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대한민국 혼담사 3

by UX Writing Lab

초례를 치르고 다음 날 엄마와 아빠는 아빠의 집이 있는 궁골로 이동했다.



그렇게 엄마를 자기 집에 데려다 놓고 아빠는 바로 서울로 떠나 버렸다.



황당했지만 누구 하나에게 말할 사람도 없고 하소연 할 사람도 없고 이게 결혼 생활인가 어벙벙 했겠지만 지금처럼 친정 엄마한테 전화 걸어 나 이런 결혼 생활 못한다고 따지던 시절도 아니고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지금 논산에서 아래 위집 사는 마음이 따뜻한 동갑내기 첫째 시누이와 한 방을 쓰면서 도란 도란 이야기 나누며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고 한다.




IMG_0789.JPG 궁골마을 엄마 옆집


아빠 사업이 자리를 잡으면서 돈이 생기기 시작해도 절대 허투루 쓰지 않았는데 어릴 때 우리 집이 무척 가난한가부다 생각할 정도로 학용품 살 용돈 한푼도 제대로 안줘서 곤란했더랬다.



아빠가 그렇게까지 먹고 써버리는 돈을 아끼면서 하려고 했던 것은 잃어버린 조상의 땅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빠가 사들인 땅으로 조상들의 묘역을 모실 수 있게 되었고 가문을 지키기 위해 그 땅은 어떤 자손이라도 함부로 사고 팔 수 없도록 아빠 자신도 아니고, 아들도 아닌 십여 명에 달하는 종친에게 이 쪽 저 쪽 다 찢어서 모두 공동 명의로 나눠났다.



벌초를 하거나 제사를 지내거나 성묘를 드리는 모든 가족 행사에 모두들 주저함 없이 적극적으로 참석할 수 있게 만든 아빠의 큰 뜻이기도 하다.


논산 집을 리모델링 하면서는 대전에 있는 큰 고모랑 왔다 갔다 하다가


"오빠 좋으시겠어요"

"너도 올래? 네가 여기에 집 짓겠다고 하면 우리 집 위에 있는 땅을 너에게 넘겨주마"


해서 고모에게 땅을 무상으로 넘겨주었고 고모와 고모 딸 네 명이 공동 투자하여 집을 짓게 되었다.




IMG_0816.JPG 아빠집과 위아래로 있는 고모님댁



딸부잣집 고모댁은 매주 방문하는 딸과 사위와 손주들로 항상 시끌 시끌하고,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는데 밭에 있는 배추는 어떻게 할지, 이번 주 감 말려야 하는데 언제 대전서 올지 등을 논의하고, 슬픈 일 힘든 일 있으면 고모와 함께 숙덕 숙덕 이야기하고, 김치도 번갈아 가며 두 집이 함께 담그고, 그 과정에서 단 한 번도 "내가 너한테 땅 줬잖아"라고 으스댐없이 그저 "사람 사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아" 라며 엄마 아빠 모두 행복해 하신다.


대전에 사는 큰 언니가 논산집으로 자주 놀러가고, 엄마 아빠가 분당집으로 오실 때면 수도권에 사는 자식들이 분당 집으로 놀러가는데 그래서 고모댁에 비하면 엄마 집은 조용한 편이다. 엄마가 "고모집은 항상 애들이 바글바글해" 라며 부러워하니 고모님 딸들도 엄마 아빠한테 깍듯하게 대하고 맛있는 것 먹고 놀러갈 엄마 아빠를 동반한다.




고모님 댁 말고 그 동네가 맘에 들어 전원 주택을 짓고 살겠다는 어떤 사람이 여기 있는 땅 좀 제발 팔아주세요 라고 했을 때에도 못판다거나, 가격 더 줘야 판다 밀고 당기는 것 일점도 없이 "이렇게 깨끗하고 예쁘게 사는 사람이 더 생기면 좋지" 하면서 그 부부와, 그 부부가 데리고 온 친구에게까지도 기꺼이 내주었다.




그래서 아빠의 궁골 마을은 젋은 사람 다 빠져가고 활기 없고 늙어가는 여느 시골 마을이었는데 오지랍 넓고 여기 저기 다니며 커피 마시는 거 좋아하고 서로 음식 해다주고 나눠먹기 좋아하는 우리 엄마가 들어오면서부터는, 그리고 뒤이어 전원주택 몇 가구들이 들어서면서는 갑자기 사람 사는 것 같아졌다, 마을이 너무 깨끗하고 예뻐졌다며 무지하게 활력이 돌면서 타칭이 아닌 자칭 "워너비 전원 주택 단지"가 되었다.



때마침 매스컴의 영향으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탄 궁골 식품 덕에 청국장 띄우고 메주 띄우는 일손 부족하면 온 마을이 출동해서는 하루 종일 일 돕고 청국장 몇 덩어리 얻어오면서 서로 재밌어 죽겠네 한다.



IMG_0799.JPG 궁골마을의 스타벅스, 공기 좋고 풍경 좋고, 가격도 싼 커피숍 부럽지 않다며 좋아해요



원래 살던 사람과 새로 들어온 사람의 알력 다툼 하나 없이 너무나 하하 호호하며 즐겁게 지내는 중이시다.



다시 엄마 아빠의 결혼 스토리로 돌아가면



결혼 하자 마자 시댁에 혼자 떼어 놓고 서울로 돌아간 아빠는 한 달 만에 엄마를 데릴러 돌아왔다.



결혼 예물이고 선물이고 아무 것도 없고, 그런 걸 받아야 한다는 것도 몰랐는데 아빠는 돌아와서 몰래 금가락지 하나 건네주면서 "여동생들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시더랜다.



그렇게 한 달 간의 독수 공방 생활을 마치고 엄마와 아빠는 부부의 모습으로 함께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두 분이 서울서 기거하게 된 곳은 아빠가 마련한 전화 한 대가 놓인 전세방 한 칸.



어느 누구도 한 마디 해 준 적 없지만 난 아빠가 도저히 맞출 수 없는 무리한 일정에도 전화가 놓인 전세방에서 부인을 살게 해주겠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얼마나 묵묵히 피땀흘려 일했을지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는다.




본인이 설정하신 최고의 환경을 부인에게, 자식에게 주기 위해 아빠는 아무 말 없이 본인이 일을 더 열심히, 더 많이 하는 것으로 항상 이룩해 왔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공감도 커뮤니케이션도 없던 탓에 자식들은 아빠가 뭘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 턱이 없었고, 공감과 상의 과정이 결여된 아빠의 소통 방식에 엄마의 상실감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커져만 가서 아빠의 노고가 제 가치를 인정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린 듯이 아빠의 모습이 보인다. 자신의 말 한마디를 책임지기 위해, 서울서 엄마를 남의 방에 끼어 살게 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썼을지를....



전화 한 대와 전세방 한 칸.




가슴이 꽉 막히고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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