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기
딸이 처음으로 펜을 쥐고 선 하나 긋기도 어려울 때는 이미 명작 동화가 보여주는 화려한 그림에 빠져든 후였다.
‘자 선을 그려보자’, ‘ ‘원을 그려보자’ 하면 따라 그릴 마음이 없다. 연필을 제대로 쥐지도 못하면서 동화책에서 본 화려한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 절망할 수 밖에.... 다른 일은 한두 번 해보고 안되면 바로 포기하는데 그림은 도저히 포기가 안되나보다. 울고 분노하기를 반복했다. 당돌함도 유분수지, 펜 잡은 지 몇 일이나 됬다고 공주를 예쁘게 못그린다고 저리도 화를 내.
그렇게 몇 달이 흐른 어느 날 드디어 본인의 마음에도 드는 공주 형상이 그려지자 이 때부터 고요한 그림 그리기 시절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공주 얼굴, 드레스, 왕관, 귀걸이 같은 요소들을 따로 따로 그리더니 날이 갈수록 객체의 그림이 이야기 그림으로 변해간다. 만화, 그림책, 영화처럼 이야기와 그림이 조합된 장르를 보며 이야기와 그림의 표출 방식을 유심히 관찰했고, 그걸 따라하며 그림을 발전시켜 나갔다.
전래 동화를 볼 때는 한복입은 인물 그림과 전래동화식 전개 방식을 그림에 적용한다. 바바파파를 읽을 때는 바바파파의 캐릭터들이 나와 이야기를 펼친다.
책이 그림이 됬고, 경험이 그림이 됬고,
상상도 그림이 됬다.
그림은 딸에게 단순한 취미를 넘어
표현 욕구의 발현이자, 추억이자 인생이다.
조용한 성향 덕이기도 했지만 그림 그리기를 워낙 좋아하니 어른들의 모임이나 외식자리에서는 A4 종이 한 장과 볼펜만 있으면 어디에 데려가도 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활동량이 모자라서 일부러 산책하러 데리고 나가지 않았다면 하루 종일도 앉아 있겠다 싶다.
자신의 화풍도 스스로 개발해냈다. 날카로운 연필이나 볼펜을 선호한다. 종이 한 장을 채우는 데 몇 시간이 걸릴 정도로 작은 그림을 세밀하게 그린다. “더 이해가 잘되게 대사를 써보면 어떨까?” “그림 밑에 글도 적어 보면 어떨까?”하며 문자로 유도해 봤지만 ”난 그림만 봐도 다 알아. 글씨 안써도 돼”하고 당차게 거절한다.
머릿속 생각은 한두 단어를 제외하면 모두 그림으로 표출했다. 스케치북, 연습장이 몇 일이면 닳는데 부지런히 사다 놓지를 않았더니 언젠가부터 A4 종이만 사용한다. 유치원 시절부터 이렇게 그린 종이가 수천 장에 이른다.
딸은 이야기를 상상하고 그림으로 표현하면서 친구들과의 놀이보다 더 큰 쾌락에 빠져들었다. 그림을 좋아한다고 하면 "그 쪽으로 키워줘~ "라고 하지만 나는 밀어준다는 실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적극적으로 밀어주던 단 한 가지 행동은
그림 그릴 때 잘한다고 칭찬한 것뿐.
열심히 그리니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보다 어린 시절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실컷 그리기를 원했다.
창의력 미술을 한다는 미술 학원을 몇 군데 알아보았으나, 비싸고, 컨텐츠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 없이 어설프게 세상의 잡지식과 그림을 결합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깊이도 없고, 아이의 창의적인 표현을 끌어내지 못햇으며, 아이의 자발성이 아닌 선생님이 유도하는 창의성이다. 그림에도, 창의성에도 도움이 안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게다가 많은 미술 학원들이 학생들이 '상을 받게 해준다'는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미술 대회에서 상을 받으려면 크게, 완성도있게, 진하게 그리는 것이다. 자신만의 표현보다 작품의 완성도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많은 학원에서 아이가 밑그림을 그리면 선생님이 마무리를 해준다. 이 샘플을 놓고 아이들이 몇 번 반복해서 그린다. 화려한 수상 실적 이면에 이런 훈련이 있다. 결국 화려한 선전 문구없이, 아이들 본연의 표현을 존중해 주는 소박하고 따뜻한 미술 학원을 찾아 아이가 일곱 살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쭉 다니고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그리니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상을 받기가 어려웠다. 그림 좀 그린다는 자부심을 가졌는데 번번히 상을 타지 못하니 풀어 죽어 있길래 미술 학원 선생님과 그림 스타일을 바꾸기 위한 시도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즐거움이 사라지고 짜증이 느는 것이 확연히 보인다. 그림을 그리는 목적이 머릿속의 이야기를 표출하고 자신의 감정을 쏟아붓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상과 같은 외재적인 목적이 내재적인 가치를 넘어서면 안된다는 확신을 다시금 하게 됬다.
딸은 말이 없다.
그렇다고 딸이 세상과 대화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딸은 그림으로 생각을 온전히 쏟아놓고 대화한다. 다만 말과 글만이 유일한 표현 방식이라고 생각한 내 고정관념이 딸 아이를 ‘조용하다’고 규정한 것이다.
딸아이는 상상으로, 그림으로
그 누구보다 수다스러운 상상의 세계에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