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그림자 같다. 산책길에 부딪는 그림자들. 나무와 꽃들과 잎들과 사람의 그림자조차 희로애락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것이 그림자의 미덕. 그림자처럼 인생에 묻어갈 수 있다면!
오전의 산책길을 수놓는 그림자들.
인생은 그림자놀이 같다. 매일 공원을 돌면 그런 생각이 든다. 산책길에 비치는 그림자를 보며. 발길에 부딪는 그림자들. 나무와 꽃들과 잎들의 그림자. 아침과 점심과 오후마다 길이도 모양도 명암도 달라진다. 전체가 보일 때도 있고 일부만 비칠 때도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희로애락을 드러내지 않는 그림자. 이것이 그림자 세계의 미덕. 그 속에 한 노숙자가 앉아 있다. 그림자처럼 미동도 없이. 마치 인생의 그림자처럼. 매일 산책길에 만나는 사람이다. 물론 말을 건네지는 않는다. 열 바퀴 정도를 돌면 열 번을 보게 된다. 그때마다 정물처럼 앉아있는 한 사람을 본다. 오후 12시. 살아있는 사람들이 밥을 먹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그 시간에.
부처도 예수도 마리아조차 그를 돕지는 못할 것 같다. 그가 무수히 거절하고 사양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도 보았다. 교회 선교팀이 공원에 등장했을 때.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일행이었다. 선교 팸플릿에 생강 사탕과 생강 젤리가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 첫 번째 아주머니는 노숙자 부근을 지나는 내게 사탕을 건네면서 그에게는 주지 않았다. 반대쪽에서 할머니에게 두 번째 사탕을 받았고, 다시 그를 지나칠 때 세 번째 사탕을 받아 챙겼다. 사탕은 산책을 마치고 공원을 떠날 때 그가 앉은 벤치에 두고 올 생각이었다. 오산이었다. 세 번째 사탕을 건넨 아주머니가 그에게 건넸지만 단호히 거절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음 날도 보았다. 그날의 주인공은 검은 옷을 입은 수녀님이었다. 나보다 앞서 걷던 수녀님이 그의 앞에 서서 가방을 열고 그의 의사를 묻고 있었다. 그때도 보았다. 그가 거절하는 모습. 누구도 그를 그림자에서 끌어내지는 못했다. 그의 거부는 완강했다. 나 역시 사탕을 놓고 오지는 못했다. 이유가 있겠지. 끼니도 거르지는 않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버틸 힘이 어디서 나겠는가. 거절에도 힘이 필요하다. 사람을 거부하는 모습도 보았다. 어느 할아버지가 그에게 말을 걸었을 때.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모른다. 할아버지가 돌아서자 그 역시 자신의 벤치에서 인생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정물화처럼 앉아 있었다.
때로는 흐리고 때로는 짙은 그림자들.
선희언니 가족이 왔다. 음식을 얼마나 챙겨 왔는지. 출발 전날 미꾸라지를 사다가 시골 가마솥에서 직접 뼈를 걸러내고 맑은 국물로 추어탕을 끓여왔다. 항암에 좋다는 머위 줄기는 형부가 껍질을 벗기고 부드러운 속살로 데치고 무쳐 쓴 맛을 덜어냈다. 잎은 쪄서 쌈으로 먹었다. 고추 부각과 고소한 김. 부추 겉절이. 가자미조림 속에 시원하고 큼직하게 썰어 넣은 무들. 지인의 딸기밭에 들러 싱싱한 딸기까지 사들고 왔다. 구운 계란도 한 판. 독일 가서 요리할 때 설탕 대신 쓰라고 자연산 벌꿀도 한 병. 엄청 큰 병으로. 짭잘이 토마토까지 한 박스 있었다. 친정 엄마가 현미 잡곡밥을 들고 오시자 밥상이 완성되었다. 달콤하고 싱싱한 딸기는 후식의 본분을 다했다.
선희언니 가족과 한나절을 보내면서도 지치지 않았던 비결은 잦은 휴식 덕분이었다. 점심을 먹고 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울 때도 방으로 들어가 잠시 쉬었다. 놀랍게도 짧은 휴식에도 충전이 되었다. 선희언니와 공원을 산책하는 동안 형부와 조카는 여의도에 오픈한 현대 백화점에 다녀왔다. 산책을 하다가 카페에서 선희언니와 커피도 마셨다. 저녁을 먹기 전에는 선희언니네도 우리도 각자 숙소와 집에서 쉬었다. 샤부로 저녁을 먹었고, 선희언니네는 마트를 구경하고, 언니와 나는 마트에 가는 대신 공원을 걷다 집으로 돌아왔다.
선희언니는 오늘 내가 좋아하는 콩나물밥을 해주겠다고 했다. 아침은 챙겨온 과일과 떡을 먹고 우리와 점심을 먹고 부산으로 출발한다고. 선희언니 역시 20년 전에 신장암에 걸려 신장을 하나 떼어낸 적이 있다. 두 조카가 초등학생일 때였다. 활동적이고 적극적이고 외향적이고 긍정적인 언니는 그 후 육식을 줄이고 건강한 먹거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직접 간장과 된장과 고추장을 담고, 청국장을 뜨는 삶의 시작. 지금은 시골집을 사서 직접 채소도 재배한다. 언니는 전업주부로 살지 않고 일을 하고 있다. 성격까지 밝아서 50대 중반을 지나고도 갱년기를 모른다. 집 안에 웃음이 끊이지 않고 가족이 화목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인생의 그림자가 감히 끼어들 틈이 없다.이틀 동안 선희언니를 지켜보던 이태리 형부가 오늘 아침 내게 말했다. She's great. She's really great..
선희 언니의 마음의 사이즈와 비례하는 음식들. 저걸 차에 싣고 와서 즉석에서 데우고 무치고 구워서 밥상을 차려주었다.
P.S.
1. moon님!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당연히 기꺼이 가겠습니다.제가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내년에 온다면 반드시 천안에 들러 달라시는 그 말씀, 잊지 않고 꼭 기억하겠습니다.
2. 루씨님! '목단'으로 잘못 알고 있던 꽃 '작약'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작약이란 이름이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댓글을 읽고 금방 알아차리지도못했고요. 정신이 다른 동네로 놀러 갔던 모양입니다.
3. 히리아님! '명자꽃' 이름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그런 꽃과 꽃 이름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답니다. 2021년 올봄의 발견이었어요. 덕분에 세상의 모든 명자씨들 이름까지 어여쁘게 느껴졌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