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풋과 아웃풋의 상관관계는 물리적일 수도, 화학적일 수도 있다.
물리적인 변화는 양적이다. 단선적이다. 예측이 가능하다. 배추와 온갖 재료를 버무리면 겉절이가 된다. 겉절이의 맛은 재료들의 총합이다. 화학적인 변화는 질이다. 복합적이다. 직관적이지 않다. 똑같은 재료로 만들었는데 익어가면서 다른 맛을 내는 김치와 같다.
교육의 측면에서 인풋과 아웃풋을 떠올려보자.
교육적인 인풋은 물리적인 아웃풋일까, 화학적인 아웃풋일까?
학습의 의미는 ‘배우고+익히다’이다. 배움, “學”은 물리적이다. 교과서를 한 번 읽은 아이보다 백 번 읽은 아이가 시험을 잘 볼 확률이 높다. 익힘, “習”은 화학적이다. 교육학자가 자녀 교육을 더 잘 활 확률은? 글쎄다. 윤리 의식이 드높은 정치인들이 있다면 세상은 유토피아가 되었어야 마땅하다.
배움은 지식, 익힘은 실천! 하나를 배워도 실천하고 행하는 것이 학습의 요체이다. 학습은 배움만도 아니요, 익힘만도 아니요,
배움과 익힘의 두 축으로 굴러간다.
우리나라에서 자녀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은 지나치게 ‘지식’에 집중되어 있다. ‘문제집을 많이 풀어야 문제를 더 잘 푼다!’ ‘학원을 많이 다녀야 좋은 성적을 받는다!’ ‘아이들이 쉬는 시간은 버리는 시간!’ 이것은 익힘이 빠지고 배움에만 초점을 맞춘 생각이다. 유아 시절부터 유치원에서 학원으로 옮겨가며 제대로 된 여유 시간, 놀이 한번 못해보고 크는데도 “우리 아이는 너무 놀아서 탈” 이란다. 놀이의 종류, 시간, 친구를 모두 부모가 세팅한다. ‘아이가 게임만 좋아해요’, ‘아이가 하고 싶은 게 없어요’ 또한 당연한 물리적인 귀결이다. 교육을 바라보는 물리적인 관점은 쉬지 않고 공부하고, 더 어려서부터 시켜야 한다는 과열 양상을 낳았다.
익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효과가 없어 보인다. 매일 놀던 아이가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서 갑자기 공부하겠다며 짧은 기간에 1등을 하는 걸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문제아가 멘토를 만나고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아이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낮에는 아르바이트로, 집안일로 ‘불쌍한’ 흙수저가 자수성가하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몰입, 열정, 자율성, 삶의 의미, 봉사, 고통의 경험, 놀이 등 학습과는 전혀 무관한 요소들은 교육의 강력한 촉매가 되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교육의 화학적인 변화를 낳는다. 개천에서 용 나는 세상이 아닌 게 아니라 교육의 물리적인 효과에 치중한 부모의 교육, 양육 방식이 개천에서 용이 날래야 날 수가 없게 만든다.
내향적인 아이들은 물리적인 변화를 드러내는 데에 참으로 더디다. 열을 알려주면 하나도 모른다. 귀찮아, 몰라, 하기 싫어의 집합체이다. 표출이 없다. 그저 혼자 꼼지락꼼지락, 바라만 보기, 멍하니 있기.
‘인풋이 부족한가? 좋아, 더 많이 문제를 풀고 더 학원을 다녀보자.’ ‘이런 사회성으로 어찌 사누. 사회성이 부족하니 단체 스포츠, 스피치 학원에 다녀보자.’ 이런 ‘처방’조차 새로운 자극을 즐기고 내보이기를 좋아하는 외향적인 아이들에게 효과가 있지, 느리고 혼자 세계에 사는 내향적인 아이들에게는 별 효과가 없다. 익숙한 것을 즐기고, 표출을 싫어하는 이면에는 작은 하나도 완전히 이해하고 자기화시키려는 속성이 있다. 과도한 자극, 자기화할 시간의 부재, 아웃풋의 압박은 내향적인 아이들을 움츠러들게 할 뿐 ‘기대’한 효과를 내기 어렵게 만든다.
우리 내향적인 아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발효되고, 곰삭고, 숙성하고, 익어서 본래의 모습과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아이들이다. 늦되고 내향적인 아이들이 아웃풋이 상당히 떨어진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지금은 이 생각에 회의적이다. 나가고 들어오는 총량은 일정하다. 다만 어떤 형태로 나오느냐가 중요한 것이었다.
딸에게 물을 부어도 마른 샘처럼 물이 흐르지 않았다.
물이 ‘없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힘찬 지하수의 물길을 만들고 있었다.
야금야금 흡수하더니 남들과는 다른 것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같은 재료로 만들지만 겉절이와 익은 김치는 다르다. 겉절이는 원재료의 맛이 총합을 이룬다. 김치는 원재료의 맛이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켜 다른 맛을 만들어 낸다. 시간과 촉매제가 만나 발효하고 숙성한다.
딸아이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노력이 무위가 되는 것 같고, 가늠이 안돼서 답답했는데, 그 안에 깊고도 깊은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고 있었다. 이 세계는 이렇게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으로 발효되어 나타났다. '내향적이고 늦되기' 때문에 더 개발될 수 있었던 딸의 발효물들,
관찰의 힘, 어떤 편견과 선입견에도 좌우되지 않고 본 것 그대로를 표현하는 힘,
관심 주제에 대한 집중력, 몰입
강한 디테일, 남들이 놓친 것을 잡아내는 변별력,
사람과 동물에 대한 사랑, 배려….
이것이 딸아이에게 좋은 성적이나 좋은 대학을 가져다 줄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사회인으로 자립했을 때 자신감과 행동의 원동력이 되리라는 사실 하나만은 확실하다. 결국은 새삼스럽지만 심플한 결론만 남는다.
도대체 알아먹을 수 없는 아이의 세계를 인정해 주자. 환경이 바람직하다면 오래 발효될수록 더 깊은 맛을 낸다. 우리 늦된 아이들은 명품 발효 식품이 되어 가는 중이다.
믿어주자.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