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가 보내준 '연잎밥'을 먹었다. 못 만나는 아쉬움을 '연잎 오리'에도 담아 보내겠다고. 연잎에 싼 오리는 얼마나 향기로울 것인가. 연꽃 같은 E의 마음은 또 얼마나.
E가 보내준 영양 가득한 연잎밥.
드디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일요일 출국이라 나흘 전이었다. 이렇게 일찍 짐을 싸 본 역사가 없다. 언니나 나나 똑같다. 짐 싸기는 벼락치기로 했다. 1주일 전쯤 여행 가방을 방구석에 펼쳐놓고 필요하다 싶은 건 가방 안에 던져놓는다. 며칠 전에 선물도 준비하고. 하루 전날 여행 가방을 탈탈 뒤집어서 차곡차곡 정리하면 끝! 새벽 1~2시까지는 기본이고 정석이다. 우리 남편이야 워낙 잔소리를 안 하는 타입이라 이 패턴으로 굳은 지 오래. 못 챙겨가거나 잊은 물건이 있어도 큰 문제는 없다. 도착지에서 구입하거나 없이 지내면 되니까.
언니 집에 오자 상황이 달라졌다. 이 집엔 잔소리꾼이 한 분 계시다. 이태리 형부. 벌써 몇 번 들었다. 그분의 잔소리. 짐 미리미리 챙겨라. 우리 언니와 나의 게으른 습관을 잘 알고 있어서 저러는 거다.알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건 언니의 몫. 슬슬 걱정이 되는 건 나. 어제와 오늘 양일에 걸쳐 짐을 다 싸겠다고 언니가 큰소리를 친 후부터다. 우린 어제 오전과 오후를 공쳤다. 오전에는 너무 쉬었고, 오후에는 나름 바빴다. 점심 먹고 산책하고 오니 너무 피곤한 거다. 조금 잤다. 일어나보니 나는 마사지, 언니는 미용실 예약 타임. 둘이 엄마 집에서 만나 저녁을 먹고 오니 밤 10시 반이었다.
그 밤을 넘기면 잔소리 폭풍이 불 것 같았다. 한두 해 겪어봤나. 긴장한 내가 먼저 시작했다. 짐 싸기는 자정에 끝났다. 식탁 방 책장 앞에 간이 의자를 나란히 놓고 여행 가방을 올렸다. 내 옷과 소지품. 챙겨가야 할 물건들. 작은 아이 여행 가방엔 아이만을 위한 선물과 과자로 가득 채울 것이다. 언니가 들고 갈 작은 여행 가방엔 내 치료에 필요한 물품으로 채워졌다. 나는 끝났다. 오늘은 언니가 다른 여행 가방에 소지품과 옷가지와 남은 물건을 넣으면 끝. 맛있는 현미 잡곡밥을 위해 쿠쿠 밥솥을 사고, 아이 과자만 더 사면 된다. 얏호! 이젠 맘 놓고 쉬고, 자고, 먹고, 걷고, 책 읽고, 체력을 끌어올리는 일에만 집중하면 되겠네. 속이 후련했다.
항암과 함께 내가 할 수 있는 면역요법에는 뭐가 있을까.
폰도 새로 샀다. 삼성 노트 20 울트라폰. 친구들을 만났을 때 물어보니 S와 J가 노트 20을 쓰고 있었고, Y는 S 21이었나. 역시 노트가 대세구나. 나도 S로 한 번 갈아탄 적을 빼고는 늘 노트를 쓰고 있다. 언니가 단골로 가는 폰 가게에서 구매했다. 노트 20을 사고 싶었는데 젊은 여성인 사장님이 노트 20 울트라를 권했다. 노트 20보다 싸게 주겠다고. 나야 어떤 거라도 상관없다. 저렇게 권할 땐 사정이 있겠지. 성실하고 친절하고 내 일처럼 봐주기로 인근에 정평이 난 사람이었다. 흔쾌히 사기로 했다. 점심도 안 먹고 오랜 시간에 걸쳐 내 폰 정리를 깔끔하게 해 주었고, 언니를 위해 해외 로밍을 알아봐 주었다. 언니가 고맙다고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오트밀 요거트를 배달했다.
코로나검사도 필요하다. 비행기 탑승과 독일 입국을 위해서. 한국에 올 때는 72시간 전에 검사를 하면 됐는데 돌아갈 땐 48시간 이내였다. 문제는 우리가 귀국하는 날이 일요일이라는 것. 코로나 검사와 검사 결과지를 받을 수 있는 모든 병원들이 토요일 오전 근무만 했다. 토요일에는 검사만 가능하고 결과지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뮌헨의 조카가 인천공항에서 가능하다고 알려주지 않았다면 낭패를 볼 뻔했다. 모든 검사는 사전 예약제라 늦은 밤 인천공항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토요일 모든 검사는 예약이 끝나 있었다. 멘붕 상태로 자고 다음날 아침 예약 사이트를 들락거리던 언니가 드디어 토요일 오전 예약에 성공했다. 누군가가 예약 취소를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코로나 때문에 입국도 출국도 쉬운 게 없다.
E가 보내준 '연잎밥'도 먹었다. 얼마나 오랜만에 먹어보는 연잎밥인지 연잎을 푸는 순간 감격했다. 연잎밥은 내 친구Y가 특히 좋아했다. 부산에서 우리 친구들을 데리고 산성까지 올라가서 사 준 적도 있다. E에게는 출국일을 미리 말할 시간이 없었다. E도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했고 퇴원 후에는 면역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수원에서 서울까지 나올 체력이 아니라서 이번엔 못 보고 가겠구나 싶었다. 갑자기 출국한다 하니 얼마나 놀라던지. 토요일이라도 잠시 보고 싶다 했지만 힘들 것 같았다. 토요일 오전에 공항에서 코로나 검사를 한 뒤 오후 4시 반 결과지가 나올 때까지 대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6시쯤 돌아오면 많이 지칠 것이다. 저녁을 먹고 일찍 자야 다음날 오전 비행기를 탈 수 있기에. E는 아쉬운 마음을 '연잎 오리'에담아 보내주겠다고 했다. 연잎에 싼 오리는 얼마나 향기로울 것인가. 연꽃 같은 E의 마음은 또 얼마나.
떠날 준비는 되었다.
P.S.
1. 어느 구독자님께서 말씀하셨다. 브런치가 개인적인 교류도 적고 번개도 없는 편이지만, 내가 건강하게 다시 돌아오기만 한다면 '없는 번개도 요란하게 치겠노라'고. 그리고 덧붙이셨다. 기다리겠노라고. 잊지 않고 기다리겠노라고. 그러니 치료 잘 받고 꼭 다시 오라고. 마음이 찡하고 울렸다. 이토록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다시 돌아올 이유를 주시다니! 번개 치시면 언제라도 천둥처럼 화답하겠다는 말씀 꼭 전해드리고 싶다.(Morgen님, 감사합니다. 말씀만 들어도 힘이 나고 기뻤습니다..)
2. 어느 분이 독일에서 우리 아이가 키우는 쥐 이름을 물으셨다. '렌 모이제 Rennmäuse'라고 들었다. 사람으로 치면 Runner. 쥐니까 Running Maus쯤 되겠다. 볏단을 깔아주면 그 속에서쉼 없이 달리며 굴을 파는 습성이 있나 보다. 실제로도 그렇다고 우리 아이가 전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