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야기
바람이 차다. 텀블러 잡은 오른손이 냉기에 빨갛게 굳었다. 산책하며 따뜻한 차를 마시려고 한 게 욕심이었을까. 봄은 아직 우리를 허락하지 않는 듯 쌀쌀맞다. 지나가는 사람들 옷차림에 아직 겨울이 묻어있다. 분명히 겨울이 아니지만 겨울만큼 춥다. 아니 더 속까지 사무치게 냉기가 파고든다.
3월 초가 되면 언 땅이 녹아 흙냄새를 맡을 수 있어 산책길이 즐겁다. 하지만 감수해야 할 싸늘한 기온은 옷깃을 단단히 여미게 한다. 냉기와 함께 바람도 거칠게 분다. 멀리서 봄을 끌고 오는 듯, 머리카락을 흔들어대는 바람은 잔뜩 경계심을 가지게 한다. 오늘처럼 강하게 부는 돌풍은 건조한 공기와 만나 작은 불을 큰 불로 번지게 하는 재앙이 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이른 봄 3월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달이다.
차가운 봄, 유난히 바람이 부는 이유는 겨울 동안 머물던 차가운 공기가 북쪽으로 밀려 올라가면서 생긴 기압차 때문이라고 한다. 봄바람은 세찬 힘으로 나뭇가지 끝에 남아있는 마른 잎들을 떨어뜨린다. 또 겨울 동안 수분을 흡수하지 않은 나무뿌리가 물을 빨아들일 수 있는 증산작용을 하도록 도와준다. 나무를 맴도는 바람은 밑에 있는 물이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펌프 역할을 해준다. 봄을 시샘하는 듯한 바람은 따뜻해지기 위해 지나가야 하는 길목에서 거칠기만 하다.
식물처럼 3월이 되면 우리 일상에도 새로 시작하는 일이 많다. 대학시절 새 학년이 되어 학교를 가면 강의실은 언제나 싸늘했다. 새 봄이라 얇은 옷을 입고 와서는 강의실에서 입술이 파랗게 되도록 추위에 떨었다. 수업이 끝나면 볕이 좋은 곳에 앉아 친구들과 수다 떨다 노곤해지던 시간. 새로 산 두꺼운 전공서적을 들고 걸으며 마음은 굳어있는데 꽃들은 저만치 펴있는 것에 심술이 나 봄이 싫다고 떠들던 시간. 이렇게 박자가 맞지 않는 달이 삼월이다.
삼월이 되면 아이들은 새 학년이 된다. 아이들이 개학을 해 학교를 가면 엄마들은 방학이 시작된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단체생활이 시작하면서 아이들은 여지없이 감기에 걸렸다. 아이들 감기는 중이염으로까지 쉽게 번져 삼월 한 달은 밥 먹고 후식 먹듯이 약을 먹이던 기억이 있다.
어느 해는 큰 눈이 내리기도 했다. 그날은 아들의 고등학교 첫 모의고사 보는 날이었다. 새벽 5시. 남편의 이른 출근 후 소파에 잠깐 누웠는데 눈을 떠 보니 아침 8시였다. 전 날 강의 세 개를 한 것이 무리였다. 기존 수업과 3월에 새로 시작하는 수업이 겹쳤던 것이다. 아이들을 깨워 주차장으로 가니 자동차에 눈이 쌓여 있었다. 너무 많이 쌓여 눈사람이 된 듯 차 형체만 겨우 알아볼 정도였다. 간밤에 폭설이 내린 것이다.
급하게 털어 보았지만 영하로 내려간 추운 날씨에 자동차 유리는 얼음이 끼여 앞을 볼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는 나를 뒤로하고 아이는 운전석 앞 얼음을 손톱으로 긁어내기 시작하였다. 아들의 간절한 모습에 정신을 차리고 차에 있는 온갖 물건을 동원해 얼음이 된 눈을 긁고 손의 온기로 얼음을 녹여 겨우 앞만 보이게 했다. 차가워져 제대로 펴지지 않는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출발하였다.
이미 시험이 시작되어 아무도 없는 하얀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잊을 수 없다. 쌓인 눈을 털어낼 틈도 없이 그대로 자동차위에 싣고 조그맣게 얼음을 뚫어낸 유리창을 보며 학교로 운전해 갔던 그해 봄. 품속까지 사무치는 쌀쌀맞은 봄날이었다. 봄눈은 쉽게 녹아 봄눈 녹듯 한다는 말도 있지만 그날은 그 말이 통하지 않았다.
산책길에 오늘 같은 차가운 날씨를 뚫고 잎도 없는 맨몸에 꽃봉오리를 만들고 펴는 식물이 보인다. 매화나무, 생강나무와 산수유, 히어리까지. 겨울을 견디어 온 빈 가지에 부드러운 꽃을 피워내는 모습은 두꺼운 옷 입고 그냥 지나치기 미안할 정도다. 이 강인한 꽃들은 이른 봄바람 불 때 수술 암술이 수정하기 위해 추위를 감수하고 탄생하는 꽃이다. 초록 잎이 생기기 전 나무 주변이 한가할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일찍 피어나 다른 꽃들과 경쟁을 피하려는 노력에 더 눈길이 간다. 해가 뜨기도 전에 일과를 시작하는 미라클 모닝을 하는 사람과 같지 않을까.
곱은 손으로 차를 마시며 산수유와 히어리가 꽃을 피우는 쌀쌀맞은 봄을 느낀다. 아직 겨울옷을 여미고 있는 내 앞에 앙상한 줄기 끝 연한 노란빛의 꽃송이가 보여주는 봄. 삼월의 봄이다. 삼월은 새 학년 새 학기에 아프면서 적응해야 하는 날,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한 아침이 있던 날, 꽃은 피어나도 나에게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아 속상했던 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바람으로 머리가 산발이 되는 삼월의 봄을 놓치지 말자. 벚꽃 잎이 눈처럼 땅에 흩뿌려질 때가 오면 이 쌀쌀맞은 봄도 그리워질 수 있으니. 아들은 첫 모의고사의 쓴 기억을 학창 시절 추억으로 이야기한다. 마치 맨몸으로 찬 봄바람을 이겨낸 히어리 같아 고마움이 앞선다.
봄에는 히어리가 피는 봄. 벚꽃이 피는 봄, 철쭉이 피는 봄이 있다. 그렇게 삼월, 사월, 오월의 봄맞이를 정성껏 하여 짧게 지나갈 봄을 더 많이 가져보자. 차가운 봄바람이 얼어 있던 땅속 물을 끌어올리는 삼월의 봄에는 빈 몸으로 꽃을 피우는 히어리처럼 우리의 조각난 상처들도 꽃으로 피어나기를 바라며 걸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