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나는 집에 돌아와 옷장을 열었다.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방 안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와
창문 밖을 지나가는 차 소리가 가끔 들렸다.
나는 옷장 위쪽에 올려 두었던 여행 가방을 내려놓았다.
오래전에 샀던 가방이었다.
몇 번 쓰지 않아 바퀴에 먼지가 얇게 붙어 있었다.
지퍼를 열자 가방 안에서
비어 있는 천 냄새가 났다.
나는 옷을 몇 벌 꺼내 접어 넣기 시작했다.
셔츠 두 장,
얇은 스웨터 하나,
청바지 한 벌.
여행이라기보다는
잠깐 어딘가 다녀오는 사람처럼 짐을 쌌다.
그때 문득 손이 멈췄다.
서랍 안에서 종이 한 장이 보였다.
나는 그것을 꺼냈다.
오래된 수채화 종이였다.
모서리가 조금 말려 있었다.
어린 시절 그렸던 그림이었다.
무엇을 그리려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물통을 엎질러 색이 번지던 순간은 또렷하게 기억났다.
그날 나는 울었던 것 같다.
그림이 망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종이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번진 색은 아직 남아 있었다.
물이 스며든 자리마다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 생겨 있었다.
나는 종이를 다시 서랍 안에 넣었다.
가방 안에는 아직 빈 공간이 많았다.
나는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창문 밖에서는 바람이 건물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이상하게도 숲의 냄새가 떠올랐다.
실제로 맡아 본 적 없는 냄새였다.
그런데도
어딘가 익숙했다.
나는 천천히 가방 지퍼를 닫았다.
그날 밤은 여전히 길었지만
이상하게도 전날들처럼 불안하지는 않았다.
마치 어디론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