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충남 논산 궁골에서 태어나셨다.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줄 선 왕복 2차선 도로를 달리다 마을로 들어가면 중앙의 오솔길을 따라 좌우로 계단식 논이 펼쳐지고 마을의 정경이 내려다 보이는 경사의 끄트머리에 옹기 종기 집들이 모여 있고, 그 뒤를 반원형 마을의 모양에 맞춰 계룡산이 병품처럼 지켜주는 곳이다.
나한테는 배산 임수보다 더 아름답고 따뜻한 정경이다.
아기 자기 집들 중에 가장 중심에 위치한 마을의 한 가운데 집에서 아빠가 태어나셨다. 지금은 깨끗이 리모델링 해서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멋진 베란다가 있는아담하고 깔끔한 벽돌식 집으로 변신했다.
아빠는 세 번째 자식으로 태어나셨다는데 영아 사망률이 높던 시절 위 형제들이 사망하면서 장남이 되셨다.
아빠의 할아버지는 참봉 벼슬을 지낸 그 지역의 유지셨다.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서 눈으로 보이는 사방 모든 땅과 논과 밭이 다 증조 할아버지 집안의 것이었단다.
본인은 그렇게 호령하며 살았지만 자식 교육에는 대단히 실패하셨다. 장남에게 대부분을 물려주던 시절, 장남은 물려준 재산을 순식간에 탕진해 버렸다. 아빠의 아버지는 장남에게 주고 남은 일부의 재산을 받았는데 그마저도 아빠가 태어나기 전에 다 날려버리면서 아빠가 태어났을 적에는 끼니를 연명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가난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없는 돈으로 전국을 유랑하며 술 마시며 방랑 생활을 즐기셨던 모양이고, 그나마 생기는 돈은 본인의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는 데에 모두 쓰셨으니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능력은 제로였던 분이다.
남아 있는 처자식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한 사투를 벌여야 했고, 그 무게는 장남의 어깨에 오롯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빠는 다섯 살부터 지게를 지고 몇 개의 산을 헤매 다니며 장작을 캐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보릿고개로 몇 일 동안 먹을 것 한점 없던 나날에는 나무 껍질이나 나무 뿌리를 캐먹었는데 그게 얼마나 서럽고 힘들었는지 "세상에 배고픈 것만큼 큰 고통은 없다"고 아직도 말씀하신다.
자신의 양을 넘어 과식하는 일은 없지만 끼니를 거르거나 시간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배고픈 것은 절대 안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분이다.
먹을 것도 없는데 한겨울에 산에서 장작 캐려면
따뜻한 신발이나 있었나요?
"그런게 어딨니? 그냥 짚신 신고 다녔지"
"그럼 동상 안걸려요? 군인들 보면 한겨울에 두꺼운 양말에 군화신고 열심히 훈련해도 동상걸리던데"
"그게 당연했으니까.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동상은 안걸렸어"
왜 하루치 장작을 캐려고 새벽부터 밤까지 다녔을까?
그 당시 산은 가지도 나뭇잎도 없는 민둥산이었단다. 나무가 말라 붙은 새빨간 산.
모든 사람이 다 나무로 불을 떼던 시절이기도 했겠지만 전쟁 물자를 마련하기 위해 식량, 놋쇠 그릇, 사람, 산에 있는 나무까지 아낌없이 싹 쓸어간 일제가 남긴 참상이기도 하다.
죽은 나뭇가지 붙어 있는 나무 한 그루를 찾기 위해 산을 헤매고 헤맸다. 그런 피같은 장작을 불 뗀다고 쓸 때마다 그렇게 마음이 아프셨단다.
4월 5일 식목일까지 지정해서 나무 심자 캠페인을 벌인 것은 봄바람 쐬며 꽃놀이 하자는 게 아니라 산이 제 역할을 하고 그래서 국가와 국민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이바지하자는 피나는 노력의 일환이었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돈만 내면 연료던, 식재료던, 옷이던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불을 떼기 위해 장작부터 구해야 하고 밥을 먹으려면 논에서 쌀부터 길러야 하고 옷을 입으려면 옷감을 손수 다 꿰매서 만들어야 하는 시절을 살아 봤다면 절약하고 아끼는 습관이 들래야 들 수 밖에 없었겠다.
먹고 싶으면 밖에서 사다 먹고 입다가 질리면 새로 사면 되고 최신 트렌드를 따라야 하니까 철마다 전기 전자 제품 새로 구비하는 자본주의의 "쿨"한 우리들은 돈을 많이 버는데 돈이 없게 만든다. 굳이 먹지 않아도 되는데 과식하는 돼지가 되어간다. 수많은 상품들을 만들어 내느라 지구의 자원을 고갈시킨다. 지구를 넘쳐나는 쓰레기를 받아내는 쓰레기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한낱 인간의 가치를 우습게 만드는 자원의 고갈, 쓰레기의 증가, 이로 인한 기후 변화, 환경 오염과 같은 전지구적인 문제는알고 보면 "그냥 이렇게 사는 게 당연해서 남들 하는 대로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서부터 기인한다.
말이 너무 샜다. 다시 돌아가자면 그리하여 어릴 적부터 우리 아빠의 가장 절실한 소망은 "하루 세 끼 밥을 먹는 것" 이었다.
아빠는 군대 생활을 행복하게 회고하신다. 왜냐하면 공짜로 세 끼 밥을 줬으니까. 훈련이야 사는 것보다 어려울 것 없었는데 그 정도로도 세 끼 밥을 꼬박꼬박 준다는게 믿기지 않았고, 오히려 제대 후에 뭘 먹고 살지가 더 아찔했다고 하신다.
통곡물 자연식이었을 그 당시의 식사로는 세 끼를 다 먹어도 뒤돌아 서면 배가 고프셨단다. 군대에서 담배를 나눠줬는데 그 담배를 갖다 팔면 돈으로 바꿀 수 있었나보다. 아빠는 보급받은 담배를 모으고 모아서 밖에 내다 팔아 그 돈으로 떡을 사먹었다.
떡이고, 밥인데 담배를 태워서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웠을 터. 아빠는 그렇게 담배를 평생 입에도 대지 않는 분이 되셨다.
아무리 어려워도 남은 엄마와 형제들간의 따뜻함이 있었다면 힘들 지언정 견뎌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까지 울며 웃으며 회고하겠지... 아빠의 고달픔과 배고픔 외로움은 아무에게도 위로받지 않고 혼자 오롯이 견뎌내야 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아빠는 친구들이 학교가는 것이 너무 부러워 학교에 보내달라고 했다.
"먹고 살기 힘든데 무슨 소리! ~ "
혼자서라도 글 공부를 하겠다고 밤에 호롱불 켜놓고 책을 읽을라치면 그럴 시간 있으면 나가서 일이나 하라 호통을 들어야 했다.
아빠의 마음에 바다와 같은 따뜻함과 사랑이 있다는 것은 아이 낳고 마흔 즈음이 되니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뚝뚝하거나 호통치는 모습에 가려 아빠에게 따뜻한 감성이 숨어 있다는 걸 철이 덜 든 나는 알지 못한 것이다.
어릴 적 이렇게 힘들고 외로울 때 지혜롭고 따뜻한 보살핌을 어느 한 사람에게라도 받았다면 아빠는 그 따뜻한 감성을 숨기지 않고,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이렇게 40 년이 지나서야 아빠를 이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