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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May 01. 2021

'겨울길'에서 벚꽃을 보다

<유명가수전> 5회


반가운 소식이 있다. 뮌헨에서 벚꽃을 보았다. 인터넷으로 <유명가수전>도 보았다. 시차 덕분에 한국과 실시간으로 금요일 밤에. 이승철과 이승윤의 <우린>을 듣고는 울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슬퍼서. 너무 행복해서.


왕겹벚꽃의 위엄. 꽃들의 존엄함에 압도되던 사월의 마지막 날.


항암 준비는 모든 게 슬로인 독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초스피드로 진행되고 있다. 귀국 다음 날 주치의를 방문해서 항암을 시작하겠다고 보고했다. 사흘째에 암 수술을 했던 병원의 교수와 상담 후에 항암을 결정. 나흘째 항암을 위한 카테터(항암포트) 수술 오리엔테이션 완료. 닷새째인 어제는 카테터 삽입 수술을 했다. 카테터는 폰으로 설명하자면 유심이나 칩 같은 개념이다. 어깨 앞쪽을 절개한 후 그 안에 넣는 작은 기구로 항암 치료를 할 때 거기로 항암약을 넣는다고 한다. 수술 시간도 짧고 수면 마취를 한다고 해서 안심을 했다.


예상과는 달리 실제 수술 시간은 두 시간이 걸렸다. 어제 아침 8시부터 10시까지. 수술 도중 1시간 만에 잠이 깼다. 나머지 1시간은 두 명의 의사가 내 귀 옆에서 하는 모든 대화를 들어야 했다. 주로 여의사가 남자 의사에게 수술 방법을 가르치며 설명하는 것 같았다. 남자 의사가 한 번의 실수를 했고 그걸 만회하느라 시간이 배로 걸린 듯했다. 수술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마취는 왜 그리 짧던지. 잠이 들어버리면 편했을 것을.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로 돌아왔다. 지난번 암 수술 때와 마찬가지로 뜨거운 차와 식빵 1/4 크기의 딱딱한 비스킷 3개를 주길래 맛있게 먹었다. 추억에 젖어서. 아침에는 흐렸는데 해가 나온 창밖도 바라보며.


마취가 남아있을 수 있으니 그날은 집에서 쉬라고 했다. 산책은 안 되나요? 독일은 산책에 관대한 나라다. 산책은 운동이 아닌 숨쉬기. 동행만 있다면 괜찮다고. 팔을 90° 위로 들어 올리지 말고, 향후 10~12일 동안 옷장을 옮기지는 말라. 샤워는 4~5일 후에나 가능하다. 열이 있거나 통증이 심하면 이부프로펜을 복용할 것. 나는 집에 타이레놀이 있었다. 오가는 길은 남편이 차로 데려다주었다. 코로나로 작년 12월 수술 때처럼 병원에는 혼자 들어가야 했다. 금식 후라 집에 오자마자 점심을 먹고 잠이 들었는데 오후 3시에 언니가 깨우심. 날이 좋으니 산책을 가자고. 그렇게 산책을 다녀왔다. (우리 집에는 산책 귀신이 둘이나 있다. 눈만 뜨면 산책 가라고 쫓아내서 죽겠다. 맘 놓고 낮잠도 못 잔다. 덕분인지 밤잠은 잘 잔다.)



벚꽃이 핀 빈터 슈트라세. 시누이 바바라 집 근처다. 우리 집에서는 걸어서 15분.


다음 주도 바쁘다. 병원에서 CT 촬영, 주치의와 복부 초음파 검사, 1차 백신 접종도 예약되어 있다. 주치의에게 맞는다. 1차를 맞으신 힐더가드 어머니께 여쭈니 부작용은 전혀 없으셨다고. CT는 복부에 염증이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항암은 카테터 경과를 본 다음 일정이 나올 것 같다. 떨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떨린다. 범보다 무서운 항암을 잘 이겨낼 수 있을까. 그러나 이겨내야 한다. 반드시. 독일에 온 후로는 언니도 나도 자주 울지 않는다. 대신 남편이 울었다. 교수와 상담을 앞둔 전날 밤에. 다행이었다. 남편에게도  시간과 위로가 필요하다. 아니면 그 긴장을 어쩔 것인가. 운다면 또 어디 것인. 나와 언니 앞이 아니라면.


반가운 소식도 있다. 언제 들어도 반가운 건 소식. 빈터 슈트라세 Winterstraße에서 벚꽃을 보았다. 우리 집 옆에는 이름도 예쁜 좀머 슈트라세 Sommerstraße가 있다. 뜻은 여름길. 겨울길은 없나? 있다. 시누이 바바라 집으로 가는 길에. 이름하여 빈터 슈트라세 Winterstraße. 그 길에 벚꽃이 만개한 것은 병원을 가다 다.  앞에 사는 바바라가 알려준  아니다. 혼 좀 야겠다. 이렇게 예쁜 꽃혼자서만 보다니. 예전에는 봤나? 독일에 와서 네 번째 맞는 봄인데. 기억이 안 난다. 원래도 기억력이 꽝이지만 이건 좀 심하다. 아무튼 그냥 벚꽃이 아니었다. 왕겹벚꽃. 나무는  얼마나 우람한. 꽃들에게도 꽃나무에게도 위엄과 존엄이 있다면 바로 이런 풍경을 두고 하는 말이겠다.


또 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어젯밤 인터넷으로 <유명가수전>도 보았다! 이번에 느낀 건데 나이 오십이 되면 한참 어린 동생들과 조카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그래야 떡도 나오고 밥도 나온다. 실제로 한국의 80년대생 사촌 동생들과 뮌헨의 90년대생 조카에게 많이 배우고 있다. 우리 조카는 요즘 매주 두세 번씩 우리를 방문한다. 아이도 즐겁고 우리도 즐겁다. 내가 이번에 한국에 가서 가장 좋았던  <유명가수전> 시청이었다고, 뮌헨에 와서 가장 아쉬운 것도 <유명가수전>이라고 하자 조카가 뭐라고 한 줄 아는가. 이모, 그거 여기서도 볼 수 있어요. 대박! 그게 어떻게 가능해? 어제 나는 행복했다. <유명가수전>을 볼 수 있어서. (내가 김범수의 찐팬이라면 우리 언니는 이승철의 찐팬이었다! 내 친구 Y도 그의 찐팬이라며 오늘 아침 톡으로 살며시 커밍아웃. 나는 어제서야 그에게 반한 1인!) 시차 덕분에 한국과 실시간으로 금요일 밤에 볼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그리운 이들과 같이 보는 기분. 이승철과 이승윤의 <우린>을 듣고는 울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슬퍼서. 너무 행복해서.



바바라는 저 성당 뒤에 산다. 보기는 좋은데 주말에는 괴롭다. 늦잠을 자기가 어렵다. 성당 종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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