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한 첫 출발, 런치 레이디

미국 초등학교 급식소

by 마리안

미국에 20년 살았다. 한국에 사는 것과 진배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20년 전 한국이 맞을 것 같다. 미국 내 한국 사회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듯 했다. 나는 미국에서 한국 사람들과 어울리며 한국말을 하고 한국 음식을 먹었다. 길에 지나다니는 외국인은 익숙한데, 눈앞에 서 있는 미국인은 어색하고 불편했다. 나는 대체 왜 미국에 사는 걸까?


강물이 흐르다 옆 도랑으로 새기도 하듯, 인생은 내 의지와 다르게 흘렀다. 가만 보면 옆으로 새는 게 주특기다.

감정만 충만하고 계획은 없기 때문아닐까. 어쨌든 나는 참 허술하다. 길을 걷다 일년에 두번 정도는 넘어졌다. 길가에 핀 장미를 보며 걷다가 앞에 드리운 나뭇가지에 싸대기를 맞는가 하면, 걸어가다 전봇대에 박치기를 하기도 했다. 겨울에는 눈길에 신발이 날아갈 정도로 대차게 넘어지고-그것도 치마입은 날-, 비 오는 날은 차에 빨리 타려고 뛰다 길 옆 하수구에 발이 빠져 자빠졌다. 한번은 학교에서 친구에게 인사하려고 뛰다가 배너를 붙인 빨래줄에 목이 걸려 내동댕이쳐진 적도 있었다. 아니 왜 배너를 그렇게 낮게 붙였냐고. 붙인 애들이 키가 작았나보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지방행정직 공무원으로 7년간 일했다. 9급 행정직으로 시작해 8급으로 퇴직했다. 20대에서 30대로 인생의 앞자리가 바뀌던 즈음, '지금 뭔가 새롭게 시작하지 않으면 평생 이렇게 살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가진 거라곤 젊음과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라는 무모함뿐이었다. 허랑방탕 옷 사입고 맛난 거도 사먹으며 아주 조금씩 부은 적금을 홀랑 깨서 호주에 갔다. 일년도 살기 힘든 돈이었다. 일식집에서 설거지와 서빙을 하며 손이 다 뒤집어지도록 일했다. 하지만 비참하지 않았다. 오히려 뿌듯했다. 그래, 난 도전하는 사람이야. 2년이 흘렀다. 그러다 갑자기 곰돌이같이 생긴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것도 한 달 만에. 그리고 우리는 흘러 흘러 미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처럼, 시간이 지나 예전의 무모함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이제는 경력 단절과 충만한 나이까지 장착했는데 도전하고 싶은 욕구는 여전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좀 더 영어공부를 하고 도전해 볼까? 시간은 정말 돈이었다. 시간을 끌면 시간만 지나는 게 아니라 돈도 사라지고 있는 거였다.


한인 기업에 이력서를 낼 수도 있지만, 어차피 하는 거 새롭게 도전하고 싶었다. 처음 이력서를 낸 곳은 학교 급식소였다. 교육청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면접 날짜를 받았다. 교육청 로비에는 다양한 인종의 지원자들이 대기 중이었다. 면접관이 호명했고 나는 방에 들어갔다. 면접 질문 중 하나는 자기소개였다. 간략하게 이력을 말하고, 내가 아이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어필했다. 나는 시종일관 미소를 띄고 적극적인 태도로 임했다. 나를 보는 그녀의 표정에서 호감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직무에 수반되는 요구사항을 설명하고 나에게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당연하죠! 나는 안내를 받아 옆방으로 들어갔고, 집에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초등학교에 배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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