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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침을 살리는 과일

아침 사과, 오후 참외 때론 오렌지

by 뮌헨의 마리


나는 과일을 좋아한다. 과일이 한 끼 식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하비 다이아몬드의 책을 통해 알았다. 뛸 듯이 기뻤다.



저 아삭한 아침 사과! 저 청량한 오후 참외의 맛!


나는 과일을 좋아한다. 과일이 한 끼 식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하비 다이아몬드의 책 두 권 <다이어트 불변의 법칙>과 <나는 질병 없이 살기로 했다>를 통해 알았다. 뛸 듯이 기뻤다. 과일은 영원히 주류가 될 수 없는 간식이자 식후 디저트가 아니었던가.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아침을 먹지 않았다. 결혼 이후부터 아침을 먹었지만 언제나 부담이었다. 아침을 걸러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 때문에 내겐 먹을 수도 먹지 않을 수도 없는 딜레마였다. 독일에 와서는 빵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문제는 암 환자가 되고 난 후였다. 흰 빵 대신 검은 빵 혹은 아침부터 현미밥을 먹으려니 그 역시 부담이었다. 그런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대체 식품으로 등장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것인가. 과일을 많이 먹어서 나쁠 일은 없을 터였다. 특히 암 환자에게 신선한 야채와 과일은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좋지 않겠는가.


내가 과일에 대한 갈증이 커진 건 한국에 와서 3주 동안 병원에 입원했을 때였다. 병원식만 먹으니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못 먹어서 죽을 맛이었다. 야채는 반찬으로 나오는 나물로 대체가 되었지만 과일은 대체 불가. 격리 병동실을 나와 일반실로 오니 옆 침대 할머니 머리맡 선반에 놓인 바나나가 강렬하게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외부에서 과일을 사 와도 되는 거였어? 그때까지 나는 병원에서 주는 것만 먹어야 하는 줄 알았다. 그 바나나는 할머니 드시라고 며느님이 사놓은 것 같았다. 어찌나 먹고 싶은지 참을 수가 있어야지. 참고로 나는 바나나도 좋아한다. 체면 불구하고 며느님께 부탁드렸다. 제가 오랫동안 과일을 못 먹어서요. 바나나가 너무 먹고 싶은데 하나만 나눠주실 수 있나요? 주시더라. 얼마나 측은해 보였으면. 며느님이 집으로 가시고 할머니 혼자 계실 때 귤과 바나나와 오렌지로 대신 갚았다. 비록 할머니는 모르셨겠지만.


사과는 깨끗이 씻어 껍질 째 먹어야 맛이다. 그러나 언니는 내게 껍질을 허락하지 않는다. 혹시 모를 세균 감염 때문에. 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군말 없이 주는 대로 먹는다. 사과를 먹을 때쯤 입도 심심해지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일어나던 습관은 무섭다. 집에 온 지 며칠 째 새벽 다섯 시면 눈이 떠진다. 식탁 방으로 건너가 글을 쓴다. 새벽의 글쓰기도 좋다. 사방이 고요해서 집중이 잘 된다. 첫 문장을 쓰면 쭉쭉 나간다. 두 시간쯤 쓰고 방에 가 보면 언니는 아직 비몽사몽. 원래 그렇다. 환자가 힘든 게 아니다. 보호자가 힘들다. 이것저것 챙겨야지, 환자의 부탁도 들어야지, 집안 일도 해야지. 어제처럼 대중교통으로 외래 진료라도 다녀오는 날에는 환자를 데리고 집 밖을 나가는 것부터 신경이 쓰인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피곤하지는 않을까. 환자가 진료를 받는 동안 기다렸다가 수납하고, 다른 병원에서 림프 부종 치료를 위한 서류도 떼고, 담당의께 감사하다고 매점에서 음료수 박스도 보내고, 병원 밖 약국에서 처방약도 받는다. 말이 쉽지 보통 일이 아니다.



하비 다이아몬드의 책은 한국으로 올 때 환승하던 프랑크푸르트 공항 라운지에서 읽었다.



사과 말이 나왔으니 마무리를 해야지. 사과는 역시 아침 사과 아닌가. 내가 글쓰기를 마무리하고 여덟 시쯤 되면 언니가 일어난다. 늦게 일어난다고? 내가 잠들 때까지 발마사지를 해주느라 언니의 취침은 늘 자정을 넘긴다. 새벽에 화장실을 가느라 깼다가 잠을 못 이루면 또 발을 만져준다. 그러므로 나도 아침 여덟 시까지는 그녀의 수면을 지켜주려 노력한다. 언니는 눈을 뜨자마자 내가 허기질까 봐 사과부터 깎는다. 침대로 돌아온 나는 쿠션에 등을 기대고 언니가 얇게 저며 들고 올 사과를 기다린다. 언니의 사과는 시원해서 더욱 맛있다. 옆에 앉아 내가 먹는 모습을 보다가 한 접시를 더 내올 때도 많다. 나는 사양할 생각이 없다. 나의 아침은 이렇게 시작한다. 침대에서 사과 먹기. 이건 받아본 사람만이 안다. 보살핌을 받는 기분. 아침 사과처럼 아삭하고 상큼하다. 집에서 오후의 휴식을 취할 때. 나는 언니 역시 쉬기를 바란다. 환자에게만 휴식이 필요한 게 아니라서. 보호자에겐 곱절의 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늦은 오후의 산책이 또 기다리고 있기에.


우리 언니에게 이 전략은 잘 통하지 않는 것 같다. 산책 후에도 집에서 내 간식을 챙기기 바쁘다. 간혹 내 위가 혹사당하는 것 같아 불만도 있지만 언니가 시원한 참외를 깎아오면 모든 걸 잊고 환호성이 절로 나온다. 언니를 옆에 앉히고 같이 먹는다. 적당히 달고 적당히 청량한 참외의 맛은 당장 나를 천국으로 인도한다. 참외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눈을 감고 먹어 보시라. 맛에도 아름다움이 있다면 이런 맛일 것이다. 봄비 같은 맛! 한여름 소낙비 같은 맛! 열대 과일처럼 달콤하고 황홀하지는 않다.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다. 참외는 참외로 충분하다. 특히 갓 나온 작고 노랗고 동글동글한 참외라면 더더욱. 어제는 참외를 다 먹자 오렌지도 저미듯 썰어왔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전날 참외에 포도까지 먹었다가 내 위가 어땠는가를 기억해내려 애쓰며. 오렌지는 나 대신 언니가 맛있게 먹었다. (사실은 자기가 오렌지를 먹고 싶었던 거다. 그저께 포도도. 흥, 내가 모를 줄 알고!)


내가 과일만 먹는 건 아니다. 아침마다 호두 몇 알과 다양한 건강 보충제도 챙겨 먹는다. 멀티 비타민도 먹지 않던 내게 언니는 아침마다 내가 삼켜야 하는 알약의 제목과 성분까지 하나하나 읽어주며 손바닥에 놓고 물컵을 들고 대기한다. 알아서 먹으라면 건성으로 답만 하고 안 먹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서 눈 앞에서 확인한다. 나는 언니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면서도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주는 대로 먹는다. 내가 그 성분들을 다 알면 뭐 하나. 관심도 없는데. 언니가 좋다니 먹는 거지. 단순한 건강 보충제가 아니라 언니의 사랑과 정성을 먹는 거니까. 언니를 위해 알약 하나 못 먹어 주겠는가. 별 것 아니지만 과일을 먹을 때는 나만의 법칙도 있다. 식후 과일은 별로다. 영양적인 면에서. 밥보다 먼저 먹는 게 좋다. 최소 30분쯤 전에. 가장 좋은 건 오전 오후 간식 대신 출출할 때 먹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특히 아이들에게 좋은 식습관이 될 것이다. 내 경우 과일을 먹을 때는 한 가지만 먹는다. 과일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다. 오늘도 나는 아침 사과를 먹었고, 바나나와 딸기도 갈아줘서 마셨고, 건강 보충제까지 먹었다. 곧 내가 좋아하는 한살림 호박죽 팩도 데워줄 것이다. 병원에서 처방한 항생제와 함께. 요즘 내 위는 매끼 식사 후 먹는 항생제에도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바나나와 딸기는 생과일 업계의 최고의 파트너다. 나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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