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1년 12월 1일 수요일
“이 문제는 이런 방식으로 접근해야 해~ 저번에는 잘 풀었는데, 이번에 까먹었구나?”
“응 언니! 헤헤헤 이것도 봐줘!”
“누나! 나는 언제 봐줄 거야!”
“소울이는 소리꺼 봐주고 나서~ 다들 차례 지키는 거 알지?”
“네네네~”
고아원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이들은 한 서른 명쯤 된다. 아이들이 독립해야 할 나이인 25세가 되면 직업을 구하든 아니든 가나안 마을에 집을 배정받아 독립하게 되지만, 독립하기 전까지의 아이들은 고아원에서 모든 삶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이세벨은 어릴 때부터 총명해서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어하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왔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머리가 좋은 세벨이가 맡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이 일을 맡아왔었기 때문에 의무 반, 어쩔 수 없음 반으로 이 일을 대하고 있었다.
“자~ 다음 소울이~”
“누나!!! 나는 나중에 커서 누나랑 결혼할 거야!”
초등학교를 막 들어간 소울이의 말에 이세벨은 아까 학교의 일이 잊히는 듯했다. 고아원에서의 이세벨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학교에서는 긴장돼 보였는데, 여기서는 그래도 편안히 잘 웃음이 나왔다. 아주 잠깐이지만 아이들과 있을 때면 자신의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났는지 잘해주려고 노력하는 이세벨이었다.
식당에서 아이들의 공부를 다 봐준 이세벨은 쉴 새 없이 10층에서 1층으로 내려갔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아이들 옷에 세탁제를 뿌린 후에 세탁기를 작동시켰다. 세탁기는 '콩콩콩' 하며 잘 돌다가 갑자기 멈추었다. 하지만 이세벨은 평소 있는 일인 것처럼 익숙하게 전원 스위치를 껐다가 다시 켜니, 세탁기는 언제 땡깡을 부렸냐 듯이 잘 돌아갔다.
세탁기 앞에서 멍한 표정을 짓는 이세벨은 세탁기가 10분이 지나면 탈수까지 완료되므로 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다음 단계는 세탁이 끝난 마른 옷들을 정리하는 단계였다. 꽤나 잘 사는 집은 세탁기를 거의 쓰지 않지만 세탁기를 쓴다 해도 탈수까지 완료되면 로봇이 알아서 정리하고 그 외의 가사일까지 다 해줘서 사람의 손이 아얘 필요 없는데 반해, 고아원에서는 모든 가사일을 돌보는 로봇을 마련할 재정이 부족해서 사람의 손이 꼭 필요했다. 세탁 쪽에서는 세탁 후 마른 옷들을 손수 1층에 있는 옷이동함에 넣는 노동에는 사람의 손길이 필요했는데, 그래도 다행인 점은 각각 아이들 방에 배치된 '옷장 겸 옷을 갈아입혀주는 거미다리로봇'과 '옷을 접어서 각자 옷주인의 방으로 올려 보내주는 가제트팔'을 중고로 기부받은 점이었다. 참고로 '옷을 접어서 각 방에 올려 보내주는 가제트팔'은 옷 목 안쪽에 이름이 전자식으로 프린트되어 있어 이 부분을 읽고 각 해당 방으로 올려 보내는 시스템으로 설계되었다.
세벨은 힘없이 마른 옷들을 손수 하나하나 옷함에 넣었다. 오래 입어서 목이 늘어진 티셔츠, 구멍 뚫린 양말, 색이 바랜 잠옷 등등 낡고 버려야 할 옷들은 많았지만 새 옷은 없었다. 창세기 도시가 지어지면서 고아원에 대한 지원이 지구종말 전보다 더 많아졌다고는 하나, 많은 수의 아이들에 비해 턱 없이 부족한 지원일 수밖에 없었기에 고아원은 언제나 재정난으로 허덕였다.
“유다와 가인이네는 새것만 있던데….”
방학 때 유다와 가인이의 초대로 이 둘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재벌집들답게 천 평이 넘는 공간에 모든 즐길 거리와 수발드는 수많은 로봇들과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모든 물건 중에 낡은 것은 없고 다 새것이었다. 음식로봇이 만들어주는 음식은 가나안 슈퍼 음식로봇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구하기 힘든 킹크랩과 상어알 같은 진귀한 음식들이 나오고 전 세계 음식을 만들어주는 사람요리사도 있었다. 유다나 가인이 방은 고아원을 세 개 합치면 나올까 말까 한 평수였다.
“휴우~ 아냐 아냐~.”
이세벨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들의 집을 가기 전에는 자신이 전교 1등이니까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었고 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학교를 다닐 때에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학교친구들은 한 벌에 2억 가까이하는 ‘미래옷’을 다들 입고 있었고 구형폰인 트랜스포머폰이 아닌 제일 최신형 폰인 안경모양의 ‘헬퍼’을 끼고 있었다. 이 헬퍼 또한 오천만 원쯤이다. 자신이 기부받은 옷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마침 고아원 1층에 매일 틀어놓는 텔레비전 홀로그램에서 광고가 나왔다. ‘옷장과 세탁기가 필요 없는 우아하고 세련된 옷, 미래옷’ 요새 제일 잘 나가는 연예인인 아유가 미래옷을 입고 나와서는 그 상태로 여러 벌의 스타일로 바뀌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다음 광고로 ‘이자’가 나왔다.
“이자는 표준화라, 광고가 소용없을 텐데 갑자기 뭐지?”
홀로그램 광고에는 대기업 대표가 이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시작됐는데 본래의 이자가 빠르게 제자리에서 몇 바퀴 돌더니, 다른 스타일로 바뀌었다. 본래의 표준화된 이자는 베이지색으로 통일되어 있었는데, 이 새로운 이자는 색을 선택할 수 있는 기능이 생겼고, 손잡이도 고급스러운 왕좌 같은 모양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자 등받이 뒤에는 ‘에덴 STD’라는 이름이 브랜드처럼 새겨져 있었다. 원래 표준화된 이자에는 이름 또한 새겨져 있지 않았었다.
“이제 이자도 돈 있는 사람들만 좋은 걸 쓰겠구나… 에덴….”
이세벨은 그 많은 옷들을 드디어 다 꺼내어 옷함에 넣으면서, 고아원 1층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이자들과 광고의 새로운 이자에 시선이 왔다 갔다 했다. 그걸 모르는 옷함에서는 가제트팔이 쭈욱 나와, 갠 빨래들을 이 방 저 방 보내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쉴 새 없이 이세벨은 주방이자 식당이 있는 10층으로 발판으로 타고 다시 올라갔다. 이번에는 아이들의 공부식탁이 아닌 주방으로 들어갔다. 점심밥을 먹고 난 그릇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어딜 가든 다 산더미다. 곧 저녁인데 한숨만 나왔다.
학교에서 돌아와서도 고아원 일을 돕느라 그런 건지, 다른 이유로 그런 건지 어느샌가 무표정이 된 이세벨은 식기세척기를 킬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고장 나기 일쑤였고, 고치려고 했지만 구식이라 부품도 없어서 기계 만능인 엘리도 포기했었다.
이세벨은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서 익숙하게 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그 가늘고 하얀 손으로 ‘해야 할 일이 이것밖에 없다면 체념하고 하리라’는 다짐을 했었지만, 오늘은 왠지 답답함이 마구 올라왔다.
‘……소돔은 나와 어울리지 않은 것 같아. 아무래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나안에서 일자리를 찾아봐야 되겠지…? 고아원에 있으려면 아이들도 돌봐야 하니…. 25살은 아직 멀었어.’
이세벨은 본래 소돔에서 일할 생각이었다. 돈을 많이 벌어서 고아원에 기부도 하고 자신도 실컷 쓰고 싶은 소망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소망과는 다르게 날이 가면 갈수록 마음이 헛헛해졌다. 전 세계에서 탑 오브 탑 부자 고등학교로 유명한 소돔 고등학교에 다니다 보니 자신의 채울 수 없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걸 발견해서였다. 공부만 잘한다고 다가 아님을 어린 나이에 깨달아버린 이세벨이었다.
물론 소돔 고등학교는 IQ가 높아야 들어갈 수 있는 학교다. 중학생 때 여러 검사들을 다 받고 배정받는 학교라서, 꼭 부자들만 들어가는 곳은 아니었지만, 발전기금으로 IQ가 높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는 경로는 얼마든지 있었다.
‘… 그래. 나 같은 사람에게 길은 애초부터 하나였지….’
이세벨은 그 많던 설거지를 어느새 마무리하면서 좌절되어 무너지는 마음을 다 잡고 또 잡았다. 하지만 심장이 뚫린 듯 공허하고 무기력해져서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학교에서는 이런 종류의 연약한 모습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 이세벨이다. 재벌친구들에게 밑 보이지 않으려고 두꺼운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설거지가 끝날 무렵 외출하셨던 아줌마와 아저씨가 곧바로 저녁준비를 위해 주방으로 오셨다. 웬일인지 아줌마 얼굴에 눈물자국이 있었지만 이세벨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아이들의 참 교육을 위해 운 척하신 것 같았다. 이세벨은 일부러 웃으면서 아줌마, 아저씨를 맞이하고는 방으로 어깨를 늘어뜨리며 돌아갔다.
***
“세벨이는 어디 갔어? 아까 봤는데!”
“응? 방에서 이자날개 부분 손보고 있을 때, 세벨언니방에서 무슨 소리 나던대? 그나저나 오늘 김밥 정말 맛있어 보인다! 엄마최고!”
엘리는 팔을 걷어붙이며 나훔엄마의 물음에 대답했다. 나훔의 엄마는 아이들에게 이름 없이 ‘엄마’라고 불리고, 나훔의 아버지도 ‘아빠’라고 불린다.
고아원은 재정이 넉넉지 않기 때문에 고아원을 운영하는 나훔의 부모님은 항상 음식을 손수 만드신다.
예전에는 대기업 식당이나 제법 사는 가정집에서는 음식섭취를 대신하는 영양캡슐을 섭취했지만, 인간의 즐거움 중 하나인 씹는 즐거움 때문에 바쁜 사람이 아니고서야 캡슐의 인기는 금세 하락세를 찍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음식을 만드는 로봇이 인기다. 여러 가지 맛과 보는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수많은 요리법이 내장돼 있는 음식로봇은 대기업 식당이나 잘 사는 가정집에서 주로 사용되었고, 몇 가지 요리만 고집하지만 나름의 깊이가 있는 음식로봇은 식당에서 애용하고 있었다. 사고뭉치 삼인방이 지나갔던 음식거리의 레스토랑들이 그렇다. 하지만 정말 사람 손맛을 중시하는, 돈깨나 있는 사람들은 한 끼에 천만 원씩 주고 유명한 요리사의 식당에서 먹는다. 이런 식당은 주로 소돔 재벌집 부근에 위치해 있다.
가난한 가나안 마을의 식당에는 평범한 맛을 만드는 값싼 음식로봇이 있거나 사람이 만드는 수수한 밥집이 있다. 슈퍼에도 슈퍼용 음식로봇이 있어서 바로 만들어주는 간편함 때문에 밀키트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고아원에도 가나안 식당에 있는 음식로봇이 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자주 고장이 나서 폐기처분 할 수밖에 없었고,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나훔의 부모님이 직접 하신 지 꽤 되었다.
나훔엄마는 식사시간에 유일하게 보이지 않는 이세벨을 직접 부르러 가셨다.
“이세벨! 세벨아~~~ 밥 먹어야지! 10층으로 올라오너라~~”
나훔엄마는 10층에 식당에 부착되어 있는 인터폰에 '706'을 누르고, 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이세벨의 안색을 보고 걱정이 되셨던 모양이다.
“아줌마~ 저 안 먹을래요. 오늘은 생각이 없어요.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이세벨의 목소리가 조금 다운되어 있었다. 세벨이만은 어릴 적부터 나훔엄마를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라 부르지 않고 '아줌마'라고 불러왔다.
평소답지 않은 이세벨의 반응에 나훔엄마는 바로 발판을 타고 이세벨의 방으로 갔다.
“세벨아~ 잠깐 들어가도 되니?”
“…네…….”
나훔엄마는 세벨의 방으로 들어갔다. 교복도 갈아입지 않고 그저 멍하게 책상에 앉아있는 세벨의 모습에 나훔엄마는 책상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따뜻한 눈빛으로 세벨의 은색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슨 일 있었어?”
“… 아니에요. 괜히 걱정 끼쳐드리고 싶진 않아요….”
“무슨 소리야~ 너는 나에게 특별한 아이야. 너희 부모님을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단다. 정말 고마우신 분들이었지. 나훔이만 내 자식이 아니라 너도 내 자식이나 마찬가지야. 물론 엘리도!”
“아줌마~~ 흡!”
세벨이는 갑자기 아줌마 앞에서 울었다. 학교에서는 도도하고 차가운 이미지로 굳혀 있어서 쉽게 자신을 드러낼 수가 없던 세벨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줌마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 이쁜 세벨이~~.”
울음이 좀 잦아들자 나훔엄마는 이세벨이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려 입을 여셨다.
“저… 친구들과 에덴 STD 제안받았는데, 고등학교 졸업하고 가나안 마을에서 일자리 찾아볼래요….”
“스카우트 됐어? 우리 세벨이가! 우와~~~~ 여보 여보! 세벨이가 에덴 STD에 스카우트 됐대!!! 어쩐지 시험지 오늘 왔더라. 경찰서 가느라 못 봤지만 세벨이는 항상 만점이니 그러려니 했어!”
나훔엄마는 이세벨이 힘없이 말하는 이야기를 듣다가, 에덴 STD 스카우트 이야기에 흥분해서 밖으로 큰 소리를 쳤다. 에덴 STD는 전 세계에서 1등 회사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고아원에서 아무도 에덴의 제의를 받은 아이는 없었기에 세벨이가 걱정이 되면서도 너무 깜짝 놀랐던 것이었다.
“아줌마…….”
“앗! 미안미안! 내가 너무 흥분했지. 뭐라 그랬지? 미안해!”
“저… 에덴 안 갈 거예요…. 가나안밖에 선택지가 없는 듯해요…. 여기서 일자리 찾아야죠… 부자 친구들 사이에서, 그 부자동네 소돔 마을에서 일할 자신이 없어요. 저는 고아원 사람들이랑 가족같이 지낼 수밖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나훔엄마는 갑자기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났다. 이세벨은 놀랐다. 아줌마가 이세벨에게 화낸 적은 한 번도 없으셨기 때문이었다.
“아줌마, 화나셨어요? 죄송해요….”
나훔엄마가 그동안의 세벨 이를 지켜본 결과, 세벨이는 결심하면 쉽게 바꾸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전부터 고민했던 생각들을 행동으로 풀어낼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세벨이는 19살이고 곧 취업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라면 에덴 STD로 갔으면 했다.
“세벨아~ 잠깐 기다려봐~.”
나훔엄마는 두 입술을 꾹 다물고 주먹을 굳게 쥐고는, 비장하게 사무실이자 자신의 방인 2층에 다녀왔다.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책인 것 같았다.
“아줌마~ 이게 뭐예요?”
“세벨아…, 이건 돌아가신 너희 어머니께서 쓰신 일기장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