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야기
남편은 붉은색을 좋아한다. 파스텔 톤을 좋아하는 나는 옷이나 집안 살림 중 붉은색을 찾기 어렵다. 같이 산지 오래되어 많은 부분이 비슷해졌지만 색 취향만은 여전히 다르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쯤 안경을 고를 기회가 있었다. 빨간 테 안경만 골라 써보라 하는 것을 보고 색 선호도가 심상치 않다 생각했다. 그런 남편이 유난히 좋아하는 꽃이 있다. 바로 능소화다. 붉은색의 장미나 봉선화가 아니고 능소화다. 요즘 남편이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서 연이어 능소화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니 여름 한가운데 있다는 것이 실감 난다.
능소화에 대한 첫 기억은 엄마표 영어교육 온라인 모임에서이다. 엄마의 성실함과 아이의 유창한 영어 목소리로 모두의 부러움을 받던 분, 그녀의 카페 별명이 능소화였다. 꽃 모양도 잘 모른 채 사람을 떠올리는 이름으로 먼저 능소화를 알게 되었다.
또 다른 기억도 그때쯤이다. 날씨가 더워지고 여름이 시작되었지만 저녁이 다 되어 에어컨을 켰다. 아이들에게 에어컨은 아빠가 퇴근해서 가족이 다 모였을 때 켜는 것이라고 했다. 전기세도 아끼고 밖에서 수고하는 아빠를 위해 그렇게 하기로 했다. 기온도 높아지고 아이들이 청년이 된 요즘에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그때는 그래야 하는지 알았다. 아이들이 덥다고 하면 수박을 잘라 얼음에 띄워 먹이고 아빠의 퇴근을 기다렸다.
기다리던 남편이 집에 도착하여 에어컨을 켜려 하였다. 남편은 회사에서 하루 종일 에어컨 밑에 있어 바람이 싫으니 켜지 말자며 꽃타령만 하였다. 맞다. 꽃 이야기가 아니라 꽃타령으로 들렸다. 퇴근길 올림픽대로 길가에 길게 늘어져 피어있는 붉은 꽃이 있는데 그렇게 예쁘다고.
하루 종일 찜통더위에 아이들과 부대낀 나는 어긋난 기대에 맘이 상했다. 영어 모임에서 이름을 날리는 능소화라는 엄마와 원어민 발음의 그 집 아이를 떠올리며 조급한 마음까지 들었다. 찐득한 몸으로 능소화 타령을 힘없이 듣고 있던 나와 아이들이 기억난다.
능소화에 대한 최고의 기억은 진안 마이산에서다. 마이산에 처음 갔을 때 멀리서 보아도 큰 돌산의 기운을 알아챌 수 있어 가까이 가는 게 두려울 정도였다. 100년이 지난 마이산 탑사 돌탑들은 장관이었다. 돌의 기운은 탑사안에 가득하였다. 처음 보는 탑사에 놀라며 안으로 올라가다 높은 절벽에 피어있는 주홍빛의 능소화를 만났다. 금빛과 불빛을 오묘하게 섞어 놓은 꽃과 마주친 순간 돌의 기운에 위축되어 있던 마음이 녹아내렸다.
마이산 절벽에 피어 있는 능소화는 수령 30년으로 줄기가 두껍게 뒤틀리며 세월을 가득 담은 듯 부풀어 있었다. 줄기들은 벽면 위로 타고 올라 가지가지마다 주홍빛 꽃을 충만하게 매달았다. 여리면서 강해 보이는 능소화 꽃은 노력의 결실을 보여 주듯 가지 끝마다 매달려 우리를 향해 있었다. 외유내강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닌가. 강함과 약함의 절묘한 조화가 한눈에 들어왔다. 절벽에 핀 능소화로 위로받은 그날 이후, 나에게 붉은 것 중에 좋아하는 것이 생겼다. 그리고 남편의 능소화 타령은 즐거운 능소화 이야기가 되었다.
능소화는 금등화(金藤花)라고도 한다. 가지에 흡착근이 있어 벽에 붙어 올라가 한자로 등나무 등 자를 쓴 것 같다. 금으로 만든 등처럼 생긴 꽃이라는 말이다. 중국이 원산지이고 옛날에는 능소화를 양반집 마당에만 심을 수 있었다고 해서 양반 꽃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뿌리에서 나오는 줄기는 땅에서 하늘로 타고 올라가고 꽃을 매단 줄기들은 길게 하늘에서 땅으로 흘러내린다. 벽에 붙어 있는 줄기에 힘이 덜 가게 하려면 줄기를 짧게 해서 매달려 있어야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작지 않은 크기의 꽃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그래서 연약하면서도 강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줄기에 달려 있는 무성한 잎의 초록빛은 청색에 가까운 여름 초록빛을 띠고 있다. 진한 초록 잎은 깔때기 모양을 하며 노랗고 붉은 귤색의 능소화를 더 돋보이게 한다.
집 부근 초등학교 담벼락에 피는 능소화는 깔때기 모양이 아니라 나팔 모양이다. 나팔 중에서도 트럼펫처럼 길게 나와 있어 가까이에서 보는 것보다 멀리서 보는 게 더 예쁘다. 나팔 모양 능소화는 투박하고 거칠어 보이는 꽃이지만 남편의 눈에는 저녁에 켜 놓은 등처럼 아름다운가 보다. 보도블록 열기가 식지 않았는데 저녁식사 마친 남편은 서둘러 능소화 있는 길을 걸으러 나가자고 한다.
6월에 피는 능소화는 여름 태양의 열기가 식어갈 8월 말쯤 시든다. 뜨거운 여름 동안 우리와 함께하는 꽃이다. 지루한 장마와 바다를 뒤집어 놓는 태풍도 겪어야 하는 고된 여름을 밝히는 꽃이다. 더위에 밭작물이 녹아 나가는 이 시간을 우리와 함께 하며 꿋꿋하게 견디는 능소화가 전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다. 여름을 더 진하게 물들이는 꽃 이야기에.
등처럼 피어 있는 꽃, 능소화. 꽃이 무거워도 다 괜찮다며 꺾이지 않고 흔들거리며 우리를 향해 있다. 힘들어도 활짝 웃으며 주홍색의 나팔을 불고 있다. 오늘도 참 더웠지 하며 속삭이는 것 같다. 학교 담장을 지나가며 풍성한 능소화를 보고 있는 남편에게 물었다. 능소화가 왜 좋으냐고. 남편은 왜 이제야 묻냐는 듯 얼른 대답한다. 날 좋고 꽃 많은 봄이 아니라 덥고 힘든 계절에 오랫동안 살아 보여주어 좋다고. 가성비 따지기를 좋아하는 남편다운 대답이라 생각하며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다. 무뚝뚝한 남편에게 꽃 이야기를 듣게 하는 능소화는 돌탑의 기운만큼 힘이 세다.
능소화를 감상하는 남편이 꽃과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하고 잠시 아무 말 없이 걸었다. 카페 별명으로 능소화인 그녀는 여름을 좋아했을까. 힘든 여름을 잘 견디는 꽃이라 닮고 싶었을까. 닉네임으로 참 어울린다. 나도 금빛과 등불 빛으로 뜨거운 여름을 밝혀 주며 나팔 불어 주는 능소화이야기를 글로 쓰리라 생각하며 조용히 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