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의 불안과 내면의 안전
첫 출근 날, 신분증과 함께 하얀 플라스틱 카드를 받았다. 명함보다 약간 큰 카드에는 동그란 버튼 하나가 달려 있었다. 단순한 장식이 아닌 이 패닉버튼은 교직원과 학교 그리고 경찰병력까지 연결된 직통라인이다.
비상 상황에 대비한 첨단 안전 시스템(Centegix Crisis Alert System)이라고 한다. 나는 이 버튼이 마치 배트맨과 같은 슈퍼 히어로를 부를 수 있는 긴급전화 같았다. 하지만 손에 쥔 이 작은 기계는 안도감을 주면서도 묘한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은 버튼이 필요한 세상이라니, 과연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걸까?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 가득한 테러사건, 국가 간의 전쟁과 같은 뉴스가 매일 신문을 도배한다. 사실 나는 극장에 가지 않은지도 상당히 오래되었다. 그 계기는 '배트맨 다크나이트' 극장총격 사건 이후였다. 어두운 공간에 낯선 이들과 2시간이 넘도록 함께 있다는 사실이 썩 유쾌하지 않게 느껴졌다. 한때는 이런 위험이 총기소유를 허용하는 미국만의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요즘 뉴스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나라 중 하나인 한국에서조차 무차별 살인소식이 자주 들려오는 걸 보면 말이다.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상대적 안전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집 앞만 나가도 수많은 자동차들이 내 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그래서인지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말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나도 혼자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 중 하나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그렇게 혼자만 있던 사람들이 몇 년 후 갑자기 집밖으로 나와 사제폭탄 같은 존재가 된다는 점이다.
아팔라치 고등학교 총격사건 다음날, 나는 아이들이 학교식당에서 밥 먹는 것을 보았다. 천진난만하게 웃고 떠드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와 같은 위험이 닥칠 경우, 어른인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답답한 마음을 품은 채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유쾌하게 웃는 흑인 경찰, 아이들이 흘린 음식을 치우는 선생님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 이들을 염려하는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니겠구나. 무명의 보통사람들이 세상의 무너진 틈들을 막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사람들이 실은 슈퍼맨, 아이언맨일 수도 있겠구나.
위험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사는 보통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위험한 사람들. 한 여름을 관통하는 태풍과 폭우. 매일 걸어 다닐 때는 고정된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흔들리는 땅. 오락기구인줄 알았던 드론이 폭탄이 되는 시대.
어차피 아무 위험이 없는 곳은 죽어야만 갈 수 있는 천국밖에 없다. 이 세상은 즐거움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곳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 당장 천국에 직행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려면 내 마음이라는 작은 공간을 천국처럼 안전한 곳으로 만드는 방법밖에 없는 것 같다. 세상이 안전해 지길 바라는 것보다 내 마음을 안전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 더 현실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안전한 마음을 만들기 위해 작은 연습을 시작한다. 뉴스 속 나쁜 사람들보다, 조용히 세상의 틈을 메우는 이웃들의 따뜻함에 집중한다. 개인적으로 다급한 상황에는 기도버튼을 누르기로 결심한다. 아무 위험이 없는 저 세상은 언젠가 가게 될 테니, 지금은 내 마음을 가장 안전한 피난처로 만들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