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세운상가 비즈니스

by UX Writing Lab

브런치 매거진 연재: 30년대생 아빠 이야기


1. 30년대생 아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2. 논산 총각의 어린 시절 / 3. 60년대 대한민국 혼담사 1 / 4. 60년대 대한민국 혼담사 2 / 5. 60년대 대한민국 혼담사 3







장소는 현재 종로 3가 세운 상가 뒷편 장사동.




지금은 세계 문화유산 종묘와 세운 광장으로 상전 벽해가 된 곳이다.




열심히 모아 장만한 전셋방 한 칸이라지만 정말 전화기 한 대 딸랑 있고(이 때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었을 텐데 왜 전화기가 있었을까 참 궁금하다) 긴 방향으로 둘이 누우면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닿을 크기의 방이었다고 한다.



어릴 적 내가 태어나고 자란 '비원 옆 원서동'은 방 몇 칸에 정원, 연못, 장독대, 폭포까지 딸린 큰 집들이 있는가하면 바로 길 건너 언덕편으로 올라가면 어두컴컴한 집안에 방 한 칸에 한 가구씩 사는 달동네 집이 공존하던 곳이다.



조그만 방 한 칸에 4~5 명이 사는 건 애교고, 열 자녀와 부모가 함께 살던 방 한 칸짜리 주택이 내 기억에 최대 다수가 살던 집이다.



지금은 아파트 평수가 뻔히 나와 어떤 아파트, 어떤 동, 어떤 유치원에 다니는 사람과는 어울리지도 않으며 소위 "자기와 어울리는 수준" 끼리만 노는 배타적인 문화가 존재하지만 그 당시에는 100 평짜리 부잣집 자식이나 단칸방 셋방 살이 자식이나 어떤 편견도 없이 함께 술래잡기하고 고무줄 뛰기하고 놀았다.









엄마 아빠가 서울 살이를 시작한 것이 그로부터 15 년 정도 전의 일이니 다른 사람 자는 방에 끼어 자지 않고 두 부부만 사는 방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 당시엔 럭셔리한 출발이다.




시골에서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며 살던 엄마는 누구 하나 아는 사람 없는 서울로 올라와 연탄을 어떻게 가는 줄도 몰라 불 꺼먹기 일쑤고,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누구 하나 상의하고 의논할 사람도 없이 무뚝뚝한 아빠와 첫 아이를 낳기까지 어떻게 그 막막함과 적적함을 해소했을까 참으로 궁금하다.



부끄럼이라는 것도 수줍음이라는 것도 있던 우리 엄마였을테지만 지금은 옆에 앉기만 하면 집안 내력, 남편 욕, 자신의 팔자까지 말해버릴 수 있는 성격을 갖게 된 건 서울 살이에서 시작된 엄마의 생존 전략이었을라나....



엄마의 서울 생활은 생각만 해도 아찔한 순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결혼하고 첫 딸을 낳았는데 주변에 가르쳐 줄 어른이 없으니 아이한테 뭘 먹여야 하는지, 어떻게 재워야 하는지, 어떻게 안아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더랜다.



젖도 안돌고, 어떻게 해야 젖이 도는지도 모르고, 애 배고프겠다 싶어 미음 국물을 먹이자 하고 한 달 내내 미음을 끓여 국물만 먹였다고 한다.



배고픈 1개월 짜리 우리 언니는 밤낮으로 크게 울어댔고, 아빠는 무슨 애가 저렇게 우냐며 엄마도 구박하고 언니도 구박했단다.



그러다 어디선가 "분유를 먹여봐" 하는 소리를 듣고는 분유를 사서 먹이니까 그 때부터 언니가 울음을 뚝 그치고 순하게 방긋 방긋하게 웃는 아기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우리 엄마는 분유 신봉자가 되서 손주 손녀들이 울기만 하면 "빨리 분유 갖다 먹여~~" 한다.



나름 모유 먹여본다고 애쓰는 중인데 애가 보채면 무조건 "분유 먹여" 30 분 전에 먹었는데도 "분유 먹여" 해서 정원이 어린 시절 나를 헐크로 돌변하게 만들었던 엄마의 지론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결국은 젖이 돌게 되어 언니는 영양가 높은 모유를 먹게 되었는데 큰언니가 분유를 먹고 얼마 후 분유 중금속 오염인가.... 뭐 여하간 심각한 문제가 발견되어 나라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는데 우리 언니가 바로 최초로 벌어진 국가적인 불행의 주인공 되시겠다.



참으로 다행스럽게 우리 큰 언니는 친구같은 엄마를 꿈꾸더니 정말 딸과 친구가 되어 남편과 아들을 집에 두고 맨날 딸이랑 놀러 다니는 심신이 매우 건강한 엄마로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엄마는 큰 언니만 보면


"쟤가 그 분유 땜에 저렇게 키가 안 큰거야, 쟤가 다리가 뚱뚱한 게 그 분유 때문이야" 하며


평생 문제가 생길 때마다 쉽게 전가할 수 있는 좋은 핑계 거리 하나를 만들게 되었다.









첫 딸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의 가족이 서울에 올라오면서 두 가족 한 지붕 생활을 시작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큰 고모, 작은 아빠, 작은 고모에 이어 태어난 작은 언니까지 다섯 명의 시댁 식구와 엄마의 네 식구가 더해져 아홉 명의 대가족이 되었다.



단칸방에서는 그 많은 식구를 수용할 수 없으므로 더 큰 가족이 살아야 하는 큰 집으로 그 동네에서 이사를 가시게 되었다.



엄마는 이 시절을


"징그럽게 북적거리고 시끄럽고 바빴어. 작은 애까지 태어나서 애 키우기도 눈코뜰 새 없는데 시댁 식구들도 다 와있지, 또 회사일은 얼마나 바빴다구. 왜 그 때는 꼭 그렇게 붙어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옆에 집 하나 얻어서 따로 살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라고 회고한다.



아들만 대우받던 시절에 큰 언니에 이어 작은 언니까지 줄줄이 딸이 태어나자 병원에서는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아빠 사업이 그래도 안정되었던 터라 가정 출산이 아직은 더 많던 시절 엄마는 65년도에 태어난 큰 언니부터 나까지 네 명의 자식을 모두 병원에서 출산한 그 당시 "잘나가는" 여성이었다.



더욱 세련된 방식을 택하려던 엄마는 작은 언니를 유명 '대학 병원'에서 낳게 되었고, 신생아실과 산모 입원실을 분리했던 그 당시 쇼킹할 정도로 "세련된" 분만 방식은 아들을 원하는 아빠의 "간절함"과 만나 병원에서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애가 바꼈어! 우리 집에 딸이 또 나올 리가 없어 의사 간호사 다 나와!!!!"



바뀌지 않고 확실히 아빠 자식이 맞다고 하자 화가 난 아빠는 딸 얼굴이고 뭐고 제대로 확인도 안하고 낚시터로 달려가 울분을 달랬다고 한다.



KakaoTalk_Moim_6v71EkzzliUStCJepWZrbnwkNKJYdz.jpg 아빠, 엄마, 첫째 언니, 둘째 언니



지금 우리 네 형제는 술 먹고 놀 떄마다


"네 인생이 이 집에 들어와서 불행해 진거야"

"그나마 이 집으로 와서 이렇게 큰소리치고 사는거야"

"네 진짜 부모를 만났는데 그게 재벌이면 우리 좀 잘 봐줘~ "


하며 작은 언니 소동을 떠올리며 깔깔대며 웃는다.







아빠가 장사동에서 시작한 사업체는 충남전기이다.



충남에 자부심을 느껴서였을까, 그냥 그 이름이 만만해서였을까,



이후 아빠와 관련된 사업과 관계에는 꼭 "충남", "충"이 들어갔고, 나중에 오빠가 사업체를 이어받으면서 멋드러지게 "CN" 으로 전승되는 과정에서 어릴 때는 참 촌스러운 이름이라고 싫어했는데 계속 보고 듣고 해서인지이제는 나에게도 '충남 스피릿'이 생겨서 난 분명 서울이 고향인 서울 여자인데 충남 사람에 정을 느끼고, 논산스러운 라이프 스타일(음식 만들어 초대하고 음식 해서 나눠주는?) 을 확립하게 됬고, 내가 논산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져 산다. (아, 좋은 착각이다)



충남 전기는 초기 자본금이 넉넉하지 않아 본인의 사무실을 얻을 수 없어 남의 사무실 더부살이로 시작한 사업이다.



이 회사에서 아빠는 전화 다이얼을 제조하셨다. (그 외 어떤 전자 통신 업무를 했는지는 아빠에게 사실 확인 해봐야겠다)



아마도 이런 다이얼? 어릴 적 기억하는 최초의 전화 모습이다.



얼전화다이.jpg



아이폰의 핑거 스크린 뺨치는 그 시대 최고의 버튼식 전화기였을려나?



박정희 대통령의 잘 살아보세~~ 구호는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안에서는 새마을 운동으로 국민들의 정신과 행동을 개조하고 밖으로는 뭐든 수출을 해서 외화를 벌어들이겠다는 큰 작전으로 나뉜다.



국민들 소변이던 (굉장히 큰 외화 수입원이었다고 한다) 은행잎이던, 다람쥐던 뭐든 갖다 팔았고 현재 동남아 사람들이 맡고 있는 3D 일꾼역을 60 년대에는 대한 민국 국민이 맡아서 선진국에서 온갖 푸대접과 차별을 받으며 묵묵히 국력 향상에 기여를 하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 우리 나라 사람이 겪었던 일이다. 우리 나라에 와서 그보다 더하면 더할 푸대접과 차별을 받고 살 동남아 일꾼들에게 관대해지자. 바로 얼마 전 우리 언니, 우리 이모, 우리 삼촌이었던 분들이다. 먹고 살 만해졌는데 그 정도 성숙한 모습은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수출을 해서 외화를 벌어야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간절한 전략은 뭐든 갖다 수출하면 얼른 승인해주고, 얼른 허용해주는 기업가들의 천국같은 시절이었다.



그렇게 다이얼을 만드는 족족 팔리고, 팔리는 족족 다시 만들어야 하는 사업의 활황을 달리게 되었다.








아빠는 학교를 너무나 다니고 싶었는데 소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것이 너무나 한이 되어 내 동생들은 이런 한을 갖지 않도록 공부를 시키자고 결심을 하셨다. 남자 동생은 대학까지. 여자 동생은 고등학교까지.



그 한참 후인 아빠의 자식들은 원하는 공부는 그 어디까지라도 무조건. (아빠의 이런 교육 철학에 따라 가족 중 한 명이 비행기 탈 일이 있으면 온 일가 친족이 이십 명씩 공항에 나가 배웅을 하던 탓에 "이별은 집에서~ " 라는 TV 캠페인이 벌어지던 80년대 시절 큰 언니는 미국 유학, 작은 언니는 이태리 유학까지 하게 되었다)



결심을 하면 뭐든 해버리고 마는 아빠는


"내가 너 공부 시켜줄게~"

"네가 누구 덕에 공부하는 줄 알아?"

"나는 이렇게 한이 맺혔는데 너는 참 좋겠다"


아마 이런 말을 한 마디도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본인이 결심한 바는 무조건 묵묵히 실행할 뿐이고, 우리가 초등학교를 의무적으로 다니듯 여자는 고등학교까지, 남자는 대학교까지 아빠의 동생이라면 반드시 이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처럼 정규 학교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아빠는 평생 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것을 창피해 하셨고, "내가 학교를 다니지 못해서, 글을 잘 배우지 못해서"라는 푸념을 가끔씩 하시는데 나는 조금도 동의할 수 없는 말이다.



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살아야 한다는 절박감과 집안을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 별보고 시작해서 별보고 잠이 드는 미친 듯한 성실감 세 끼 밥먹고 잃어버린 선조의 땅을 되찾자는 열망은 헝그리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학교 공부를 마친 수많은 엘리트들은 감히 이루지도 못한 일을 해내셨는데 이건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못하는 무지막지한 삶의 지혜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학교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근성이기에 난 아빠가 학교를 다니지 않아 창피힌 것이 아니라 학교를 다니지 않아 오히려 더 자랑스럽다.



활황을 달리던 사업 덕에 집과 회사의 구분 없이, 가족과 사원의 구분 없이 밤과 낮의 구분 없이 모든 가족이 충남 전기의 매출에 기여해야 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밥 먹는 시간을 빼면 하루 종일 일하는 아빠, 밥 준비하고 먹고 치우는 시간 빼고 일하는 엄마와 할머니, 책가방 내려 놓자 마자 일하는 작은 아빠와 두 고모. 24시간 온가족 풀가동 비즈니스의 나날이다.







그럼 아가였던 우리 두 언니는 누가 어떻게 봐줬으려나....



아마 일하다 방해하면 저리 가라고 혼냈을 것이고, 혼날 일이 아니라면 아마 그 누구도 특별히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을 것이고, 순응적인 큰 언니는 눈치껏 조용히 견뎠을텐데 반골 기질이 다분한 작은 언니는 이런 무관심을 못견뎌 떼를 써서 관심을 집중시키는 전략은 - 작은 언니가 어른이 되서 철들기 전까지 우리 집에서 매일 일어났던 전쟁같은 일상은 이런 가정의 환경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싶다.



가족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사업이 커지면서 시골에서 일을 배우려는 청년들이 충남 방재 회사의 직원으로 속속 올라오고 있었고, 이제 장사동 집에서 그 많은 사람이 충당이 안되자 권농동으로 이사를 가면서 장사동 시절은 막을 내리게 된다.




KakaoTalk_Moim_6v71EkzzliUStCJepWZrbnwkNKzfhf.jpg 죽어가는 꽃도 엄마 옆에 오면 살아나요



KakaoTalk_Moim_6v71EkzzliUStCJepWZrbnwkNKs5Z7.jpg 꽃씨가 엄마 옆만 졸졸 따라다니는지







브런치 매거진 연재: 30년대생 아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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