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 부러지지 못하다'는 뜻은 여러 가지 뜻을 함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이 느리거나
순발력이 없거나
융통성이 부족하다거나
일처리에 있어서 야무지지 못하다거나
물건을 못 찾는다거나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 아닌지도 모르고
도움요청도 못하다거나
분위기에 따라 대처능력이 떨어진다거나
나서지 못하거나
기타 등등이다.
내 기준에서 고민해 봤다.
우선 생각이 느리다.
상대방이 하는 말은 뚫린 귀로 잘 듣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순발력 있게 대답을 잘 못한다.
집에 가다가 해야 할 말이 생각나거나
아니면 일주일 뒤에 생각이 날 때도 있다.
그래서 웃긴 건,
그 자리에서 따져야 할 것들이나 화내야 할 것들이 있으면
당시에는 오묘한 느낌만 받지
집에 와서야 뒷북을 치며 혼자 화를 삭인다.
하하하~
한 마디로 경청은 끝내주는데,
대화는 애매하고
정작 해야 할 말은 혼자서 하는 편이라는 것!
하지만 정말 해야 하면 장문의 카톡을 한다.
상대가 카톡이 익숙하지 않거나 글을 싫어하는 경우는 전화를 해야 하는데 이럴 때는 준비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담대한 성격도 아니고 무조건 연습을 해야 한다.
'나이가 좀 있으시다면서 그럼 인생을 어떻게 살아요!'라고 할 수 있다!
살아지더라~
모든 경우를 다 일일이 걸고넘어지진 않는다.
그리고 성격이 웬만하면 그 사람에게 직통으로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냥 친한 사람 만나서 하소연하는 정도지 괜히 속을 더 시끄럽게 하기도 싫고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다투기도 싫어서 넘어가려고 한다.
정말 말을 해야 하는 경우에 10이면 한두 번은 말하는 것 같다.
얼마 전에 아부지의 보험청구로 보험사에 어플을 통해 접수했었다.
반려가 됐는데 서류가 미비했는지 진단서를 추가하라고 해서 추가해서 다시 접수를 했다.
그런데 또 반려시키더니 질병코드가 적힌 진단서를 추가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내 실수인가 해서 보험사가 보낸 카톡을 보니
처음에 반려시켰을 때 '진단서'라고만 왔는데,
두 번째 반려 시켰을 때는 '질병코드가 적힌 진단서'라고 왔어서 내 잘못이 아니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전화를 했다.
처음부터 있었던 일을 다 설명을 했지만, 직원은 어쩔 수 없다며 다시 떼오라고만 했다.
자꾸 반복만 되고 개선이 없는 대화에
직원에게 목소리를 날카롭게 해서 '내 실수가 아니라 처음부터 잘 보내셨으면 되잖아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상처받을 것 같아서 '병원이 멀어서 다시 가기가 어려워요. 어떻게 하죠?'라고만 말했다.
역시나 직원은 꿈쩍도 안 하고 똑같은 말만 계속 반복하자
나는 패닉이 돼서 뒤에서 듣고 계시던 엄마를 자동적으로 쳐다봤는데 엄마도 답답하셨는지 '처음부터 제대로 하셨으면 되잖아요!'라고 하셨다.
그걸 직원이 듣고 알겠다고 하셨고
나는 이제 반려가 안 됐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고 죄송하다고 하고 끊었다.
엄마는 뒤에 더 말할까 하다가 참으셨다고 했다.
왠지 엄마께도 그 직원에게도 죄송했다.
내가 중간에서 일처리를 똑 부러지게 잘했다면 서로 안 좋게 되지 않았을 텐데, 나는 왜 그 순간 엄마를 쳐다봤을까?
직원은 마음이 괜찮을까?
지금 내가 착한 척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나는 전혀 착하지가 않은데, 왜 이런 생각들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평화롭고 싶다.
하아~
물건은 눈앞에 두고도 못 찾을 때가 많다.
이거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데 우리 아버지도 그렇다.
유전이 확실하다.
하하하~~
엄마나 조카를 보면 도움을 잘 요청하던데
나는 도움을 스스럼없이 요청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다.
도움을 받으면 나중에 도와줘야 하는데,
그때 못 도와주면 어떻게 하지?
도움을 받으면 당연히 나도 좋지만 갚아야 한다는 생각에 계속 마음 한편에 짐이 쌓여있는 방 같이 뭔가 쌓여있는 느낌이 든다.
이게 좋은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언제 갚을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받는 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음...
그래도 일대일로 도움 받는 거 말고
다수로 도움 받는 거, 예를 들어 코로나 때 정부지원금 받는 정도는 모든 국민을 위한 거니까 이런 건 괜찮다.
엄마를 보면 가족한테 말하는 것처럼 지인에게 전화해서 도움을 당연하게 요청하고,
또 당연하게 도와주신다.
일례로 지인의 친척집 고춧가루를 팔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는데 나 같으면 예의상 찾아본다고 하고선 미안하다고 할 것 같다.
그런데 엄마는 정말 적극적으로 아는 권사님들이나 주민들에게 물어보시고 주문을 해주셨다.
다행인 건 고춧가루를 받으신 분들은 다 가격이나 질, 양에서 다 만족하셨다는 것.
엄마는 MBTI가 E인데 E인 사람들은 다 이런 건가 싶기도 하다.
신기하다.
나는 또 분위기에 따라 대처능력이 떨어진다.
그리고 굳이 나서지 않는다.
단체생활이 힘든데,
다들 한 마디씩 할 때 나는 한 마디도 안 한다.
다들 즐겁게 놀고 허물없이 말할 때 나는 가만히 있는다.
정말 편하지 않으면 굳이 말하지 않는다.
말할 필요성도 못 느끼고.
그리고 뭔가 나서서 일을 도맡아 하는 것에는 부담을 느낀다.
그 책임을 다 져야 하니까.
이게 똑 부러지는 거랑 무슨 상관이냐 할 수 있다.
똑 부러지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건 누구랑 있건 적응을 잘하고 거기에 맞는 표정과 말을 잘하는 것 같다.
나는 그냥 어디에 있건 누구를 만나건 나다.
그래서 고집스럽게 상대를 안 맞혀주는 건 아니다.
일대일로 만나면 상대에 따라서 맞춰진다.
단체생활에 있어서 활동면에서는 똑 부러지지 못하고
일대일에서는 대화에서 똑 부러지지 못하고.
그러면서 뭘 상대에 따라 맞춰지냐고 할 수 있는데
서로 맞추려고 노력하는 사이는 잘 유지가 되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유지하려는 사람과는 잘 유지가 안 되는 것 같다.
일례로 만나자고 해서 카페에서 만났는데 아무 말 없이 침묵으로 가만히 있는 사람은 힘들다.
내가 아무리 단체랑 있을 때 말을 안 한다고는 하지만
시선과 신경이 분산되니까 누구에게 맞춰야 할지 몰라서 그런 거지
일대일은 단체랑 있을 때보다는 훨씬 낫다.
집중할 상대가 있고 대화의 폭도 한 사람에게만 맞추면 되니까.
참 인생 어렵다.
생각해 보니 중학생 때 결혼을 안 하겠다는 친구들이 커서 결혼을 제일 빨리 하고
결혼을 하겠다는 나와 친구들은 제일 안 하고 있다.
대체 이게 무슨 상관관계냐고.
전자의 친구들은 똑 부러져서 공부나 미래에 대한 욕심이 있었고,
후자의 나와 친구들은 물론 공부를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모든 걸 스무스하게 넘어가는 느낌이 있었다.
아마 전자의 친구들은 적응력이 빨라서였을 것 같다.
사람을 만날 때 파악도 빠르고 자신의 상황이나 처지에 대해 인식하는 것도 빨라서
20대 후반에 '결혼'이 자신들에게 어떤 걸 가져다주는지 깨달아서 진로를 빨리 정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인생 다시 태어나면 똑 부러지게 살고 싶어?'라고 물어보신다면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다.
내비게이션이 나오기 이전에 나는 길을 찾을 때 항상 목표지점을 두고 한 바퀴를 돌아서야 찾았다.
어디든 마찬가지였다.
왜 이러지 싶어도 해답은 없었다.
그냥 돌아가야지만 목표에 도달하는 내 특성인 거다.
돌아가면 시간은 늦게 걸리고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아서 조급해지고 걱정이 들지만,
그 누구보다도 인생을 깊고 넓게 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아니~ 단체에서 말 못 하고 물건 못 찾고 할 말도 제때 못 하는 게 무슨 인생을 깊고 넓게 보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게?
하하하하~
단체에서 말을 못 하니까 귀 감각이 발달되는 것 같다.
여러 말들을 들으면서 각 사람의 성향이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
물론 백퍼 맞는 건 아니지만.
물건을 못 찾으니까 주위를 찬찬히 살펴보게 된다.
그 물건만 보는 게 아니라 이 물건 저 물건들의 위치를 살피게 된다.
할 말을 제때 못 하니까 인내가 생긴다.
오래 참아보니까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원래 어른이 아이를 대할 때 인내로서 대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내가 어른이라는 건 아니고!
사랑으로 덮어주는 그런 맛을 아는 건,
한편으로는 괴롭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하다.
내가 성장하는 것 같은 느낌!
이렇게 여러 가지 깊고 넓게 볼 수 있다고 외칠 수 있다!
오늘도 나의 약한 점을 고백하니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