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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May 08. 2021

꽃과 노래가 없다면

<유명가수전> 6회


꽃과 노래가 주는 위로가 있다. 삶에 꽃과 노래가 없다면! 또 있다. 문어가 없다면 독일에서 나는 무엇으로 기운을 낼 것인가. 빅투알리엔 마켓에서 문어를 샀다. 덕분에 저녁 식탁이 풍성했다.


율리아나 할머니가 주신 다육이 꽃(위). 뮌헨의 빅투알리엔 마켓(아래).



사흘째 비가 내렸다. 기온은 10도. 오월 날씨가 이게 말인가. 언니를 위해 거실의 난방을 높였다. 겨울에 언니가 보낸 파카도 다시 꺼내 입었다. 다행인 건 비가 하루 종일 내리지는 않는다. 금방 해가 나오기도 난다. 독일 사람들이 비가 와도 우산을 안 쓰고 의연한 이유다. 종잡을 수 없는 날씨를 알기 때문. 독일 사람들의 모자 딸린 방풍 방수 쟈켓도 한 몫하겠지. 오전에 일본 슈퍼에 갈 때도 비가 쏟아졌다. 남편이 아플 때면 일본 미소 된장을 국처럼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기 때문이다. 백신을 맞은 뒤엔 몹시 피곤하다 했다. 아침을 먹고 또 눕길래 언니와 나왔다. 살 건 많지 않았다. 남편용으로 미소 된장 몇 팩, 아이용으로 삼각김밥 몇 개. 집에 고추장이 떨어졌다며 언니가 샘표 고추장 한 통. 나? 나는 백신 맞은 팔이 조금 묵직할 뿐 특별한 증상은 없었다.


사람이 아프면 단순해진다. 모든 감각이 둘로 나뉜다. 몸이 편한가 안 편한가. 밥이 맛있나 안 맛있나. 잘 잤나 못 잤나. 음식도 단순해진다. 밥과 국만으로 충분한 날이 있고, 반찬이 몇 가지  있어서 더 좋은 날도 있고. 어느 날 갑자기 아메리카노가 마시고 싶을 도 있다. 그래서 생각해냈다. 텀블러에 뜨거운 물을 담아가서 에스프레소를 부어 마시는 방법. 라테나 카푸치노도 좋지만 우유가 섞인 건 더 이상 안 먹고 싶어서. 빅투알리엔 마켓의 로스팅 카페에서 테이크 아웃 에스프레소를 나만의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마시던 . 행복했다. 비가  그치다가를 몇 번이나 반복하 오후였다. 또 있다. 문어가 없다면 독일에서 나는 무엇으로 기운을 낼 것인가. 미꾸라지와 장어 대신 빅투알리엔 마켓에서 문어를 다. 저녁 식탁이 풍성했다.



빅투알리엔 마켓의 로스팅 카페.



꽃과 노래가 주는 위로라는 게 있다. 삶에 꽃과 노래가 없다면! 심심하고 지루하고 재미라고는 없을 것이다. 1.5kg의 대형 문어를 삶아서 저녁을 먹을 때였다. 율리아나 할머니가 전화를 주셨다. 뮌헨에 돌아온 걸 축하한다며 줄 것이 있으니 잠시 내려오라는 말씀. 문어를 먹다 말고 언니와 함께 뛰어내려 갔다. 1층 현관문을 열어놓고 기다렸다. 할머니가 들고 오신 건 작은 꽃이 만발한 다육이 화분과 마카롱과 딸기. 전날엔 율리아나 엄마 이사벨라의 전화도 받았다. 동료 중에 척추뼈에 암이 생긴 두 아이의 엄마가 있는데 잘 투병하고 있으니 나도 기운 내라고. 자기 엄마가 조만간 날 한번 보고 싶어 하신다고. 나도 할머니께 꽃을 드린 적이 있다. 한국에 가기 전날이었다. 빅투알리엔 마켓에서 장미를 사다 이사벨라에게 주었다. 율리아나 할머니께 전해 달라고. 인사 못 드리고 가서 죄송하다고. 한국 다녀와서 뵙겠다고. 


금요일 밤에는 <유명가수전>도 보았다. 김연자라는 가수도 트로트의 세계에도 큰 흥미는 없었다. 조카의 엄마인 선희 언니가 요즘 한국은 트로트가 대세라며 한번 들어보라 했지만 한국에서도 <싱어게인> 돌려보기만 완주고 왔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김연자 편은 반대였다. 47년 관록은 함부로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이크를 올리고 내리고, 들었다 놓고, 던지고 받는 동작 하나조차 범상치 않았다. 시작을 메들리로 갈 때 흘러넘치던 흥과 끼. 열정으로 빛나던 그녀의 얼굴과 눈빛. 꾸밈 없고 솔직한 토크 좋았다. 웃고 또 웃다가 아픈 것마저 잊었다. 자신을 미워했던 <아버지>를 위해 노래하정홍일은 감동이었고, 이승윤의 <아모르 파티>는 감동 이상이었다. Amor fati.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그 말. 나는 준비되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투병하는 나의 운명까지도.



율리아나 할머니가 선물로 주신 다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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