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보기
느리고, 또 느리고,
관계에서 아웃 사이더로 머물러 있고,
현실에 대한 관심없이 자기 세계에만 빠져 있는 아이....
를 키우기는 쉽지 않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상처를 안겼나,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런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시달리게 된다.
잠못 이루는 나날들, 다른 학부모와 만나 나도 모르게 주눅들고 부끄러워하던 모습,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답답한 아이를 보며 믿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거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기는 쉽지 않다.
이런 생각들은 혼자의 세계에 빠져 세상과 다른 속도로 가는 아이는 '잘못'이라는 전제를 담고 있다.
기다리면 될 거라는 믿음조차 아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보다 언젠가는 바뀔 것이라는 왜곡된 기대를 내포하고 있다.
육아서 좀 읽었고, 내적 상처쯤 이해하는 '공부하는' 부모이니 '내가 나이스하게 바꿀 수 있다!'는 교만이 생겼다. 은밀히, 조심스럽게 '저 덜떨어진 성향을 바꿔보겠어!!!'하던 시도 뒤에 '네 성향은 잘못된 거라고!' '바뀌어야 한다고!' 라는 전제를 달고 있었다.
사람은 말과 행동만이 아니라 느낌과 에너지로도 뜻을 전달한다. 나는 완전 범죄를 꿈꾸며 아이 앞에서 웃으며 괜찮아. 괜찮아, 라고 되뇌였지만 아이는 나의 걱정과 불안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고, 바뀌기는 커녕 반작용으로 더욱 강하게 고착된 성향을 보였다.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 나의 고민과 불안은 최고조에 이른다. 선배 엄마들에게 이래도 되는 것인지 물었고, 밤마다 남편을 붙들고 외치고 토로했다.
답답하고 막막했지만 이 시간을 버티고 딛고 일어서게 해준 건
전문가도, 멘토도, 책도 아닌 바로 아이였다.
엄마의 절규에도 아랑곳 않고
자기의 세계를 무럭 무럭 키워 나가는 모습을
‘혹시’, ‘설마’ 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이거라도 잡고 가보자.
미래의 세계는 내 상식대로 흘러가지 않을거야.
이해할 수 없는 아이의 활동들이 모이고 모이면
언젠가 자기만의 세계가 되겠지.
꼭 성공하지는 않더라도 행복하게 자신의 인생을 이끌며 살아갈 수는 있을거라는 마음이 어렴풋하게 들었다. 사실 이런 마음이라도 없으면 버틸 수가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심어 준 딸아이의 재능의 단초들 몇 가지를 살펴보자.
서정적이고 사랑이 넘치고 아름다운 언어가 담긴 따뜻하고 동화책~~~~
을 읽어주면 좋다고 누가 그래.
자극적인 사건 전개없이 단순 반복적이고 서정적인 글은 한두 번 읽어주면 딱 치워버리라 한다.
달이 떴어요, 달님 안녕?
사과가 쿵! 토끼가 와서 먹어요 호랑이가 와서 먹어요~ 모두 배가 불러요 꺽~~~
이런 책? 관심도 없어.
나만 감동해. 나만 마음 따뜻해져. 아이는 관심도 없어. 흥미도 없어.
본격적으로 책을 좋아한 건 막장 드라마 뺨치게 선악이 분명한 고전, 명작 동화을 접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온갖 역경을 겪은 아름다운 여인이 왕자와 만나 ‘저와 결혼해 주시겠어요?’ 청혼하면 ‘네~’ 하고 뽀뽀하고 결혼하는 이야기. 열광을 했다. 기절하면 뽀뽀해서 깨우고 청혼하는 놀이가 몇 년이고 이어졌다. 사과 먹고 기절한 백설 공주, 물레에 찔려 잠든 오로라 공주가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아이는 ‘되도록 읽어주지 마세요~~~’ 라고 전문가들이 조언하는 명작 동화로 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 관심은 그림을 향한 사랑으로 발전했다. 아이는 글자 대신 철저하게 그림만 보았다. ‘동화책 표지를 보며 내용을 유추해 보세요’ ‘다음 이야기는 뭘까 함께 상상해 보세요’ ‘주인공의 감정을 물어보세요~~~’를 실천하는 순간 차라리 안들으면 안들었지 대답을 거부했다.
대신 한 페이지 읽어주면 그 페이지의 그림을 살펴본 후에야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신데렐라 책을 집어들면 그림의 배경, 신데렐라 드레스, 왕궁의 모습을 보았고, 다른 버전의 같은 책이 있으면 묘사 방식의 차이를 보았다.
나는 글자로만 세상을 잘 파악할 수 있다는 좁은 세계관에 갇혀 있는 사람이다. 그림은 글자를 보조하는 도구일뿐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딸을 통해 그림이나 영상이 글만큼이나 많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작을 영화로 만들었다고 그 원작과 영화를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책대로, 영화대로 매력이 다르다. 그림 동화도 마찬가지이다.
때로는 그림 자체가 만 가지 생각을 유발하는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또 하나의 이야기이다.
그림은 글을 보완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림 자체로 한 장르이다.
글자만 읽는지, 숙고하며 읽는지에 따라 독서의 수준이 달라지듯, 그림도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그림 감상의 차원이 높아진다. "문자 교육을 어려서부터 시작하면 아이의 감수성을 파괴할 수 있다”는 문자 교육 반대론자들의 주장을 나는 그림 인간 딸을 통해서 완벽하게 이해한 셈이다.
이미지에 집중하는 아이들은 한 페이지의 글보다 한 컷의 그림에서 더 많은 내용을 유추해 낸다. 그림에 담긴 작은 디테일에서 글의 미묘한 내용까지 포착하곤 한다.
문자나 언어에 소질이 있는 아이들은
문자 교육으로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지만,
내 딸같은 이미지 인간에게 섣부른 문자 교육은
오히려 예술성과 상상력을 해칠 수 있다.
그림책으로 관찰력 훈련을 한 그 시선으로 딸은 온갖 세계를 관찰한다. 베란다 화초에 어느 날 생긴 조그만 해충을 발견하는 것도 딸이다. 엄마가 보기에 똑같아 보이는 색도 어떻게 이걸 똑같다고 할 수 있냐며 따지고 든다. 왜 글을 그리 읽지 않느냐고, 따지기도 하고, 유도해 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는데 결국은 포기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둔 지금까지도 글자보다는 그림으로 생각을 표현하는 동화책과 만화책에 빠져 산다.
이미지 인간은 문자와 언어로 세상을 파악하지 않는다.
눈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편집장 미란다(메릴 스트립)가 두 개의 벨트를 들고 ‘이 옷에는 어떤 벨트를 착용할까’ 심각하게 고민한다. 그 모습을 보던 안드레아(앤 해서웨이 분)가 피식 웃는다. 미란다는 정색을 하며 안드레아를 질책한다. 안드레아는 ‘제가 보기에는 둘 다 같은 색으로 보여서요. 죄송해요, 지금 배우는 중이라서요’ 라고 답했다. 이 말에 미란다는 ‘네가 입은 파란색은 오스카 드 라 렌타가 발표한 셀룰리언 색이야. 그 후 몇 명의 디자이너가 그 색을 썼고, 그리고 백화점과 캐쥬얼 코너로 넘어갔어. 네가 그게 그거라고 생각한 그 색이 얼마나 많은 일자리와 재화를 창출했다는 게 우습지 않니?’라고 질책한다.
이미지 인간에게는 오렌지나 주황색이나 그게 그거인 색이 아니다. 동그라미나 타원이 그게 그거인 모양이 아니다. 문자 인간에게 ‘너는 예쁘다’와 ‘너도 예쁘다’가 완전히 다른 문장이듯 그림 인간에게는 작은 시각적인 차이가 태산과도 같은 차이를 자아내는 요소가 된다.
이미지 인간에게 글 좀 보라고 닥달을 하던 내가 얼마나 편협하고 우스웠는지…
딸아이는 누가 뭐라던 그저 스스로 끌리는 대로 했다. 글과 그림에 대한 내 편견이 딸아이를 바라 보는 시선을 가로막았을 뿐, 난독증이 아닐까 걱정할 정도로 글을 밀어내던 딸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딸이 그림에 대한 내 편견을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