멸되었다. 이순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안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칠천량에서 도망친 배 13척과 겁에 질린 군사들, 통제사로 부임해 가는 길에 확보한 약간의 군량미와 물자가 이순신 장군은 130척이 넘는 배와 3만의 군사를 밀고 들어온 왜와 명량에서 다시 마주쳤다.
승리는? 놀랍게도 좁은 바닷길과 울돌목의 빠른 물살, 시간대를 활용한 다윗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순신 장군의 힘과 위력은 골리앗과 맞선 다윗의 조약돌 같은 것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게임의 규칙’을 머릿속에 완전히 그려두었고, 전투는 시나리오대로 실행에 옮겼다. 전투 전에 전쟁을 끝내고 나간다. 이순신의 영웅 신화 이면에는 이와 같이 숙고하고 분석하고 관찰하는 내향적인 힘이 담겨 있다.
해전사 연구가인 발라드(G. A. Ballard) 제독은 이순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한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 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정신인 불굴의 공격 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 정신을 겸비하고 있었다. 어떠한 전투에서도 이순신이 참가하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결정된 것과 같았다. 이순신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싸움이 벌어지면 강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는 점에 있어서는 넬슨(Nelson)과 공통된 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